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수 Feb 13. 2019

쿨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자의식 과잉 예방하고 건강한 삶 되찾기, 과연 가능한가

우리는 언젠가, 언제 된 건지 혹은 언제 될 것인지 알 수 없는 ‘어른’이 된다. 그리고 한번 어른이 되어버리고 나면, 그 품위를 어느정도는 유지해줘야만 할 것만 같다. 하지만 도대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고 어른스러움은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


대부분의 경우, 사람은 가족이라는 아주 작고 친밀한 집단에서 잉태되어 서서히 자신 주변으로 세계를 넓혀간다. 그리고 이 세계가 결국에는 재화를 창출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사람들은 그를 사회인이라고 부르고, 이 개념은 종종 어른과 혼동된다. 이 과정에서 세계는 한 인간에게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 그 자극은 반응을 불러낸다. 하지만 사회화라고 하는 이 자극과 반응의 연속적 과정 속에서 개인은 꽤 지치곤 한다.


우효의 '소녀감성' 앨범 커버

가수 우효는, 소녀의 가장 큰 특성을 ‘아직 지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꼽았다.


이 말을 반대로 돌려보면, 모든 어른은 아니더라도 많은 어른들이 이미 지쳐버렸다는 것이다.


신나서 시도한 무엇인가가 좌절될 때 사람은 한 풀 두 풀 꺾인다. 그러다보면 모난 돌이 정도 맞고, 50이 되어 귀도 꺾이며 어른이 되고, 또 결국에는 지쳐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지난 날의 나는 끊이지도 않고 항상 무언가에 열띠어 있었다. 하지만, 항상 신나기만 한 사람은 사실 남들에게 달가운 존재라고는 할 수 없다.


넷플릭스를 통해 새 생명을 얻은 초록지붕의 앤을 보자. 그녀는 절망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그녀의 상상력을 거름삼아 자신의 기쁨을 뿜어내는 아이다. 그러나 그녀 주변이 좋은 사람들로 둘러싸이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매일 보는 호수 마저도 환희로 포장하는 그녀의 에너지는, 그녀를 자세히 보아 예쁘게 봐줄 사람들 덕분에 더 좋은 방향으로 발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초록지붕의 행운을 얻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항상 현실성 없는 이야기만 하는 세상물정 모르는 짜증나는 아줌마가 되지는 않았을까


앤은 특이한 아이이긴 하다. 그녀는 상상력도 평균 이상이라 서술되고, 그녀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사회적 기대 들에도 굴하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 하지만 앤이 정말 유별나게 유별난 아이인가. 주위를 둘러보라 당신이 노키즈존에서 이것을 읽고 있는게 아니라면, 당신 곁에는 ADHD를 가진(, 아니면 그냥 아이라서 산만할 뿐인) 수 많은 아이들이 있다. 설령 당신이 지금 노키즈존이라고 해도, 그 곳에 가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은가


많은 약들과 병들이 성인 남성에 맞추어 연구, 개발되듯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폭력적이고 산만하여 말썽을 일으키는 등의 ADHD의 징후는 남아 위주의 관찰결과라는 것이 최근의 주된 이해이다. 여아의 경우, 남아와 마찬가지로 주의력이 결핍된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발현되는 방식은 다르다. 여아의 ADHD는, 남아가 소리를 지르며 친구를 때리는 동안, 보호자의 지도에 집중하지 못하고 멍하게 있거나, 오히려 자신만의 세계에 더 깊게 빠져드는 방식으로 발현된다고 한다. 어떤 아이의 ADHD는 과잉행동이 아닌, 소심한 성격이나 학습부진의 형태로 발현되는 것이다.



또 다시, 여러 번 모두가 토론해온 그 주제로의 회귀이다. 사람의 성격은 (비만은, 정신병은…) 타고나는 것인지 혹은 사회에서 교육되는 것인지. 하지만 여아라고 해서, 내재된 에너지가 더 적겠는가. 누가 그 힘찬 여아들을 내면의 세계로 몰아낸 것인지는 생각해볼 만한 주제이다.

ADHD는 사실 극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지만, 자신만의 세계와 이야기가 넘치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마찬가지다.



말 수 적은 사람들의 입을 열지 않는 이유 중에는 남이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걱정이 있다고 한다. 이 사실은 떠벌이인 나에게 꽤 큰 충격이었는데, 당시까지의 나는 단 한번도 내이야기가 흥미 없게 들릴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해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스무 몇 살이 될 때까지도 왜 내가 논술로 대학을 못 갔는지 진심으로 궁금해했었다. 이유는 빤하지 않은가. 눈 앞에 사람이 있는데도 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는 애가, 저 멀리 논술 용지 뒤에 있는 심사위원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는 했겠는가. 지금 이 괄호 안에 있는 내용 마저도 TMI라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사실 떠벌이들의 문제는 단지 말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예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앞서도 말했듯, 그들이 청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자를 고려한다는 것은 기준을 나에게서, 나 밖의 무엇인가로 옮겨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대화 예절을 차치하고서라도 어른이 되는 것에 있어서 큰 관문 중의 하나이다.



나의 사춘기는 남들이 나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드디어 깨닫고,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에 대한 집착을 벗어 던지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은 자존감을 성립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지만, 나는 남들의 시각을 저버린 나머지, 내가 좋아하는 내 얘기만 하는 모지란 인간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사실은, 차마 입을 닫지 못해, 상대가 좋아할 만한 주제들에 대해서 까지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씨부려왔던 흑역사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 사회는 자꾸 젊은이들에게 Speak Up하라고 이야기하지만, 말해야 할 때 중요한 말을 하는 쿨하고 멋진 인간이 되는 것과 입을 언제 닫을지 모르는 짜증나는 인간이 되는 것은 천지 차이이다. 당신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하여 천지분간 못하고 떠벌댄다면 준거집단에서 쫓겨나는 정도에서 끝나겠지만, 나이 권력을 쟁취한 당신이 청자를 고려하지 않고 Speak Up한다면, 어떤 인간이 될 지는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그럼 대체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 가. 나 같이 말 못하면 죽는 병 걸린 사람도 문제고, 말 못해서 답답한 사람들도 나름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단 입을 열고, 말고를 떠나서도 어떻게 하면 끊임없는 사회와 상호작용의 과정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또 쿨 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이 상호작용들이 단지 외부의 눈치를, 내부의 내가 보는 것이라면 인생은 너무 우울한 일이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 좋다고 느낄 때는 바로 내가 있고 싶은 곳에 있을 때이다. 더 이상 가정에, 학교에 존재하지 않고, 내가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과 하고 싶은 일을 해볼 때 나이 먹은 기쁨을 느낀다. 배정받은 중학교에서 맞지도 않는 또래집단에 끼어보려고 눈치보는 대신에, 서로 참아줄 수 있는 장단점의 밸런스를 가진 친구들과 어울릴 때, 관심있는 행사에 참여해서 공통의 방향성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어른이 되어서 참 좋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사회에 자의식이 깎여나가기도 하지만, 자신 주변의 세계를 조정할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된다. 밥 먹고 자다 보니 나이를 먹어가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런 기회를 얻기도 하고, 능동적으로 떼돈을 벌어 럭셔리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할 수도 있다. 아니면 단지 순전한 우연과 운으로 인해 그런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마치 당신 옆의 좋은 사람들을 수 많은 우연을 거쳐 만나게 되었듯이 말이다. 운이 없었다면? 그냥 바꿔보면 될 일이다. 어차피 상호작용은 당신이 눈 감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자의식이 외부세계에 한 방을 먹이는 역사적인 순간을 기대해보자


작가의 이전글 미토콘드리아의 열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