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2월에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다가올 날들을 향한 설렘이 교차하곤 한다. 결혼 전, 아니 출산 전까지만 하더라도 12월 달력에는 늘 여러 송년회 모임 약속이 적혀 있었고 적어둔 글씨체만 봐도 설렘과 들썩거림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기를 낳고 나서부터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말 모임은 사치스러운 일이 되었고 엄마 껌딱지인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별로 나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만일 내가 출산 후에도 변함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필수적이었다면 육아와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회사와 집만을 오가는 일상에 점점 무기력해졌을 테니 말이다.
20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MBTI의 결과는 늘 E로 시작했고 스스로 외향형이라고 여기며 지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20대 후반에서 30대로 넘어가면서부터 그 결과는 늘 내가 I형 타입의 인간임을 알려주었다. 이상했다. 특별히 낯가림도 없고 모임에서처음 보는 사이여도 먼저 말을 걸며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기도 하고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는 더더구나 조잘조잘 말도 많고 어린애처럼 까르르르 웃기도 잘 웃는 사람인데 I형이라니 테스트의 신빙성에 의문을 가질 법도 했다. 심지어 팀 내 야유회 장기자랑에서 상금도 받아본 사람인데 말이다.
그런데 문득 사람들과 신나게 어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의 내 모습을 돌아보니 기운이 빠진 채 축 쳐져 있을 때가 많았고 하루 이틀은 집에서 꼼짝 않고 집순이가 되곤 했었다. 그래야 다시 에너지가 생겼고 기분이 좋아졌고 편안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불현듯 어린 시절의 하루도 함께 스쳐 지나갔다. 초등학교 때였을까?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선 엄마에게 몸이 아프다고 했다. 그날 저녁부터 열감기몸살이 시작되었다. 엄마는 밖에서 놀 때는 신나서 방방 뛰놀다가 집에 오면 에너지가 폭 가라앉는다며 속상해하셨다.
I형과 E형은 단순히 내성적이냐 아니냐의 여부로 구분 지어지는 게 아니라 개인이 에너지를 충전하고 회복하는 방식과 방향에 차이가 난다고 한다.I형인 내향형 사람들은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충전하고 내면을 돌보면서 소진된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건 뭐 딱 나를 묘사하는 말이다.
대학생 시절과 20대 중반까지는 체력이 제일 좋을 시기이니 나를 들여다보기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고 다들 활동적으로 지내니 더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회사에서도 서비스와 세일즈라는 업무 특성상 낯선 사람에게도 친근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다가가야 했고 늘 손님이 불편해하지 않게 신경 쓰며 외향적으로 행동해야 했다. 그런 옷을 자꾸 입다 보니 그 모습이 나인 양 알고 지내게 되었다. 퇴근과 동시에 발바닥이 땅 밑으로 꺼지는 것 같은 피로가 찾아왔고 주말만 되면 잠순이가 되었다. 바닥난 에너지를 그런 방식으로 회복했던 나날이었다.
아이를 낳고 자연스레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일상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육아휴직중에 출근하고 싶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한 번도 그런 마음이 들었던 적은 없다. 육아하며 체력적으로 지치고 내 시간이 없어서 아쉬울 때는 물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남편이나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딱히 자유부인 시간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크지도 않았다. 그것보다는 그냥 아이가 내 옆에서 편안한 눈망울로 꼬물꼬물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게 몸도 마음도 편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불편해하는 건 아니다. 때때로 친구들이나 마음 맞는 사람들과 만나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좋아한다. 다만 어린아이를 키우면서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 않은 와중에 무리해서 그 시간을 만들지 않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향형인 내가 별다른 눈치를보지 않고도 집순이를 할 수 있는 건 내가 엄마인 덕분일지도 모른다.친구들이나 지인들도 대부분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서로 외출 한 번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근 후나 주말에 육아를 하는 시간에 집에 있는다고 해도 혼자 있는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이와 함께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소중한 추억을 쌓아가고 남편과 소소하고 때로는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지난 일주일의 고생을 토닥여주고 때로는 미래의 어떤 일을 응원해주기도 한다. 분명 힘이 되고 일상에서 가장 우선되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이 시간만으로 점점 떨어지는 배터리가 채워지진 않는다.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이유이다. 주로 아이가 잠든 후나 이른 아침에, 출퇴근 지하철에서(주변은 시끄럽지만 그래도 백색소음처럼 생각하면 집중할 수 있다.) 개인 시간을 갖는다.
개인 시간은 독서와 글쓰기로 채워진다. 진부하지만 내게는 이 두 가지가 c케이블 충전기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쏙 와닿는 글귀를 만나면 눈이 번뜩이며 꼭 기억하기 위해 플래그를 붙이고 또 한 번 되뇌어본다. 일면식도 없는 저자의 문장 속에서 평소에 내가 하던 생각을 만나면 마치 절친을 만난 것처럼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을까. 내가 이렇게 얘기한다면 책 속의 주인공(혹은 저자)은 뭐라고 대답할까.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있어 아쉽지만 책을 덮어야 하는 순간이 기어코 오고야 만다.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책 리뷰로 글쓰기도 함께 시작했다. 글쓰기는 내게 운동과 비슷했다. 시작하기 전까지는 좋은 것도 알고 해야 하는 것도 알겠는데, 또 은근히 하고 싶기도 한데 선뜻 운동하러 나가기까지가 오래 걸리는 것처럼 글쓰기도 그러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면 점점 속도가 붙으면서 재미있어지고 하루의 분량을 마치고 나면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글쓰기에는 재미를 붙여서 안 쓰면 찝찝한 기분이 드는 단계까지 왔는데 운동은 여전히 매일매일 시작하기까지의 고단한 과정을 겪고 있다. 하하.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공감하고 다른 관점을 배우는 과정이 좋아서 독서모임에 참여했고 혼자서는 브런치 글 발행버튼을 누르는 횟수가 영 적어서 글쓰기 모임과도 함께 하고 있다. 다른 멤버의 글을 읽으면서 수려한 문장과 기발한 생각의 흐름에 감탄하며 생각의 테두리를 넓혀간다. 서로의 글을 읽고 소중한 공감을 나누는 일은 글쓰기 모임의 매력이고 지속해서 글을 쓰게 해주는 동력이 된다. 올해에는 좀 더 자주 써보려고 한다. 잘 쓰려고 하지 말고 머릿속에만 있는 글감들을 꺼내어 하얀 바탕 위에 콕콕 찍어 글자로 표현된 그림을 한껏 수놓아보자고 오늘도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