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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인간 Aug 27. 2022

그림자

빛의 이면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쓰는 것 같다. 그동안 이런저런 업무로 바쁘기도 했고 무엇보다 사념의 덩어리를 피로하게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최근 즐겨보았고 관심이 있었고 나름 세상의 진리라고 느꼈던 책들과 그 책에 기록된 단어들이 타인에게 매우 생소했으므로. 


주파수, 파동, 에너지, 양자역학, 양자 얽힘, 불확정성의 원리, 엔트로피 등 물리학과는 최소 100km가량 등을 지고 살아온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은 삶의 방향이고 우연이기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물체 즉, 모든 사물이 가진 고유의 주파수와 진동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제는 믿음의 영역에서 신뢰의 영역으로 다가가고 있다. 어려운 말과 글로 혼동을 주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것은 사실이 맞다.


일단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의 혼란을 방지하고 정렬된 글의 방향을 이어가기 위해서 서두에서 간단하게 정리해보도록 하자.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빛은 밝은 플라스마이며 그 어떤 물질이 연소되거나 반사되면서 만들어지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현상이다. 그 빛의 이면이자 대립어는 바로 '그림자'다. 그림자는 빛이 표현되는 영역과 반대된 영역에서 짙게 드리우는 어둠의 표현이다. 우주처럼 칙칙하거나 까맣게 변하여 그 공간에 무엇이 있는지 잘 가늠이 안될 정도의 어둠이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설명하며 말했다. 삶을 동굴로 표현하여 어떤 현상과 세상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림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바로 실질적이고 사실적인 본질이 아니고 어떤 빛이 투과되어 동굴의 벽에 나타난 그림자라 표현했다. 그림자를 봄으로써 우리는 그 형상과 의미를 통해 삶을 살아간다고 말했다. 즉 우리는 삶을 살면서 결국 삶의 의미와 본질을 그림자로서 가늠할 뿐인 것이다.


인간은 본질이 무엇인지는 결코 볼 수 없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4차원이든 3차원이든 2차원이든 인간이 공간을 탐지하는 그 영역 외의 것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고.  그걸 결단코 배우지 못했고 그 의미를 말로써, 그리고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인 시각, 후각, 청각, 촉각 등으로는 접근이 불가하기 때문에 그 진리를 알 길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건 볼 수 없다.


다만 그림자는 볼 수 있다. 그 본질이 어느 방향을 향하는지,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부피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대략적으로 그림자를 통해 가늠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림자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본질과 가장 가까운 부분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렇듯 그림자에 대한 정의는 대략 여기서 정리가 된다.


다시 정리하자면 인간에게는 결국은 빛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림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서두가 길어졌지만 그러면 내가 정의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그림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의 일상은 우주라는 직물에 새겨진 보다 깊은 현실이 투영된 것일 뿐이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그 깊은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실상'이라고 보고 있는 것은 다른 영역, 즉 우리가 서 있는 지점에서는 인지할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의 반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바꿔 말하면 우리는 존재의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우리의 삶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일상 안에서 그림자로서 그 반영된 실체를 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추측해볼 수는 있겠다.


가령, 길을 지나가다가 느닷없이 바람이 불어와 내 볼에 스쳤다. 우리는 그것이 단순히 바람으로 정의하고 언어로 표현했기에 바람으로 이해하겠지만 우리가 바람이라는 단어와 의미밖에 알지 못하니 바람이라고 여길뿐이다. 사실 그것은 그저 바람일 수도 있고 어떤 다른 존재가 내뿜는 입김일 수도 있으며 타인이 원하는 기원과 의도일지도 모른다.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결국 바람이라는 존재도 우리가 우리의 믿음과 인지능력으로 창조된 우리의 세게 안에서 거울처럼 비친 그림자일 뿐인 것이다. 그냥 단순한 나의 미묘한 감정과 의도로 그렇게 해석할 뿐인 것이다. 


조금 무리해서 더욱 깊게 들어가 보면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아원자를 예를 들어보자. 양자역학이라는 사실에 근접한 과학에서는 아주 이상하겠지만 최소 단위의 물질은 두 가지 상보성의 성질을 지님을 발견했다. 바로 진동과 입자. 어떤 때에는 드넒은 강에 던져진 돌멩이의 파동처럼 아원자가 입자가 아닌 유령처럼 진동하는 형태로 있다가 관찰을 하다 보면 모래 알갱이처럼 입자로 변한다는 것이다. 가당키나 한 말이겠다만 이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어려운 현상을 쉽게 설명하자면 사람의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물질을 바라보면 그게 보이지 않다가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림자를 통해 세상을 가늠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물질과 현상, 그리고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와 에피소드가 가능성의 형태이자 보이지 않는 진동의 형태로 있다가 돌연 내가 바라고자 하는 의도와 느낌에 영향을 받고 물질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떤 가능성을 선택하는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원하는 일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가? 그 말은 우리가 현실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세계적인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물리학의 기본 원리와 열역학 체계에 공헌한 막스 플랑크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강연 도중 과학자로서는 할 수도 없고 과학자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물리학이라는 더없이 명철한 과학에 평생 헌신해온 사람으로 나는 여러분께 원자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밝히고자 합니다. 세상에는 원자라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물질은 원자를 진동하게 하고 원자라는 더없이 미세한 태양계를 유지시키는 힘으로 비롯되며 그 힘에 의해서만 존재합니다. 이러한 힘의 배경은 이식과 지성을 가진 인간의 마음이 있다고 추정해야 마땅합니다. 그 마음이 결국 물질인 것입니다."


마음이 물질이라니. 아니 이게 얼마나 초자연적이고 사이비 종교적인 발언인가?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물리학 전공 과학자라고 할 수 있는 물리학자가 과연 내뱉을만한 발언인가 싶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결국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물질들은 어떤 존재의 의도와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게 신이든 인간이든 하여간 뭐든지 간에 만들어진 방법이 마음과 의도, 느낌이라면. 


그게 부분적 경험과 학습된 기억을 통해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역으로 모든 물질에 온전히 내가 염두한 생각과 마음을 정말 배제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만날 때의 감정은 확연히 다른 것이 이니까. 그 감정과 마음 때문에 그 상대가 좋든 싫든 물질로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말이다. 좋은 감정과 느낌과 나쁜 감정과 느낌은 행동에 영향을 줄 것이고 그게 자의든 타의든 표현되는 것이 맞다면 그 의도와 감정을 타인이 느끼는 것은 바로 내가 서두에 표현한 마음이 만들어낸 물질이자, 본질이 동굴에 표현한 그림자가 맞을 것이다.


아무쪼록 결론은 내가 만들어 낸 세상이자 사회 안에서 나의 존재와 감정, 느낌으로 인해 변화한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의식하는 것과 느끼는 것 자체가 창조적 행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모든 일과 지금 내가 기록하는 이 글과 단어처럼 나를 둘러싼 것들은 나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지고 내 선택은 그 일에 영향을 주다 못해 결정해버린 것이다. 우리는 그렇듯 끊임없이 이미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변화시키고 있다. 


빛이 곧 그림자이며 

그림자는 곧 빛의 이면이자 빛의 표현이다.

우리는 언어와 감정, 그리고 느낌으로 그 빛과 그림자를 해석하고 인지한다. 

우리가 의도한 그 모습대로 빛과 그림자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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