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수 Mar 12. 2023

설렘 대신 편안함

타닥타닥, 유아차를 밀며 빠르게 걸어가는 남편의 보폭에 맞춰 분주히 움직이는 내 발걸음 소리이다. 아이를 데리고 단지 내 소아과에 데리고 가는 길이었다.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을까 염려되어 바삐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지만 남편의 속도에 맞춰 걷자니 경보를 하는 수준이었다.


"너무 빨리 걷는 것 같아."


조용히 앞만 보고 걷던 남편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나 원래 걸음이 좀 빨라."


좀 천천히 걸어가자는 의도로 건넨 말이었는데 엉뚱한 대답을 하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날 보더니 본인도 멋쩍었는지 따라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남편 연애 세포 다 없어졌네. 하하하."


남편이 남자친구이던 시절에 이런 대답을 했으면 '뭐지? 그래서 계속 빨리 걷겠다는 거야? 나보고 알아서 맞춰 오라는 거야?' 이러고 속으로 꽁해져서 혼자 삐졌을지도 모를 일이라며 말했다. 남편도 동의한다며, 연애 때는 여자친구 발걸음에 본인이 알아서 맞췄을 거 같다며 은근슬쩍 걷는 속도를 늦췄다. 그러면서도 빨리 걸어야 운동이 된다며 체력 약한 아내를 위한 행동이었던 양 포장하기도 했다. 어설프게 수습하려는 남편이 귀여웠고 우린 한동안 이 일을 얘기하며 연애 시절과 달리 서로에게 꽤나 느긋한 여유를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가 연인이던 시절에는 설레고 보고 싶은 마음에 피곤한 날에도 시간을 내 데이트를 했다. 내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랐고 별 거 아닌 일에도 속상해하기도 했다. 밥 잘 먹고 얘기 잘 나누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안 좋아져서 서로 기분만 상한 채 집에 돌아간 일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는지 영문도 모를 일인데 그땐 밀당에서 비롯한 긴장감이 도는 관계였기 때문은 아닐까. 스케줄 근무를 하던 어느 날, 오후조 근무가 끝나고 늦은 밤이었지만 밸런타인데이를 그냥 넘길 수 없다며 집 근처에서 서프라이즈로 초콜릿만 건네주고 헤어지는 열정도 있었다.


가족이 된 지금, 매일이 두근두근 설레진 않지만 방금 자다 깬 퉁퉁 부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하며 잘 잤는지 안부를 묻고 피곤하면 무리해서 외출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속 이야기를 한다. 괜히 오해하지 않고 별 일 아닌 것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감정적 여유도 생겼다.


같이 산다는 장점은 밸런타인데이에도 빛을 발했다. 실은 밸런타인데이인 것도 자꾸 깜박해서 일정표에 적어놓고 겨우 기억하던 차였다. 퇴근길에 동네빵집에서 남편이 좋아할 만한, 너무 달지 않은 생초콜릿 한 세트와 아이가 사랑하는 딸기조각케이크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냉장실에 살포시 넣어두고 남편이 발견하길 기다렸지만 전혀 인지를 못하길래 결국 그냥 알려줬다. 서프라이즈 아닌 서프라이즈였지만, 화려한 장식이 겸비된 거창한 초콜릿 선물은 아니었지만, 남편의 얼굴엔 빙그레 미소가 띠어졌고 "고마워."란 짧지만 마음이 느껴지는 대답을 듣고 함께 기뻤다.


남편의 빠른 발걸음과 무심한 첫 대답, 그리고 그에 대한 내 반응, 소박한 이벤트는 가족이 주는 느슨한 편안함에서 비롯한 것일 테다. 그럴 수도 있지, 뭔가 이유가 있겠지, 괜히 속으로 지레짐작해서 삐치지 않고 상황을 유머로 만드는 여유,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 콩닥콩닥 뛰는 두근거림보다 잔잔한 물결 속에서 계속해서 반짝이던 윤슬을 발견하는 것, 가족이 주는 이런 매력이 참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안아줘 본 적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