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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수 Feb 19. 2024

귀뚜라미와의 아찔한 첫만남

그냥 용감한 척한 것일지도 몰라

"아아악! 엄마!"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방에서 달려 나올 때는 100미터도 10초 안에 달릴 기세였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던 엄마를 다급하게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을 이어갔다.

"버... 벌레! 방에... 벌레 있어!"

"어휴, 깜짝이야. 무슨 일 난 줄 알았네. 어디 있어? 이리 와봐."

엄마 등 뒤에서 빼꼼 고개만 내밀고 간신히 벌레가 있는 곳을 가리켰고 엄마는 "아이고, 난 또 엄청 큰 벌레인가 했더니..." 하며 덤덤하게 벌레를 잡았다. 간혹 엄마가 보기에도 좀 큰 벌레일 때는 "어머, 얘는 어디서 나온 거야!" 라며 살짝 놀라긴 해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잡곤 했다. 엄마는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엄마, 나중에 내 아이가 벌레 잡아달라 그러면 어떡하지? 난 진짜 못 잡겠는데..."

엄마는 그저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이 피식 웃을 뿐이었다.


어른이 되면 좀 대범해질까 싶었지만 벌레가 근처에 보이기만 해도 질색팔색하는 건 20대 되어서도 여전했다. 대학생 때 잠시 호주에서 지냈던 10개월은 언제 돌이켜봐도 여유가 넘쳤던 시간이었지만 무엇이 제일 힘들었냐는 질문엔 언제나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곤충과 방에도 화장실에도 자꾸만 나타났던 거미라고 답했다. 기숙사가 공원 안에 위치해 있어서 자연친화적인 공간이었지만 나는 곤충 그리고 거미와 함께 웃으며 지낼 만큼 자연친화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를수록 기숙사에서 벌레를 마주할 때의 비명소리가 조금은 약해졌지만, 기숙사의 다른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맨손으로 집 안의 거미를 잡아 밖에 놓아줄 정도였기에 난 여전히 유난인 사람이었다.




'톡. 토독'

어디선가 종이더미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아이를 하이체어에 앉혀놓고 식탁에서 이유식을 먹이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돌려 싱크대 쪽을 바라보았지만 수도꼭지는 물기 하나 없이 말끔히 말라 있었다.

'잘못 들었나...'

다시 이유식을 뜬 숟가락을 아이 입으로 가져가려던 때, 다시 '톡'하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식탁 아래에서 나는 소리였다. 뭔가 작은 부품이 떨어졌나 싶어 허리를 숙여 고개를 식탁 밑으로 살짝 넣어 바닥을 살폈다. 말문이 막혔다.

"어머, 잠깐만. 어머 어떡하지? 귀뚜라미가 어떻게 들어왔지? 아, 쟤를 뭘로 잡지? 두꺼운 거, 두꺼운 거. 잠깐만, 괜찮아. 엄마가 잡아줄게. 그쪽으로 안 갈 거니까 걱정 말고."

두 살(만 1세)이었던 딸은 식탁 밑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알 리도 없었고 엄마의 당황한 모습에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아마도 식탁 밑에 숨기 놀이를 하나보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태어나서 한 번도 귀뚜리마를 실물로 본 적도 없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그것도 나말고는 이걸 대신 처리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 놓이고야 말았다. 얼핏 봐도 손가락 두 마디는 거뜬히 넘을 것 같은 크기였기에 급히 방으로 달려가 눈에 보이는 것 중 가장 두꺼운 책자를 집어 들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아직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숨을 죽이고 귀뚜라미 쪽으로 책을 던졌다. 책이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면서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내 짧은 비명소리가 섞였다. '투욱' 귀뚜라미는 책을 피해 저만치 뛰어 식탁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큰 소리에 놀랐는지 아이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아냐, 괜찮아. 거기까지 못 가. 엄마가 다시 잡을게."

최대한 침착하게 아이를 달랬지만 아마도 아이가 바라본 엄마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지 않았을까 싶다.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서늘해졌고 아이의 울음은 더 우렁차졌다. 정말이지 같이 울고 싶었다. 그래도 엄마니까, 나밖에 해결할 사람이 없으니까 , 용기를 내서 식탁 아래에서 슬그머니 책자를 다시 주어왔다.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각오를 다지고 정확하게 방향을 맞추어 던졌다. 귀뚜라미에게는 미안하지만 다행히 또 책을 던져야 하는 일은 없었다. 계속 울고 있는 아이를 얼른 품에 안고 토닥이며 달랬다. 등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그날 밤, 아이를 재우고 눕자 엄마 생각이 났다. 100미터 전력질주를 하며 달려온 나를 대신해 벌레를 잡아 준 엄마도 사실은 겁이 났을 거란 걸 그제야 알았다. 처음부터 벌레가  무섭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저 겁먹은 딸 앞에서 차마 같이 무서워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걸, 용감한 척 용기를 내야만 했던 걸 말이다. 엄마가 되기 전엔 조그만 날파리도 맨손으로 못 잡고 꼭 휴지가 있어야 했는데 이젠 작은 날벌레는 맨손으로 탁 잡고 손을 씻는다. 엄마도 그러했으리라. 누군가의 딸이기만 하면 되던 시절에서 딸을 지켜줘야 하는 엄마가 되어보니 그저 딸이기만 하면 되었을 엄마의 모습이 그려진다.


나중에 엄마가 되어서도 벌레 못 잡으면 어떡하냐는 물음에 피식 웃던 엄마는 어쩌면 쩔쩔매면서도 결국에는 아이를 위해 벌레를 잡는 내 모습을 미리 예상한 건 아닐까? 당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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