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곡(Curating)이 영화의 정체성이 되는 법
Sound Essay No.46
우리는 영화음악 하면 보통 존 윌리엄스나 한스 짐머 같은 위대한 작곡가(Composer)들이 오선지 위에 그려낸 오리지널 스코어(Original Score)를 떠올립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그 음악들은 영화를 위해 새롭게 '창조'된 소리들이죠. 하지만 현대 영화, 특히 팝 문화와 밀접하게 결합한 최근의 콘텐츠들에서는 또 다른 종류의 음악 전문가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바로 '뮤직 슈퍼바이저(Music Supervisor)'입니다.
그들은 곡을 쓰지 않습니다. 대신,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수억 곡의 음악 라이브러리 속에서, 대본의 특정 장면에 딱 들어맞는 단 하나의 곡을 찾아냅니다. 이들은 방대한 음악적 지식은 물론, 저작권 해결을 위한 법적 지식, 그리고 감독의 추상적인 의도를 구체적인 트랙으로 번역해 내는 감각을 갖춰야 합니다.
과거에 '선곡'은 작곡된 스코어의 빈자리를 채우는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어떤 기존 곡을 어디에 배치하느냐가 영화의 톤 앤 매너를 결정하고, 심지어 캐릭터의 성격과 스토리의 방향성까지 좌우합니다. 이 '편집'과 '재배치'의 미학을 가장 극적으로 증명한 사례가 바로 마블의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Guardians of the Galaxy)>입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최첨단 우주선과 외계인이 등장하는 SF 블록버스터입니다. 상식 적으로라면, 이곳에는 미래지향적이고 기계적인 전자음악이나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어울릴 것입니다. 하지만 제임스 건 감독(그는 이 영화의 실질적인 뮤직 슈퍼바이저 역할을 겸했습니다)은 정반대의 선택을 합니다. 1970년대의 촌스러운 팝송과 소울 음악을 우주 한복판에 쏟아부은 것입니다.
영화의 오프닝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황량하고 어두운 외계 행성의 동굴. 주인공 스타로드(피터 퀼)가 등장합니다.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 그는 헬멧의 버튼을 누르고 낡은 워크맨을 켭니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노래는 레드본(Redbone)의 'Come and Get Your Love'.
이 경쾌하고 펑키한 70년대 팝송이 흐르는 순간, 영화의 장르는 순식간에 바뀝니다. 어둡고 무거운 SF 스릴러가 될 뻔했던 영화는, 순식간에 유쾌하고 낭만적인 우주 활극으로 변모합니다. 관객은 이 뜬금없는 선곡을 통해 주인공 스타로드가 영웅이라기보다는 좀 모자라지만 흥이 넘치는, 우리 주변의 친구 같은 존재임을 단박에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뮤직 슈퍼바이저가 하는 일, 즉 '맥락의 재창조(Re-contextualization)'입니다. 40년 전의 유행가였던 노래는 2014년의 우주라는 낯선 맥락에 놓이면서, 원곡이 가진 의미를 넘어 '고향(지구)에 대한 그리움'과 '낙천적인 캐릭터성'을 상징하는 새로운 예술적 장치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 영화에서 음악이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음악이 관객에게만 들리는 배경음악(Non-diegetic sound)이 아니라, 영화 속 인물들이 실제로 듣고 있는 '다이제틱 뮤직(Diegetic Music, 내재 음향)'이라는 점입니다.
주인공 피터 퀼에게 어머니가 물려준 유일한 유품인 '끝내주는 노래 모음집 1탄(Awesome Mix Vol. 1)' 카세트테이프. 이 테이프는 단순한 소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연결 고리이자, 지구인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험한 우주 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정신적 안식처입니다.
뮤직 슈퍼바이저는 이 '카세트테이프'라는 설정을 통해 음악에 강력한 '서사적 기능'을 부여합니다.
전투 중에 음악이 끊기면 관객도 함께 탄식합니다.
악당이 워크맨을 부수려 할 때 우리는 주인공의 분노에 100% 공감합니다. 음악이 단순히 분위기를 잡는 BGM이 아니라, 주인공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보물'이자 이야기의 핵심 소재가 된 것입니다. 선곡된 트랙 하나하나(예: 'Ain't No Mountain High Enough')는 어머니가 아들에게 전하는 편지처럼 기능하며,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합니다. 이는 선곡이 작곡만큼이나,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강력한 스토리텔링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음악이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는 스트리밍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음악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수많은 음악 중에서 문맥에 맞는 것을 '골라내는' 능력이 중요해졌습니다.
뮤직 슈퍼바이저는 이 시대의 새로운 창작자입니다. 그들은 영상의 리듬, 배우의 연기 톤, 장면의 색감, 그리고 저작권료라는 현실적인 예산의 제약까지 고려하여 최적의 퍼즐 조각을 찾아냅니다.
타란티노 감독이 잊힌 60년대 서프 뮤직을 발굴해 <펄프 픽션>을 스타일리시한 느와르로 완성했듯,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70년대 올드 팝을 통해 차가운 우주에 따뜻한 인간미를 불어넣었듯, 훌륭한 선곡은 죽어있던 장면을 살려내고 평범한 이야기에 비범한 색채를 입힙니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만큼이나 "무엇을 가져와 어디에 놓을 것인가"가 중요한 시대. 뮤직 슈퍼바이저의 작업은 우리에게 '편집'과 '배치'가 곧 '창조'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당신의 플레이리스트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나요? 그 선곡 하나하나가, 어쩌면 당신이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사운드트랙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