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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수 Mar 25. 2019

당신은 생물학적 페미니스트인가요?

트랜스 통조림이 되고 싶은 너에게


현재의 대한민국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 페미니즘


이 물결의 본격적 확산을 2015 대 메갈 시대 부터로 잡는다면, 이 흐름도 벌써 4년 째를 맞이 하였다. 메갈리아의 등장은, 수천 년간 이어진 유구한 여혐의 역사는 제외하고서라도,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인터넷 문화가 빠르게 정착된 나라로서, 넷상에서 여성들을 끊임없이 타자화하고, 매도해 온 역사에 대한 첫 반향이라고 볼 수 있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서양의 건강한 페미니즘,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다. 페미니즘이 아닌 젠더 이퀄 리즘을 추구한다.


 사실 안티 페미들의 반응은 수많은 과거들의 그것들과 큰 차이가 없다. 우리의 앞선 길에 있던 선배들에게 가해졌던 꼴페미라는 싸잡기, 죠리퐁, 테트리스 등 여성부에 대한 수많은 주작들

 지금의 조롱들과 별 차이가 없는 이 유구한 역사 덕분에, 이미 너무나도 진부해져 버린 오늘날의 조롱들은 지금시대의 메갈들에게 조그마한 타격조차 주지 못한다.



당신 정말 행정부에서 이를 수용한다고 믿었나요? 저는 어느정도 믿었습니다.





 과거와 달라진 것은, 안티 페미가 아닌 페미니즘 내부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수많은 새 세대의 여성들에서 기인한다. 얼마 전, 나보다 열몇 살 정도 많은 여성 활동가들을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본 그들은, 누구보다 현장에서 뛰었던 페미니스트였지만, 그들은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는 것에 상당한 주저함을 보였다. 페미니스트라는 자칭에서 오는 책임감과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이러한 주저함은 지금 세대의 젊은 세대들 역시 느끼고 있는 바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20대 여성의 2분의 1 정도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이 고뇌의 경중에 대해 세대 간에 비교를 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의 20대 여성들 역시 탈코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 가부장제의 모순 앞에서 작아지는 자기 자신들을 매일 목격하며 자기 안의, 그리고 자기 밖의 여혐 문화와 투쟁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자칭 페미니스트들의 증가는 많은 이들에게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기정체화가 이러한 고뇌보다 앞서 있음을 보여주는 한 지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이들은 ‘여성문제에 관심 있는 본인’이라는 시대의 부름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젊은 여성들의 의식화에 성공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늘어난 페미니스트들의 숫자만큼 페미니즘 내부의 논의도 증가했다. 늘어난 논의는 늘어난 갈래와 이에 따른 다양한 활동들로 나타난다. 어떤 갈래는 박근혜 복권운동에 참여하며 예상치 못한 세대간 통합을 이끌어내기까지 한다.



 앞서 말했듯, 과거의 여성문제 활동가들은 자신을 페미니스트 하나로 정체화하지 않았다.(적어도 내가 만난 서람들은) 그들은 미투 운동 지원자이자 녹색당원이고, 퀴어 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였다. 그러나 내가 목격한 젊은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한 경향은 그 어떤 문제보다도 여성문제를 최우선으로 놓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문제들은 오랜 시간 해일 속의 조개 취급을 당해왔다. 조선과 고려로 돌아가지 않아도,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시민운동이었던 촛불 정국에서도 곳곳에서 터져 나온 여성문제들은 나중에, 나중에라며 미뤄지곤 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고, 물러설 수 없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여성문제는 왜 물러설 수 없는가? 그것은 인간의 권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성의 인권 문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구조화된 차별의 형태로서 오랫동안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마르크스는 근대의 세계관 속에서

'견고한 것은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신성한 것은 전부 세속화되며, 인간은 마침내 자기 삶의 실제 조건과 인간관계를 냉정히 직시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말 인간은 자본주의와 기술의 발전 속에서 자기 삶의 실제 조건과 인간 관계를 직시하는가?

 이 문장에서 우리는 권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다. 자본주의는 봉건사회의 신과 제도를 녹여버린 용매제였지만, 역으로 여전히 실재하는 봉건적 사고와 제도를 보이지 않게 만들고, 평등한 사회라는 허상을 만들었다. 이러한 허상은 그 제도와 권력을 강화하고, 숨겨주는 무기이며, 권력을 잡은 자들은 이 무기를 휘둘러 결코 ‘자기 삶의 실제 조건과 사회를 냉정히 직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많은 남성과 여성들은 평등한 사회라는 허울 좋은 토대 아래 여성에 대한 혐오를 비롯한 수많은 혐오의 존재를 부정하고, 괄시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권력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혼란스러운 자본주의 아래의 사회는 잠시 뒤로하고, 그 안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정체화하는가? 우리는 우리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다. 그렇다면 나의 정체성은 페미니스트로 제한되는가? 나는 여성이고, 20대이고 정상가족의 일원이고, 대학생이며, 유권자이고, 한국인이고, 지구인이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다양한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교차성 이론'의 가장 기본 골자이다. 이 수많은 정체성 중에서, 나는 소수자이기도 권력자 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내가 권력자가 되고 싶다고, 소수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 하나의 정체성만을 택할 수 있는가? 당신들의 불행 배틀에서 영원한 승리자란 없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어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가? 아니면 적어도 당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아니면 당신이 당신 부모의 자식이라는 사실은 어찌 확신하는가? 등본을 떼어 본다고? 그 등본이 기계가 구성한 매트릭스 속의 거짓 현실이 아니라는 것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대학에서 철학 교양 좀 들었다 싶은 사람들은, 이쯤 되면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다들 눈치챘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통조림 속에서 전기자극을 받고 있는 뇌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당신의 현실 중에서 당신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뿐이다.



cor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당신은 당신이 생물학적 여성기를 가졌다는 것을 확신하는가? 생물학이라는 신화에는 어떻게 그렇게 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성이라는, 혹은 남성이라는 자신의 자아 정체감은 왜 그렇게 괄시하는가?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 전부인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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