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를 만든 세대가 꼰대가 되기까지
꼰대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으로 추정한다. 1964년 동아일보의 기사에 요즘 청소년들이 부모에게 암 꼰대와 수 꼰대라는 말을 자주 쓴다는 기사였다. 어쩌면 지금의 신조어와 같은 개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모에게 쓰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다.
꼰대의 어원은 번데기의 방언이다. 검고 주름지었다는 번데기를 늙은 부모에게 비유한 것이다. 굉장한 멸칭이 아닐 수 없다. 부모를 이렇게 불렀던 세대는 아이러니하게 지금의 청년들이 1세대 꼰대라고 생각하는 산업화 세대이다.
-산업화 세대와 그들의 부모
산업화 세대라 함은 해방 후 1960년 이전까지의 세대를 말한다. 물론 도시와 지방간의 격차가 있기 때문에 60년대 이후의 출생자도 해당될 수 있다.
그들은 부모에게 굉장한 무시와 경멸의 감정을 지녔다고 말한다. 그 근원은 농지개혁까지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때 소작농들이 지주들에게 바쳐야 할 세율은 50~ 80%에 달했다. 이때 소작농들은 3할씩 5년을 내면 그 땅의 주인이 될 수 있는 파격적인 농지개혁 정책이 시작된다. 그로 인해 90%의 지주들은 몰락한다. 심지어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만 지주들에게는 과거의 값어치로 세금을 받도록 동결시켜 버린다. 사실상 지주들을 죽이고 땅을 나누라는 말과 다름이 없는 정책이었다. 그렇게 해서 소작농들은 대부분 자작농이 된다. 세금을 내지 않으니 당연히 잉여생산물이 생기고 그 돈으로 적어도 아들 중 한 명이상은 잘 입히고 잘 교육시킨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산업화 세대가 된다. 즉, 최초로 꼰대라는 소리를 들은 세대는 자작농 세대였다. 이들은 ‘내 자식은 잘 돼야지’라는 생각으로 먹이고 입히고 일도 안 시켰다. 하지만 농사만 지어본 이들은 일자무식이다. 문맹인 사람이 많았고 육체노동과 절약하는 것 밖에는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나름대로 잘 교육받은 자식들에게 부모는 너무나 무식한 존재로 비쳤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도 권위를 지키고 싶기 때문에 시도한 것은 풍수지리나 제사와 같은 토속적이고 미신적인 잔소리였다. 그러한 것들에는 논리가 없고 왜 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자식과 말싸움을 하면 질 수밖에 없었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런 상황에서 더 강화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아이러니한 점은 교육으로 인해 자식들이 느끼는 우월감과 부모들의 권위가 충돌되어 갈등이 심화되는 와중에도 부모들은 자식들이 똑똑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떠받드는 경향이 있었다. 또 그 당시엔 교육에 대한 더 많은 지원을 못하고 고졸을 하면 공무원을 많이 했다. 그래서 자식들은 더 지원해주지 못한 부모에게 원망을 가지는 경우도 적잖아 있었다.
-거꾸로 꼰대가 되기 시작한 독재 세대
그렇다면 자신들의 부모를 꼰대라고 부르던 이 산업화 세대들이 거꾸로 꼰대가 되기 시작한 건 언제였을까? 이들은 부모, 아내, 자식, 아랫사람 모두에게 독재자였다. 부모는 나보다 못하고 아버지는 불편한 존재고 어머니는 나의 아랫사람이다. 이들을 한반도 역사상 가장 많은 권력을 누린 세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주변 모든 사람에게 독재를 하였던 이들이 말이 통할 리가 없다. 복종하는 여인상을 좋아하거나 배우자로 택하는 것도 자기를 받드는 성향의 어머니로부터의 영향이 있었다. 물론 여성인권의 바닥인 시절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생 절약이 몸에 벤 부모들은 아들이 효도 좀 해보겠다고 선물을 사 오면 돈 아깝게 뭘 이런 걸 샀냐며 타박한다. 그러니 자식은 상처도 받고 커서도 효도하는 법을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성과를 자신의 오롯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조센징은 안 되고 미군정과 우파적인 정치가 경제를 발달시키고 시민운동도 않하고 사회에 적응하며 열심히 일하다 보니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 자신의 경험이고 그것이 성공의 외길이라 착각한다. 그리고 그 경험이 옳다고 굳건히 믿고 아랫사람들에게 따르라고 요구한다.
-산업화 세대와 386세대
386세대는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시민운동을 하고 90년대에 30대였던 이들을 말한다. 시대적으로 산업화 세대와 많이 겹치기 때문에 혼합해서 바라보면 좋을 것이다. 이들은 독재 권력을 내몰고 민주주의를 찾았다. 음악과 예술을 좋아하고 최신 미국 문화를 접했던 이들이 보기에는 먹고 살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자작농 세대가 천박하게 느껴질 것이다. 아버지와는 대립하고 어머니는 또다시 계몽의 대상이 된다. 어머니는 부자 모두에게 동등한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교육과 계몽의 대상으로 무시받으며 살게 된다. 이것이 이어져 386세대는 여성 자체를 대하는 데 있어서 그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 같이 시민운동을 하는 여성조차 남성들을 서포트해주는 위치라고 보고 당연하게 커피나 도시락 심부름을 시킨다. 386세대가 민주주의를 물려주고 그를 위해 많은 희생을 한 것은 맞다. 그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우월감에 도취되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다음 세대들에게 그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입장은 옳지 않다. 그것도 바뀜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경제가 발전함에 가장 많은 수혜를 받은 세대들이고 이들의 경제이득이 아랫세대에게 이어지지 않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의 운동과 혁명은 거시적으로 이루어졌다. 독재 권력은 물러나라는 미명 아래 계몽을 외쳤지만 미시적인 접근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생활에 적용했을 유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득권을 잡았을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착취구조에 동참하고 좌파가 아닌 좌파가 탄생하는 것이다.
-지금의 꼰대
꼰대라는 말이 다시 이슈화 되자 젊은이들은 이것을 무기처럼 휘두른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자신이 꼰대라고 불리지 않기 위해 많은 주의를 기울이며 산다. '요새 젊은것들은 안 돼'라는 말은 고대 수메르의 점토판에서도 발견될 만큼 오랜 말이다. 하지만 꼰대라는 말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탄생한 말이다. 꼰대가 어떤 의미인지 알지도 못하고 욕처럼 남발하는 젊은이들은 비난받아야 한다. 어른과 그들의 경험에서 배울 점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런 어른도 스스로 배움을 멈춘다면 과거의 경험은 오만한 자기 합리화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배울 점은 젊은 사람에게서도 찾을 수 있고 주위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 수용하고 생각하고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꼰대가 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