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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zip Dec 29. 2022

엄마가 한아름 담아준 고추가 또 상했다

과한 사랑은 때론 속상함일지도,

자취를 시작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자식의 끼니도 부모님에겐 여전히 걱정거리인가 보다. 10년이 다 되어가는 무수한 거절에도 여전히 엄마는 호시탐탐 나에게 반찬을 보내줄 기회만을 노린다.




“이 고추 진짜 맛있네?”

“그래? 그럼 서울 올라갈 때 (!) 담아줄까?”


대부분의 사안에서는 나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엄마도, 음식에 한해서만은 그 프리함을 잃는다. ‘뭔가가 맛있다’라는 심플한 코멘트 하나에도 엄마의 은밀한 회유는 시작된다.


코로나 여파로 천정부지로 뛴 서울의 밥상머리 물가, 배달 음식을 먹은 후 몰려오는 그놈의 배민 현타로 인해 잠시 갈등하는 나.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다 먹어치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조금만 담아달라”는 부탁을 하고야 만다(!!).


버스 시간을 앞두고 풀어놓았던 짐을 바쁘게 다시 끌어모으는 동안, 엄마는 나에게 줄 음식을 챙긴다. 고추를 좀 싸달라는 요청이 다른 음식까지 싸달라는 허가증이 되었는지, 집에서 직접 만든 요거트에, 샤인 머스켓에, 김치에 …… 감사하게도 나의 캐리어는 내려올 때보다 조금 더 묵직해진다.




서울에 올라가 짐을 풀고 보니, 조금만 담아달라고 했던 고추는 역시나 한 봉지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요즘 말하는 '소식좌'다. 선천적으로 위장이 예민한 탓이다. 여기에 귀차니즘까지 더해지니 혼자 해 먹는 끼니는 3첩 반상을 넘는 일이 잘 없다. 더군다나 아침에 매운 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을 것을 생각만 해도 배가 더부룩해지는 느낌이었다. 결국 고추들은 저녁에나 가끔 내 밥상에 올랐다.


아니나 달라, 집에서 가끔 먹는 저녁에 겨우 한두 개 챙겨 먹던 고추들은 몇 주 뒤 처참한 몰골의 갈색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엄마의 사랑이자 딸이 끼니 거를까 하는 걱정이었던 고추(였던 것)들을 역겨워하며 치우고 있자니 참 죄스럽고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음식 쓰레기를 버리며, 과한 사랑은 때론 감사함이 아닌 속상함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한아름 담아준 고추를 떠올릴 때마다 나의 마음이 무거워졌듯이 말이다.

그리고 내가 주고받았던 다른 과한 사랑들도 떠올랐다.


부담스러운 가격의 선물, 다 답해주기엔 너무나 큰 섭섭함이 담긴 장문의 메시지, 생각해놓은 시간보다 더 오래 있어달라는 요구들……. 상대방이 소화해 낼 수 있는 사랑보다 과한 사랑은, 결과적으로는 둘 모두에게 속상한 일이었다.


몇 번씩 엄마 반찬을 상하게 하고 난 후에 깨달았듯이, 몇 번의 사랑을 망치고 난 후인 이제는 안다.  

소화할 수 있는 적절한 음식의 양이 모두 다르듯이 사랑의 양도 그렇다고. 그리고 그것을 존중해주는 것 또한 사랑임을 말이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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