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크시의 퍼포먼스와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
관점 프리즘 No.9
2018년 10월,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미술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얼굴 없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작품 <풍선과 소녀(Girl with Balloon)>가 약 15억 원(104만 2천 파운드)에 낙찰되는 순간, 액자 내부에 숨겨져 있던 파쇄기가 작동했습니다. "삐-익" 하는 기계음과 함께 그림은 액자 밑으로 흘러내리며 세로로 잘려 나갔습니다.
경매장은 순식간에 충격과 혼란에 빠졌습니다. 뱅크시는 이후 SNS에 피카소의 말을 인용해 "파괴의 욕구는 곧 창조의 욕구다"라고 남기며, 이 행위가 미술품을 투기 대상으로 삼는 자본주의 미술 시장에 대한 조롱이자 저항이었음을 암시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파쇄된 그 작품은 쓰레기통으로 가는 대신, <사랑은 휴지통에(Love is in the Bin)>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고, 3년 뒤 경매에서 무려 18배가 뛴 약 300억 원(1,858만 파운드)에 낙찰되었습니다.
작가는 시장을 파괴하려 했으나, 시장은 그 파괴조차도 '가장 비싼 상품'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저는 이 기묘한 역설을 보며, 1967년 프랑스의 철학자 기 드보르(Guy Debord)가 그의 저서 『스펙터클의 사회(La Société du spectacle)』에서 예언했던 서늘한 경고를 떠올렸습니다.
기 드보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스펙터클(Spectacle)의 사회'라고 정의했습니다. 여기서 스펙터클은 단순히 화려한 구경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지로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이자, "자본이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상태"를 말합니다. (출처: 기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
쉽게 말해,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실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와 자본이 만들어낸 '이미지(환상)'를 소비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경험보다는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이 중요하고, 물건의 사용 가치보다 그 물건이 주는 '브랜드 이미지'가 더 중요한 세상. 이것이 바로 스펙터클의 세계입니다.
이 관점에서 뱅크시의 파쇄 사건을 다시 봅니다. 뱅크시는 자신의 그림을 갈갈이 찢음으로써, 예술이 자본의 노리개가 되는 것을 거부하려 했습니다. 그는 '이미지'를 파괴함으로써 '실재(Real)'를 드러내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이 파쇄되는 그 순간, 그 행위 자체가 전 세계 뉴스와 SNS를 타고 퍼져나가는 거대한 '스펙터클'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찢어진 그림을 보며 자본주의의 추악함을 깨닫는 대신, "와! 정말 쿨하고 힙하다!"라며 그 극적인 연출에 열광했습니다. 뱅크시의 저항은 그가 비판하려던 시스템 안에서 가장 화려한 '구경거리'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가장 무서운 능력을 '포섭(Recupera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체제에 위협이 되는 반란이나 비판적인 아이디어를 시스템이 흡수하여, 무해한 상품이나 스타일로 변질시켜 버리는 능력을 말합니다.
체 게바라의 혁명 정신이 티셔츠에 프린트되어 팔리고, 펑크(Punk) 록의 저항 정신이 백화점 마네킹의 가죽 재킷 패션이 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뱅크시의 사건은 이 '포섭'의 매커니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미술 시장은 뱅크시의 공격에 당황하거나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공격을 "작가가 직접 개입한 최초의 라이브 퍼포먼스 예술"이라고 재빠르게 포장했습니다.
소더비의 관계자는 사건 직후 "우리는 '뱅크시' 당했다(We've been Banksy-ed)"라고 말하며, 이 당혹스러운 사고를 유쾌한 해프닝이자 마케팅 포인트로 전환시켰습니다. 파괴된 그림은 이제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미술사적 사건의 증거물'이라는 희소성을 얻으며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자신을 향한 비수조차 황금으로 도금하여 더 비싼 값에 팔아치웠습니다. 뱅크시가 그림을 반만 파쇄하고 멈춘 것이 기계 고장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의도된 연출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저항'은 미술 시장의 배를 불리는 가장 훌륭한 '연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뱅크시는 실패한 혁명가일까요, 아니면 이 모든 것을 계산한 천재적인 사기꾼일까요?
저는 그가 이 스펙터클의 사회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영리한 '줄타기 광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익명성과 반항적인 행보가 대중에게 어떻게 소비되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동시에 그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스포트라이트를 이용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합니다.
그의 작품은 미술관이 아닌 거리의 벽에 그려지지만, 결국 벽째 뜯겨 경매장에 팔려나갑니다. 그는 이 모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시스템을 조롱하고 균열을 내려 시도합니다.
하지만 기 드보르의 시선으로 볼 때, 이 줄타기는 위태롭습니다. 뱅크시의 모든 시도가 결국은 '가장 힙한 상품'으로 귀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중은 뱅크시의 그림에서 '팔레스타인의 고통'이나 '자본주의의 모순'을 읽어내기보다, "저게 뱅크시래! 저거 엄청 비싸대!"라는 스펙터클만을 소비합니다.
<사랑은 휴지통에>라는 제목은 중의적입니다. 뱅크시는 예술을 돈으로만 보는 세태를 휴지통에 처박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 휴지통마저 '예술'이라 부르며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예술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작품의 진실인가, 아니면 가격표와 화제성이 만들어낸 스펙터클인가?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은 잠들지 않는 제국"이라고 했습니다. 뱅크시의 파쇄기가 멈춘 후에도,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는 멈추지 않고 돌아갑니다. 저항마저 상품이 되는 이 견고한 시스템 속에서, 예술이 순수성을 지키며 '진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저에게 뱅크시의 반쯤 찢어진 그림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액자 밖으로 탈출하려다 끝내 반쯤 걸려버린, 현대 예술의 서글픈 자화상처럼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