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성 Jul 22. 2023

이태원 참사, 슬퍼도 일은 해야 한다

나는 기자였다 - 07

추모공간을 취재하며 느꼈던

기자 일에 대한 '환멸'


신당역 사건을 취재하며 생긴 고민의 여파가 사라지지도 않은 10월, 내게는 커다란 사건이 하나 또 찾아왔다. 바로 이태원 참사였다.


이태원 참사를 취재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이태원역 1번 출구에 조성됐던 추모 공간을 취재했던 일과 한 기자회견에서 이태원 참사 생존자의 발언을 들었던 일이었다.


당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이태원역 1번 출구에 추모 공간을 조성했다. 포스트잇과 국화꽃들이 수북하게 쌓인 그곳을 방문하면서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했던 대로, ‘인터뷰’가 문제였다. 모든 시민들을 애통하게 만들었던 이태원 참사에서, 슬픔에 잠긴 채 추모를 위해 공간을 방문한 이들을 인터뷰하기가 참 쉽지 않았다. 그들의 슬픔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고, 그 슬픔을 말로 듣기가 힘들었고, 그 말을 기사로 옮겨 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버거웠다.


그러나 나는 해야만 했다. 특히나 기사의 ‘각’이 나오는 시민들을 기다렸다가 그 시민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 스스로가 조금은 환멸스러웠다. 청년이거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계신 시민분이 인터뷰의 주요 대상이었다.


나를 조금 더 환멸스럽게 한 것은 나처럼 그런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기자들이 그 추모 공간에 깔려있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방문했던 그때에, 여성 두 분이 추모 공간에 술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직감했다. 저분들에게 사연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기자로 보이는(대표적으로 기자들은 녹음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고 있다.) 이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기자가 나섰다. 난 지금도 그 기자에게 정말 고맙다. 그 기자가, 따로따로 저 여성들에게 다가가서 인터뷰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 번에 다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거기 있던 기자들 모두 같은 생각이었는지 동의했고, 다 같이 여성들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그들은 이태원 참사에서 친구 4명을 잃은 이들이었다. 떠나보낸 친구들이 좋아했던 술과 책을 올리러 왔다고 했다. 기자로 그들을 마주한 것이지만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거렸다. 그들 중 한 명은 “나만 (친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 줘서 고맙다” 말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눈물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이 날의 기사를 쓰면서 고민이 많았다. 제목을 사람들의 눈에 띄게 쓰자면, 충분히 그렇게 쓸 수 있는 기사였다. 그렇지만 나는 ‘추모의 마음이 모인 이태원역 1번 출구… 조화·포스트잇 수북이 쌓여’라고 담백하게 쓰는 걸 선택했다. 하지만 데스크를 거친 후에 나온 제목은 달랐다. 술을 올렸던 여성들을 강조한 제목으로 바뀌어 있었다.


데스크가 제목을 바꾸는 일은 흔하게 있는 일이었지만, 그날은 그 일이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슬픔에 잠긴 여성들을 제목으로 이용해 클릭을 유도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조금은, 현실에 맞지 않는 이상적인 생각을 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저 힘들었던 취재,

눈물을 쏟았던 그날


아무튼, 이태원 참사를 취재하면서는 많은 고민을 했지만 동시에 사실 그저 ‘힘들었다’. 나도 슬픔에 잠긴 한 명의 시민이었기 때문에. 이태원 참사 49일 추모제를 취재하러 갔을 때는 펑펑 울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눈물을 참는 데 성공했지만 그날은 차마 참을 수가 없었다.

 

화면에 이태원 참사 피해자들의 이름과 사진을 일일이 띄웠는데, 추모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피해자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의미로 이름을 외치기도 했다. 이름과 사진을 보면서, 그리고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계속 울었다. 마치 이전까지 참았던 눈물을 다 울어버리려는 것 마냥.

 

조금 시간이 흘러, 이태원 참사에서 벌어졌던 인권침해를 조사하고 이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유가족 두 분과 생존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기사에 쓰기 위해 발언을 타이핑하고 있었는데, 빠르게 받아쓰다 순간 머뭇거렸던 기억이 난다. 너무도 절절한 질문이었기에.


그는 “‘나는 왜 살았을까’라는 의문을 떠올려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에 대해 이 한마디 외에 생각해 본 적도 없다. 159명은 왜 죽어야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질문도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나는 인터뷰를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넘어, 이 직업을 가진 이상 마주해야 하는 일 자체가 정신적으로 힘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 직업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날 위해 정말 ‘좋은’ 직업이 맞을까?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강렬하게 들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덕업일치, 그러나 순탄치만은 않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