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노자
“나는 여전히 단어의 예외적인 의미에서 철학적인 의사(醫師)를 고대하고 있다. 민족, 시대, 인종, 인류의 총체적인 건강의 문제를 진단하고, 내가 제기한 의혹을 끝까지 추구하여 모든 철학이 지금까지 다루어온 것은 “진리”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즉 건강, 미래, 성장, 권력, 삶 등이라는 명제에 과감하게 천착하는 그런 의사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즐거운 학문, 서문>
나는 마른 체격이다. 어떻게 하면 몸에 살이 붙을지 궁리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몸피가 넉넉한 동년배를 보면 부럽다. 심한 비만은 반갑지 않으나 통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몸은 나의 희망사항을 들어주지 않는다. 어디가 크게 아픈 것은 아니지만 저혈압과 빈혈기도 신경이 쓰인다.
니체는 56세라는 길지 않은 생애 동안 질병과 회복과 질병 사이를 통과하면서 ‘철학’을 해왔다. 심한 병고 중에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2를 집필했다. 니체는 평생을 병 속에서 사유했고 병마와 사이좋게 살았다. 질병을 긍정했다.
질병을 통과하면서 <아침놀>을 썼고 회복기에 <즐거운 학문>을 완성했다. <즐거운 학문>에서는 니체의 고양된 정신을 만나게 된다. 이 시기에 니체는 ‘철학은 단지 육체에 대한 해석, 혹은 육체에 대한 오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주 했다고 말한다.
철학은 ‘단지 육체에 대한 해석, 혹은 육체에 대한 오해’ 일까?
“이 철학 전체는 그것의 모든 우회로와 함께 어디로 가려하는 것인가?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의 지속적이고 강한 충동을 이성으로 번역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는가? 이런 충동이란 (...) 내 취미에 가장 적합하고 내게 가장 도움이 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충동이다. 근본적으로 철학은 개인이 건강해지는 법에 대한 본능이 아닐까? 나의 대기, 나의 높이, 나의 기후, 나름대로의 건강을 두뇌라는 우회로를 통해 추구하려는 본능이 아닐까?”
-니체 <아침놀, 553>
즉 ‘모든 철학은 개인적인 충동의 지성적인 우회로에 불과한 것’이며 개인적인 충동이란 ‘취미에 적합하고 도움이 되는 것들에 대한 충동’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철학이란 근본적으로 ‘개인이 건강해지는 법에 대한 본능’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나름대로의 건강을 두뇌라는 우회로를 통해 추구하려는 본능’, 그것이 철학이라고.
한마디로 철학은 건강을 추구하는 본능, 혹은 건강을 발명하는 인식 행위라는 설명이다. 철학을 하면서 아프고 왜소해지고 고뇌에 찌들고 삶이 침체된다면 그것은 철학하는 삶이 아니다.
철학은 건강한 삶의 방법을 아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건강이란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건강과 질병은 한 쌍의 짝패요, 쌍둥이다. 건강이란 질병과 사이좋게 노는 삶, 질병과 건강의 동시적인 장으로서의 삶에 대한 긍정이며 능동성이다. 건강은 질병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언급했듯이 니체에게 개인의 건강이란 자신의 충동을 두뇌로 번역한 것이다, 그것이 철학 행위이며, 철학이란 근본적으로는 ‘개인이 건강해지는 본능’이라고 말한다. 이 본능을 긍정하는 삶이다.
“또한 나는 나의 변덕스러운 건강 덕분에 저 모든 거칠고 모난 정신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종류의 건강 상태를 거듭해서 통과하고 또 통과해야 하는 철학자는 그만큼 많은 종류의 철학을 뚫고 지나가게 된다: 그는 그의 상태를 가장 정신적인 형식과 원거리로 옮겨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러한 변형의 기술이 바로 철학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 서문>
나의 ‘수많은 종류의 건강상태’를 거듭해서 통과하고 통과한 철학자는 ‘수많은 종류의 철학’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철학을-건강상태를- 뚫고 지나간 사람은 그의 ‘건강 상태’를 ‘가장 정신적인 형식과 원거리’로 옮겨 놓을 수밖에 없다. 즉 펄펄 김 나는 따뜻한 나의 내장과 나의 몸, 나의 본능의 ‘수많은 건강상태’들은 이것을 ‘두뇌라는 우회로를 통해 번역’하는 나에게 가장 정신적인 형식으로 그것을 옮겨 놓게 한다. 이러한 ‘변형의 기술’이 철학이라고.
이는 철학자는 ‘차가운 내장을 지니고서 객관화하고 기록하는 기계가 아니라 항상 산고를 겪으며 자신의 사상을 탄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말과 통한다. 그것은 ‘어머니로서 피, 심장, 불, 기쁨, 정열, 고통, 양심, 운명, 숙명 등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그 사상에 주어야만 한다.’고.(같은 책) 그리고 니체는 덧붙인다. ‘삶- 이것이 모든 것이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이라고. 그밖에 다른 도리는 없다고.
노자도덕경을 생각한다.
(...)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도덕경 3장 중>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워 그 배를 채우게 하고 그 뜻을 부드럽게 하여 그 뼈를 강하게 한다)
이 구절이 있는 도덕경 3장은 백성을 우민화한다는 이유로 유가 사상가들로부터 격렬하게 공격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논외로 하고 3장 중 ‘그 마음을 비워 그 배를 채우고 그 뜻을 부드럽게 하여 그 뼈를 강하게 한다.(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를 생각해 보자.
