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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수 Dec 26. 2022

기싸움일까. 훈육일까.

감정의 민낯을 드러낸 엄마

안방 침대에서 벽 쪽으로 돌아누운 엄마와 침대 아래에서 그런 엄마를 바라보며 멋쩍지만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엄마에게 말을 거는 아이, 불과 1분 전까지 하하 호호 웃으며 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차가운 공기가 방 안 가득 요한 적막이 깔렸다.

"엄마~ 나 기저귀도 갈아야 한단 말이야." 당시 밤에는 기저귀를 하고 자던 시기라 아이는 엄마가 해줘야 하는, 해줄 수밖에 없는 일을 핑계 삼아 엄마가 자기를 보게끔 하려고 노력했다.

"네가 혼자 알아서 해!"

"내가 어떻게 혼자 해.."

"어휴...!" 덮고 있던 이불을 휙 재끼며 기저귀를 가지러 가는 동안에도 이 훈육을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마음은 여전했다.




우리 집 안방에 침대 왼쪽에 벽걸이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다. 더운 여름철마다 열대야를 경험하지 않게 해주는 소중한 물건이다. 기본적으로 어른보다 열이 많은 아이는 에어컨을 좀 오래 켜놓아도 추워하지 않지만 점점 더위보다 추위를 많이 타는 뼈가 시린 엄마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닭살까지 오르게 하는 냉기에 굴복하곤 이불을 턱 밑까지 올려 덮는다. 심지어 무풍으로 해놓아서 바람을 직접적으로 쐬지 않는데도 "이제 잠시 끌까?"라고 먼저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나다. 하지만 에어컨을 켜거나 끄는 건 늘 아이 담당이었다. 어른이 보기엔 별 거 아닌, 그저 리모컨으로 전원 버튼 누르고 무풍 설정 버튼 하나 누르는 것일 뿐인데 아이에겐 재미있는 놀이다. 어쩌다가 아무 생각 없이 엄마가 먼저 눌러버리기라고 하면 그렇게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면서 시무룩해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날도 이제 그만 끌까? 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는 "내가, 내가, 희망이가 끌 거야."라며 부리나케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아이가 리모컨을 잡기에 앞서, "희망아, 끄는 버튼 한 번 누르면 에어컨이 자동으로 청소되는 시간 지나서 저절로 꺼지는 거니까 두 번 누르면 안 되고 딱 한 번만 누르는 거야. 알았지?"


에어컨 자동건조 중에 흘러나오는 바람이 싫다며 제대로 꺼진 게 아니라며 건조가 마무리되기 전에 꺼버렸던 적이 많았던지라 미리 아이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를 해주었다. 몇 번 건조를 시키지 않았더니 에어컨에서 물 냄새가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밝은 목소리로 잘 알았다며, "응!"이라고 경쾌한 끄덕임과 함께 대답해 주었다. 안심하고 편하게 침대에 다시 등을 대고 눕는 순간, 아이는 아까와 같이 밝은 표정으로 전원버튼을 연달아 두 번 눌렀고 에어컨은 가차 없이 꺼졌다. 마치 자동건조 기능이 설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착각할 만큼 찰나였다. 엄마 말을 마치 못 들었다는 듯이 해맑게 에어컨을 꺼버린 아이의 행동에 순간 화가 났다.




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못 내는 건지 안 내는 건지 애매하지만 분명한 것은 화를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화가 날 때는 불 같이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같이 폭발하기보다는 얼음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은 별로 하지 않는다. 할 말이 있을 때는 흥분하기보다는 조용히 얘기하는 편이다. 몇 십년지기 친구들도 나의 화난 모습을 별로 기억하지 못하고 내가 화가 났을 때는 진짜 화난 거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는 이런 규칙도 패턴도 없이 상황에 따라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기본적으로 아이에게도 화를 내기보다는 잘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하려는 편이고 아이가 떼를 부릴 때도 그 상황을 그때그때 잘 넘어가곤 했지만,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질 때가 있고 스스로 이렇게 복식호흡으로 발성을 하던 사람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런 모습이 아이에게도 낯설게 보이는지 아이도 엄마가 진짜로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마치 장난스러운 표정과 애교로 엄마 품에 쏙 안기면 금방 풀어질 걸 아는 것처럼.


