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증법. 사실을 미루어 질문함으로써 본질과 진실을 이해하는 것.
눈에 보이는 것 = 육체 = 감각
눈에 보이지 않는 것 = 영혼 = 무감각
돌고 돈다. 불교의 윤회사상.
정반합의 원리. 결국은 회귀하고 다시 정진한다.
자연은 죽음으로써 다른 생명의 씨앗이 되고 그 죽음은 태어남의 기초가 된다. 식물이 썩어 문 들어져 땅에 묻히면 그 묻힌 땅에 다른 생명체는 이 썩은 식물의 거름으로 생명을 얻는 것. 죽음도 생명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대립물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자연의 섭리.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열역학 법칙이 존재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시간과 열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시간은 열에 대립물인가? 그럴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 뜨거운 것이 차가워진다. 차가워진 것을 뜨겁게 하기 위해서는 운동과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은 반대의 개념은 아니다.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개념은 이것이다. 상대성 이론. 시간을 역행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차가워진 것을 뜨겁게 하면 가능한 것이다. 대립물로서 죽은 것을 살릴 수도 있는 것이며 살아있는 것이 죽는다면 죽어있는 것도 마땅히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별개의 조건이 필요할 것이다. 운동과 시간.
열역학 법칙은 순회할 수 없다. 일방향으로 흐른다. 유리컵이 깨지고 나면 다시 유리컵이 붙어서 멀쩡히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시간과 열은 같은 성질과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운동을 통해서 차가운 것에서 뜨거운 것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만 찾는다면, 시간은 열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간도 역행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사람은 본래 태생부터 지식을 겸비했으나 태어나면서 망각으로 그 지식을 잃어버렸을 뿐이다. 그 이유는 어떤 사실을 경험했을 때 기억한다는 것은 그 이전의 사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지식을 깨우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그러므로 배움이라 하는 것은 기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육체와 영혼은 대립물이다. 죽어있는 것의 대립물은 살아있는 것이다. 이 대립물은 서로의 존재로 인해 그와 상반대는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명백히 증명한다. 가령, 뜨거운 것의 반대말은 차가운 것이며 큰 것의 반대말은 작은 것과 마찬가지다. 상태가 상반된 것은 그 대립물, 즉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음으로 존재하는 것을 완벽히 증명할 수 있다.
육체는 존재하기 때문에 영혼이라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고 육체의 감각기관으로 인식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치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람은 태어나서 지식을 망각한 상태에서 그 지식을 '기억'해내는 것이라면 육체에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영혼으로서 그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영혼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영혼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정의, 아름다움, 선함 등과 같이 명백히 증명할 수 있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궁극적인 원형이 있는 존재들이다. 이로서 영혼도 존재할 가능성을 입증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고로 철학자라면 영혼이 육체의 결박에서 해제하여 순수한 영혼으로서의 의미와 영혼이 가진 본질의 가치를 육체의 오감이 아닌 지식과 깨달음으로서 느낄 수 있는 경지에 올라야 한다고 말했다. 쉽게 이야기해서 육체의 결박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죽음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결국 철학자는 '죽음'의 존재와 '죽음'을 목표로 삶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무고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거부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멸 = 영원
소멸하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영혼은 죽음과 소멸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혼은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