니체 철학이 어떤 맥락에서 노자와 유사하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노자는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를 바라는 한국인의 ‘관념’에 의문을 던진다. 이 부분을 도올 김용옥은 <노자와 21세기>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의 뜻이란 쓸데없는 일을 벌이기 좋아한다. 욕망의 지향성에 따라 많은 유위의 세계를 지어낸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뼈를 갉아먹기만 하는 피곤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 “뜻있는 일을 했다”고 하는 많은 자위감은, 때로는 하잘 것 없는 유위적 문명의 장난의 한 굴레일 수 도 있다. 네 뜻을 약하게 하고 네 뼈를 강하게 해라! 왜 그렇게 바보스럽게 마음을 가득 채울 생각만 하느뇨? 마음일랑 비우고 배나 채우려무나! 불행한 소크라테스가 행복한 돼지보다 낫다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인 상념이다. 그러나 노자는 그러한 상념에 브레이크를 건다. (...) 인간은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배로 산다! 이것은 우리의 통념을 깨는 노자의 지혜다. 그리고 이것은 뇌 중심의 서양 인체해부학에 대하여 오장육부 복부 중심의 한의학적 인간학의 지혜로운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청하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 <노자와 21세기>
이 지점, 마음을 가득 채우고 조작적인 유위의 세계를 지향하는 대신 네 배를 채우고 네 뼈를 튼튼히 하는 건강의 철학, 이것은 니체와 노자가 만나는 지점이 아닐까?
물론 니체는 서구의 전통 형이상학적 관점을 비판하지만 ‘네 배나 채우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니체는 인간을 부정하고 왜소하게 하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관점과 도덕관념을 맹비난하면서 ‘삶’을 이야기한다. 뼈와 살과 피가 도는 이 삶, 이 현존재의 힘 의지와 이 ‘현실’에 엄지 손가락을 척 펴고 미소를 짓는다. 고매한 사유를 읊조리며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자들을 비웃는다. 물론 니체도 노자도 불쑥 ‘네 배나 채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괴롭히고 우울하게 하고 바짝 마르게 하는 철학이라면 그것은 철학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건강을 위한 철학, 건강의 기예를 찾는 본능을 니체가 자신의 철학이라 했다면 노자는 언어와 개념에 갇히지 않는 도(道), 무위(無爲, 하지 않음을 함)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내 배를 채우고 네 뼈를 강하게 하라!
개인이 건강해지기 위한 본능이 철학이라면 철학은 이제 ‘민족과 인종’ 등 인류의 총체적인 건강 문제를 진단 치료하는 의사의 역할을 생각하게 된다. 해서 인류의 건강을 치료하는 철학적인 의사의 출현을 니체는 고대한다.
즉 철학은 개체와 인류의 건강을 발명해내는 무엇이다. 서양철학은 그동안 인간을 병리적인 상태로 유도하는 형이상학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그 결과 병든 인간을 산출했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니체의 계보학은 인간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전통적인 관념들의 발생과 기원을 추적한다.
대학시절, 나는 문학은 좋았으나 철학에는 거부감이 컸다. 거부감 정도가 아니라 철학 책을 보면 화가 났다. “뭐야? 말장난하는 건가?” <철학에로의 초대> <철학 입문> 등등은 표지만 봐도 머리가 아파왔다. 제대로 읽지도, 고민해보지도 않고, 현실과 동떨어진 말장난이라고, 인간의 삶과는 거리가 먼 앙상한 관념들의 집합소라고 철학을 치부했던 것이다.
반면 문학은 재미있었다. 나와 너무도 닮은 인간이 울고 웃고 사랑하고 증오하고 파멸하고 몰락해가는 서사. 이 드라마 안에서 주인공도 되고 관객도 되어 가상의 세계를 만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젊은 시절, 인간은 나의 관심사였으며 바로 나였으며 삶을 이루는 중심이었다. 인간 이야기를 풀어내는 소설과 시와 수필은 힘이 세다.
그러나 철학에는 인간이 없었다.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개념들이 싸우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기호들이 서로 몰아붙이고 삿대질을 한다. 인간은 부재하고 난해한 빈 말들의 성찬이 진행될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철학이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니체 덕분이다. 니체의 문장은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하고 영감을 준다. 인간의 육성이 어른거린다. 죽비소리처럼, 독재자처럼, 초인처럼, 치기 어린 소년처럼 변주되어 반복된다. 철학적인 글쓰기와 문학적인 글쓰기가 만나는 지점을 니체에게서 본다. 니체의 문장은 문학을 극도로 밀고 나갔을 때 철학이 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철학이 이렇게 재미있어도 될까?
철학이 재미없고 삶과 유리된 관념 놀이처럼 느껴졌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니체의 철학에는 인간이 살아 있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건강을 위한 철학이라고 말한다. 더 나가 모든 철학을 개인의 ‘충동을 이성으로 번역하는’ 행위로 본다. 건강을 추구하는 본능을 철학이라고 말한다. 철학적 의사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 인간을 평가절하하는 전통 형이상학적 관점을 병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니체에게 내가 호기심과 기쁨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인간과 문학과 철학이 혼융되어 나타나는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마른 체격이다. 그렇게 생겨먹은 것일 텐데 간혹 내가 철학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러다가 웃는다. 성장기부터 한결같은 몸이었건만 이제 와서 마른 체격을 탓하며 내가 철학 공부를 제대로 못하는 것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 생트집 같아서. 다만 마음이 너무 복닥거려서 살이 안 찌는 거라면 그 마음을 잘 어루만져주어야지, 생각한다.
건강을 위해 공부해야 하리라. 지금 이 삶을 풍요롭게 하고 나를 건강하게 하는 공부를 해야 하리.
“우리는 우리의 충동을 정원사처럼 처리할 수 있다. 그리고 소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분노, 동정, 심사숙고, 허영심의 싹을 격자 울타리에 달린 아름다운 과일처럼 생산적이고 유용한 것으로 키울 수 있다 (...)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와 같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가? (...)”
-니체, <아침놀, 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