하지만 이 날은 유난히 피곤했던 탓인지, 매번 잠들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힘들었는지, 큰 목소리를 낼 기운도 없었는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말 한마디만 하고 그냥 돌아누워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는 "엄마~ 희망이 봐요~ 응? 나 기저귀도 갈아야 한단 말이야."라고 말하며 엄마가 화난 척하는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기저귀를 가지러 가는 동안에도 '아니 불과 몇 초 전에 알았다고 해놓고 냅다 끄는 건 뭐지? 엄마가 하는 말이 그냥 다 장난같이 느껴지는 건가? 그동안 너무 좋게만 얘기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무슨 생각으로 아이가 그냥 에어컨을 꺼버렸는지 궁금했다.


"얼른 이리로 와. 기저귀 간다며." 무미건조한 말투로 아이를 불렀고 아이는 엄마의 부름에 엷은 미소를 띤 채 다가왔다. 아직도 내 표정은 시베리아 벌판 같았고 아이도 그걸 눈치챘는지 한번 더 애교를 부리며 안기려고 했다. "아니야." 하며 안아주지 않고 팔길이 정도의 거리를 두고 아이를 세워둔 채 기저귀를 갈아주고 물었다.

"엄마가 버튼 한 번만 누르라고 한 거 들었지?"

"응.."

"희망이가 알았다고 했지?"

"응."

"그런데 왜 바로 꺼버렸어?"

아이는 굳은 표정으로 안아주지 않는 엄마를 보며 우물쭈물 대답을 망설였다. '그냥 됐다.'는 마음으로 잠이나 자야지 하던 때 아이는 울먹이며, "에어컨 조명이 눈 부셔서 그랬어.."라고 말했다. 자동건조 중에는 스템이 아직 작동 중이라 조명이 나오는 부분이 있다. 벽걸이 위치 상 아이가 충분히 눈이 부실 수 있었고 사실 그때는 더 이상 진짜로 눈이 부신 게 싫어선 끈 건지 아니면 단순히 장난치고 싶어서 껐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는 울음을 애써 참으려 했지만 터져 나오는 눈물은 어쩔 도리가 없었고 엄마가 또 안아주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도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 표정과 모습을 보는 순간, 지금 내가 하는 것이 과연 훈육일까? 기싸움일까? 의문이 들었고 이게 이렇게 정색하고 단호하게 할 일인가 싶었다.




눈이 부셔서 싫었을 때는 엄마에게 미리 말해주고 같이 눈이 부시지 않게 할 방법을 찾는 거라고 알려주고 더 이상 상황을 끌지 않았다. 품에 폭 안고는 울음이 멈출 때까지 토닥여주었다. 다시 침대로 가서 나란히 누워 나눈 대화를 나누면서, 길지 않았지만 아이에게는 충분히 불안했을 시간 동안 아이는 엄마가 앞으로 자기랑 놀아주지 않으면 어떡할까, 엄마가 계속 나를 안 쳐다보고 안아주지 않으면 어떡할까 하는 걱정 속에서 무서웠고 슬펐던 것을 알았다.


좀 더 훈육을 전문가스럽게 마무리해야 할 수도 있었다. 아이와의 기싸움에서 엄마가 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이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도 화를 잘 내지 않으면서, 자신의 세상에서 엄마가 너무나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아이에게 훈육을 핑계로 화를 내버렸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잘 타이를 수도 있었던 일을 어쩌면 단순하게 내가 피곤해서 아이의 장난을 받아주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하며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이후에도 아이는 자동건조 시간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참아주었다. 왜 그 시간이 필요한지 반복해서 이야기해주었고 아이 나름대로 이해를 한 듯 보였다. 육아란 답도 없고 지름길도 없고 족보도 없다. 여러 육아서를 읽어봐도 내 아이에게 모든 것이 다 들어맞지는 않는다. 아이의 고유한 기질과 성향, 그리고 엄마의 기질과 성향에 맞는 상호작용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정말 치약을 뒤에서부터 차곡차곡 짜느냐 아니면 편한 대로 중간을 누르느냐로 여러 부부들이 말다툼을 한다는 것처럼 에어컨 버튼이 뭐라고 또 육아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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