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처방전- 문장 플레이리스트
여름에 절골에서 멱을 감다가 지쳐서 자고 있는, 이제 겨우 세 살 난 막내여동생을 업은 열 살 난 땅꼬마 내가 걸어가고 있다. 내 작은 등 뒤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동그란 여동생의 볼을, 허리를 숙여 끌어올리며 흥일약국을 지난다. 무서운 개 도꾸가 살고 있는 집 우물 앞을 서성이고 있으면, 숙아, 얼른 들온나,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대문 앞에 서 있던 엄마는 너무 젊었다.
-『독수리표 쉐이코 카세트』 부분
이 책이 출판된 2013년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나는 삼십 대 초반이었고, 그 책을 낸 출판사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편집부는 편집장과 나, 그리고 막내까지 셋이 전부였다. 작은 문학 출판사의 사정이 대개 다 그렇듯 책이 잘 팔리지 않았다.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니었고, 월급은 언급하기 민망할 정도로 적었다. 눈앞의 길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 셋은 똘똘 뭉쳐 꽤 즐거웠던 것 같다. 야근할 때면 피자나 햄버거 같은 음식을 나눠 먹었고, 일하다가 지루할 때면 누군가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내 잠시 킥킥대고는 했다.
물론 그때도 나는 불안했고 실수가 잦았으며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청맹과니였다. 좋은 점도 있었다. 대표와 회계를 맡은 분이 모두 시인이었고, 출판사 선배나 관계자 중에 문인이 많았다. 실질적인 혜택을 받는 게 아니더라도 글을 쓰는 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난 꽤 우쭐했던 것 같다.
즐거웠던 직장 생활은 찰나였다. 가난한 출판사에는 갈수록 빚이 늘어났고 대표는 계속 대출을 받아서 부족한 곳을 메꾸려다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이 책이 나온 지 1년 후 편집부 셋은 몇 달 치 월급과 퇴직금을 받지 못한 채 실업자가 돼 뿔뿔이 흩어졌다. 편집장은 어린이 출판사로 넘어가 단행본을 계속 만들었고, 막내는 결혼했다. 나는 사보 업계에 뛰어들었다. 왜 하필 사보였을까. 계속 단행본을 만들었다면 지금의 나와는 또 다른 내가 되지는 않았을까. 후회되지만 부질없는 생각이다.
판매가 목적인 단행본 업무와 용역 금액을 받아 기업이나 기관을 위해 책자를 만드는 일은 a부터 z까지 거의 모든 게 달랐다. 세상에 쉬운 일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 생각을 하며 이를 악물었던 것 같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스트레스와 불안을 영양제로 생각하며 일하다 퇴근한 어느 밤이면 곧잘 좋아하는 책을 꺼내 읽고는 했다. 가장 많이 꺼낸 책이 『독수리표 쉐이코 카세트』였다. 가난했던 시절, 음악을 들으면 견뎌낸 이야기를 풀어낸 저자의 글은 군더더기 없었다. 세밀하고 정성스럽게 조각된 그의 글은 어느 부분에서도 호들갑 떨지 않지만, 결국 읽는 이의 마음을 후벼파냈다. 단단하게 정리된 문장들을 보며 위로를 얻는 날들이 많았다.
무서운 개 도꾸가 살고 있는 집 우물 앞을 서성이고 있으면, 숙아, 얼른 들온나,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대문 앞에 서 있던 엄마는 너무 젊었다.
특히 이 부분을 사랑했던 것 같다.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그려지는 묘사에는 적당한 여운과 애수가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누구에게나 영원히 머물고 싶은 추억의 공간 하나쯤은 있으니, 바로 그곳을 떠올리면 된다. 그곳에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더운 여름날 계곡(절골은 태백의 계곡)에서 멱을 감다가 지친 아이들이 익숙한 풍경을 지나 뚜벅뚜벅 집으로 돌아간다. 집 근처에 도착하니 내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으며 기다리고 있다. 더 바랄 게 있을까.
요즘도 힘들 때면 이 책의 곳곳을 소리 내어 읽는다. 그러면 내 방은 곧 얼굴을 바꾼다. 조금 더 밝아지는 기분이랄까. 괜찮다고, 아직은 괜찮다고 내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려준다. 그렇게 나는 또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