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어떻게 작동하고 흘러가는 걸까
많은 성서들은 이 모든 것이 신의 의지라 하고, 어떤 과학자들은 이 모든 것이 빅뱅을 비롯한 철저한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신과 우연 사이 인간의 의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성서와 빅뱅이론은 잠시 제쳐두고 나비효과를 살펴보자
나비 효과
나비 효과를 언급하면서 영화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가 있나 싶다. 내 또래들 그리고 그 아래 세대에 속한 이들 중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은 그리 많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비 효과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물론 영화가 탄생하기 전에 개념이 먼저 등장했겠지만 영화의 흥행 덕에 이 개념이 영화 이상의 더 큰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는 것 만은 확실하다.
비슷한 예시는 매트릭스에도 있다. 어린 페미니스트들은 '빨간약'이 어디서 나온 관용구인지는 몰라도, 빨간약을 꿀떡 삼키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는다. 매트릭스와 나비효과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 둘은 영화라는 하나의 요소로 기능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영화 속 두 세계는 압축되고 변형되어 관용구가 혹은 프로파간다가 되었다.
세상의 작동방식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성서와 빅뱅이론은 하나의 세계관이다. 이 글에서 나비효과를 살펴보고자 하는 방식도 세계관의 맥락이다.
앞서 언급한 관용구로서의 나비효과는, 나비의 날갯짓과 같은 아주 작은 행동의 결과가 허리케인을 불러올지도 모르니 매사에 주의해야만 한다는 내용이지만,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건 사실, 나비의 날갯짓이 "어떻게" 허리케인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것 인가이다. 세계관이란 개념 자체가 이러한 "어떻게"를 정의하거나, 받아들이는 개인의 방식일테니까
스카이 캐슬
2019년 1월 지금, 한국의 키워드는 단연 스카이 캐슬이다. 이 드라마는 왜 이렇게 엄청난 인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 "어떻게" 이렇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먼저 이 인기라는 것을 측정해보자. 인기라는 것은 개념이지 수치화된 결과라 보기에는 어렵다. 하지만 트위터에서 스카이 캐슬 관련 단어가 언급되는 횟수는 수치화할 수 있는 y1이라고 할 만하다. 스카이 캐슬의 유행어나 등장인물을 활용한 유의미한 광고들의 개수도 y2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yn들의 중요도는 모두 다르다. 다행히 한국의 의무교육을 통해 우리는 이를 조정하는 방법을 배웠다. 하나의 트윗이 가지는 중요도가 tv광고의 중요도 혹은 파급력에 비해 1/100이라 치면, 스카이 캐슬이라는 어떤 드라마의 인기를 보여주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f(x1, x2, ... , xn) = y1 + 100y2 +...
이제는 x, 인풋을 살펴보자. 자극적 소재, 출생의 비밀, 캐릭터의 매력,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매력, 시청자들의 드라마에 대한 접근성
이 모든 것들 그리고 수 많은 것들이 이 공식의 인풋이다. 그리고 이 모든 x들 역시 개별의 중요도를 가지고 있고, 중요도들 역시 수 많은 x들에 의해 정의된다. 예를 들어 이 공식이, 스카이 캐슬이 아니라 지상파에서 하는 일일 연속극이라면 시나리오라는 x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제일 중요한 것은 기본 전제인 황금시간대의 사수 여부일 것이고, 핵가족화, 미디어 다양화등으로 인한 tv 매체에 대한 이탈률, 코드 커팅 트렌드 역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쯤되면 알아차려야한다.
이러한 사회 현상을 절대 한 줄이 될 수 없는 한 줄의 공식으로 정리하려고 하면 할 수록, 더 비과학적이 된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불행한 사람들은 이 공식을 알아내려고 머리를 굴려야한다.
기획자라는 어떤 불쌍한 부류의 인간들은 자신이 기획할 상품의 f(xn)의 값을 최대화하기 위해, 되든 안되든 스카이 캐슬의 공식이 시사하는 몇가지 주요요소라도 잡아채야하는 것이다.
다시 나비효과
영화는 우리에게, 나비의 날갯짓에서 출발하여 태풍이 유발되는 과정을 매우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현실 세계 속에서 우리는 이 도식을 확인 할 수 없다. x1이 y1으로 연결되는 f(x) 속에는, 나비의 날갯짓 외에도 너무나도 많은 x들과 상수, 단서 들이 존재한다. 또한 도출된 y1조차 이 세상의 종말이 아니며, 이들은 또 다시 수많은 z들의 구성요소 혹은 단서로 작용한다. 인간의 두뇌로는 이 것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역사 동안 인류는 이 세계의 작동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지금의 문명은 이 노력들이 이뤄낸 몇가지 법칙들에 기반한 것이다. 이러한 법칙들은 수 없이 많은 연역법, 귀납법을 통해 구축되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백조들을 확인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관념일 뿐이다. 검은 백조는 우리 시야 밖 어딘가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 백조에 대한 구분은 언제까지나 이미 확인한 백조 / 그리고 확인되지 않은 백조일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살다보면 무언가 큰 그림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결국엔 어떤 원리가 존재한다는 느낌
그래서 누군가는 그것을 신의 의지라 하고, 러브 크래프트는 상관 없다한다 어차피 우리는 크툴루의 자비 하에 살고 있으니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들
세계가 작동하는 어떠한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이다. 물론 이 원리를 어떻게 정의하는 가에는 국가마다, 문화마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큰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공통 법칙이다. 앞서 나는 이 원리를 x와 y의 방법으로 정의하려고 애를 썼다. 이러한 공식은 미드 굿플레이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세계관은 다음과 같다.
1. 우리가 살면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들에 의해 + 혹은 -로 수치화 되어 있다.
