영화 <말없는 소녀>를 보고
“넌 왜 말이 없어?” 성향상 낯을 가리고 부끄러움이 많았던 내가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다. 초중학교 생활기록부에 적힌 공통적인 특징도 ‘차분하고 조용하다’였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아마 존재감이 없는 아이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그냥 조용하고 얌전했던 아이. 그러나 어딜 가나 이러한 나를 답답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들어서야 MBTI가 유행하면서 내향적인 사람들을 이해하는 시선이 많아졌지만, 과거엔 ‘말이 없다’는 걸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이해한다. 내가 '나'를 알기 위해 시도했던 대외 활동들이 대부분 외향적인 사람을 선호했으니 말이다. 그 당시는 특히 그랬다. "열정"이 키워드였다. 술을 잘 마시고 외향적인 사람, 그런 사람이 열정 있는 사람이자 인재였다. 조용히 있으면 ‘재미없는 사람’, ‘열정 없는 사람’에 속했다.
영화 <말 없는 소녀>는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를 각색한 영화이다. 경마장을 일삼아 다니며 도박에 빠진 아빠, 가난에 의지할 곳 없이 아이를 임신한 채 우울증에 빠진 엄마, 가족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아이들. 그 속에 막내였던 코오트는 나와 같이 ‘말이 없는 소녀’였다. 그녀는 말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괴짜, 겉도는 아이로 불리곤 했다. 엄마의 출산이 임박해지자, 코오트는 여름 방학 동안 먼 친척 부부에게 맡겨진다.
아빠 ‘댄’은 딸 ‘코오트’를 맡길 때에도 마치 문제아를 맡긴다는 듯 “얘 엄청나게 먹을 겁니다. 먹는 만큼 일 시키세요. 넌 말썽 피우지 마”라고 말한다. 그러자 ‘에일린’ 부부는 오히려 “그럴 필요 없어. 기꺼이 돌봐줄게. 대환영이야”라고 말하며 코오트를 따스하게 맞이해 준다. 평소 괴짜라고 취급받아 늘 숨어 있거나 구박받던 코오트였는데, ‘에일린’ 부부는 코오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을 느끼게 해 준다.
사랑은 꼭 말로 표현해야만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영화에서처럼 매일 100번 코오트의 머리를 빗어주고, 같이 감자를 깎으며 음식을 만들고, 어쩌다 화를 낼 때면 미안하다는 말 대신 작은 쿠키 하나를 건네고,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옷을 여며주는 섬세한 행동들이 코오트에게 사랑을 느끼게 해 준다.
현실은 영화와 다를까? 다르지 않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느꼈던, 혹은 내가 사랑을 준 순간들도 같았다. '언제나 너를 믿고 있다, 사랑한다'며 보이는 따스한 눈빛과 미소, 스쳐 지나가는 말을 기억하고 배려해 주는 행동, 문득 생각이 났다며 건네온 연락이나 작은 선물들, 오밀조밀한 글씨로 적은 편지들,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옆에 함께 있어 주는 순간들이 나에게 사랑을 느끼게 했다.
"아무 말 안 해도 돼. 언제나 그걸 기억하렴. 많은 사람이 침묵할 기회를 놓쳐서 많은 걸 잃었단다.”
에일린 부부는 코오트에게 늘 한결같은 태도를 보였다. 꼭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코오트를 기다렸고, ‘요즘 보기 드문 아이’라며 칭찬을 하기도 했다. 코오트는 점차 그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고, 마지막 장면에선 처음으로 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한 때 난 조용했던 내가 싫었다. 나와는 정반대인 활발하고 밝은 사람들이 부러웠었다. 그래서 억지로 텐션을 높이거나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에일린 부부와 같이 사랑과 인내로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정적이고 차분해서 좋다’고 말하는 선생님이 있었고, 힘든 걸 뒤늦게 이야기해서 미안하다고 할 때 “너 원래 그런 거 알고 있었어. 괜찮아. 지금이라도 말해줘서”라며 아무렇지 않게 툭 말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외에도 존재 자체로, 눈빛으로, 포옹으로 사랑을 알려준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들 덕분에 나도 코오트처럼 마음을 열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기다려주는 마음, 상대방의 좋은 점을 보려는 마음, 섬세한 배려와 순수한 관심, 그게 바로 사랑이 아닐까 싶다. 사랑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그 마음만은 온전히 느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