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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S Nov 07. 2021

취미가 무엇인가요?

<뉴욕 3부작> - 폴 오스터

누군가 당신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었을 때(특히 이성이) 독서라고 대답하는 것은 쿨하지 못하다. 독서와 영화 감상, 음악 감상 같은 스테레오 타입의 취미는 타인이 나에 대한 흥미를 순식간에 제로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부비트랩이니까. 하지만 아주 감사하게도 상대는 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일말의 가능성을 품고 상대는 다시 질문한다. 주로 무슨 책을 읽으시나요? 이 질문에 당신이 소설이라 답했다면 그와의 인연은 딱 오늘까지 일 확률이 매우 크다. 당신은 실패했다.


오늘날 소설을 읽는 것에 대해 늘 고민한다. 유튜브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세상에서 고리타분한 책을? 거기에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인 소설을?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같은 표정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그래서 요즘은 지식 습득이 주 목적인 책도 본다. 하지만 우두커니 앉아 드립 커피를 홀짝대며 시간을 보내기에 소설보다 좋은 책은 없다. 책을 덮은 후에 깊게 밀려오는 여운은 온갖 부당하고 부정한 삶의 찌든 때를 지워준다. 이 글은 유튜브를 멀리하고 책을 보십시오.라고 말하는 한심한 소리를 하는 글이 아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유튜브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다. 나 역시 유튜브를 즐겨본다. UCC로 시작된 단순 흥미 유발의 영상을 넘어 방송에서 시도할 수 없는 다양한 콘텐츠들이 생산되고 있다. 바야흐로 대 콘텐츠의 시대이다. 방구석에 앉아서 수 백번의 인생을 살아야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간접 체험하고 있다. 아마 프랜시스 베이컨이 현재를 본다면 놀래 자빠질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 대한 리뷰를 굳이 남기는 이유는 조금이나마 더 많은 사람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느꼈으면 하는 희망에서다. 쉽게 지쳐버릴 수밖에 없는 고된 삶에서 소설이 주는 기쁨은 확실하고 강렬하니까. 인간이라는 종은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누려 하는 속성이 있다. 이 선순환은 문명과 역사를 창조했다.


사람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해도 문장을 보면 누군지 기억할  있다고 했다. 누가  말인지, 정확히 모를  문장이  머리엔 깊게 각인되어있다. 직후에 떠올리는 몇몇 작가들이 있다.  오스터의 이름은  바닥을 다 접기 전에  튀어나온다. 그의 소설을  좋아한다. 문단도 거의 나뉘어 있지 않은 종이에 빽빽하게 쓰여있는 문장들,  없이 이어지는 인물의 심리와 행동, 그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흔한 사립 탐정들의 발자취는 활자를 읽는 행복을 누리게 한다. 길게 이어지는 줄거리는  명쾌하게 끝나지 않는다. 소설  소설의 이야기로, 인물이 발견하는 다른 인물의 이야기로, 오스터의 소설은  겹의 층위로 세워진 고독한 탑이다. 주류 문학계에서 꼽히는 이름이 아닐지언정  문장을 보면 마치  오스터만의 입체적인 인장이 떠오른다.


뉴욕 3부작은 특이한 구조를 가진다. <유리의 도시>, <유령들>, <잠겨 있는 방> 세 단편은 서로 독립된 이야기로 읽히지만, 마지막 <잠겨 있는 방>을 읽은 후에 세 이야기가 굉장히 모호한 방식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유리의 도시>에선 작가 자신의 이름을 부여한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허구와 경험 사이를 저울질한다. <유령들>은 아예 인물들의 이름을 삭제한다. 블루, 브라운, 화이트, 블랙과 같은 이름을 가진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탐정 서스펜스의 탈을 쓴 자아 찾기랄까. 디오니소스적 도취와 아폴론의 냉정 사이를 줄 타면서 삶의 아이러니를 증명하는 쿤데라의 방식, 광야로의 도피와 귀인의 도움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헤세의 방식과는 확연히 차별화된다. 뉴욕 3부작에서 인물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특정한 인물을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거나 잃게 되면서 이야기는 횡이 아닌 종의 방향으로 변모한다. <잠겨 있는 방>은 앞선 두 단편과는 다르게 이야기에 힘이 실려 있다. 펜쇼라는 완벽한 친구의 실종, 그의 부인으로부터 받은 의뢰를 시작으로 주인공의 이야기는 흘러간다. 그가 남긴 작품들을 처리하며 그의 삶을 재구성하게 되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정체성은 모호해진다.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생각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인물들의 행동과 심리, 하지만 인물에 몰입되어 어느새 그의 자취를 좇고 있는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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