2. 당신이 사후 천국인 굿플레이스에 갈지, 아니면 연옥인 배드 플레이스에 갈지는 당신이 살아 생전 행한 모든 행위가 도출한 합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의 삶을 정의하는 이 공식은 사실, 모든 구성요소 들이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으로만 나뉘고, 다른 복잡한 연산없이 덧셈만으로 이루어지는 단순한 과정이라는 점에서, 앞서 드라마의 인기를 극대화하려는 공식보다 더 설득력을 가진다.
굿플레이스의 공식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정의하는 대부분의 공식은 어떠한 상업적 목적을 가진 공식보다 더 큰 설득력을 가진다. 당신이 기획한 물건의 성공 여부는 비교적 짧은 사이클 안에 확인 할 수 있겠지만, 전자의 경우 당신이 인생을 다 살아보기 전까지는 그게 맞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가 기획한 그 무언가가 망하던 말던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내 인생이 불행하다면, 제품의 성공이 내 인생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내 반쪽을 찾지 못해 평생 외롭게 늙어죽거나 도화살이 끼어 파리같은 이성만이 평생 꼬여 고통받는다면 말이다.
인간사를 설명하는 많은 방법 중에서도 베스트 셀링 아이템인, 주역과 사주팔자 역시 하나의 학문이고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은 수치화대신, 조화와 어그러짐을 택했다. 세상의 모든 구성요소들을 물, 불, 흙, 금, 나무로 치환해 그 요소들 간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다. 당신의 기본적 성질이 불 같다면, 그 불을 꺼줄 담담한 흙이 필요하다. 사주팔자의 흐름을 무시하고 마른 장작과 같은 겨울의 나무와 사랑에 빠진다면 당신의 화 혹은 홧병은 더욱 불타오를 뿐이다. 사주팔자의 세계에서는 사람간의 궁합말고도 음식, 나라, 업계 이 모든 것들이 오행의 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이 설명 가능하다.
물론 당신의 성질이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으로 결정된다는 점은 사실 믿기 어려운 점이긴 하다. 하지만 사주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사주를 통해 당신 인생의 큰 골격, 그 보다 작은 시간들 동안의 운의 흐름, 당신과 당신옆의 누군가와의 궁합을 모두 확인해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은 당신의 몫이라는 점이다.
다행히도 당신은 여전히 마른 장작과 남은 평생을 함께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나를 비롯한 동서양의 수많은 사람들이 믿는대로 세상에는, 그리고 당신의 인생에는, 어떠한 큰 원리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원리는 확인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복잡하거나, 인간을 초월한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운영되어 드라마의 파급력을 최대화하는 문제처럼 인풋, 아웃풋을 조정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드라마의 파급력은 조정할 수 있다. 혹은 조정하려고 노력이라도 할 수 있다.
자기의지의 존재는 이러한 세계관 아래에서, 단순한 회의적 운명론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는 한줄기 희망이다. 당신이 태어난 시각 때문에 당신의 죽고 못살 연인과의 불행한 결말이 이미 정해져 버렸을 수도 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드라마를 성공시킬 수 있다. 결말이 비참할지언 지금의 로맨스가 찬란할 수 있는 선택을 한다면 누가 당신을 말릴 수 있는가. 일단 당신이 그러기로 한다면 말이다.
우리 모두가 세계라는 큰 함수 속에 존재하는, xn, yn 아무개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사람을 꽤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게다가 나비효과가 매트릭스가 처음엔 영화로 세상에 입력되었지만,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게 된 것과 같이, 당신이 혹은 당신이 산출한 또다른 인풋이 원하는 대로 작용하지 않을 수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의 톱니바퀴속에서도 능동적인 구성요소가 되기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이 세계를 살아가는 것에 대한 큰 위안이다. (그냥 내가 ESTJ 부역자라서 이런 생각에도 위안이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대전제를 부정해보자
지금까지의 내용은 세상이 작동하는 어떠한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장 큰 전재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제를 부정해보자. 세계에 법칙 따위는 없고 모든 것은 우연에 불과할 수도 있다. 우연의 일치로 빅뱅이 일어나고, 우연의 일치로 우리의 부모가 만나 모두가 수정된 것처럼 아무 이유없이 그냥 1초 후는 없을 수도 있다. 귀납법에 의해 이 1초 이후에는 다음 1초가 존재한다고 믿어왔지만, 우리의 모든 시간들도 백조들처럼 경험한 시간과 아직 경험하지 못한 시간으로 나뉜다.
게다가 '어떠한 거대 원리가 존재한다는 그 느낌 자체'는 모든 것이 우연으로 일어날 뿐인 이 세계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만 하는 지성체의 몸부림에 불과할 수 도 있다. 거대 원리를 믿는 사람들은 단지 삶의 주체성을 확보하고 싶을 뿐일 수도 있다. 삶의 목적을 알고 싶기 때문에, 아니면 적어도 그러한 목적이 존재라도 한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기 때문에 그러한 '느낌'을 상상해냈을 뿐이라면? 목적이 없는 인생은 샬레 위의 미토콘드리아와 다를바 없다. 자기 의지가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인생에 목적이 없다면, 내가 착하게 살아 무엇하는가 저 나쁜놈도 천국에 간다면
그래서 우리는 단지 미치지 않기 위해, 자기 의지로 거대원리가 존재한다고 믿기로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대전제를 부정하더라도 자기의지는 여전히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위안이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기의지 역시 거대원리와 같이 존재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개념이다.
누가 아는가. 자기의지라는 것 역시 애초에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는 차원 이상의 존재가 단지 넷플릭스 좀 재밌게 보겠다고 내 행동을 제한하고 있을지도 밴더스내치 세계관 안에서는 데카르트도 자살하는 수 밖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