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데로 임하소서 - 이청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성경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얼마나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하지만 만족, 얼마만큼이 모자람 없이 넉넉하고 충분한 것일까요?
그 기준도 각자의 생각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정상적인 내 몸에 기능들이 어느 순간 하나씩 하나씩 그 기능을 잃어 간다면 당신은 어떤 상태가 될까요?
절망에 끝자락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해 나가는 아름다운 소설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소개해 봅니다.
본 소설은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되는 안요한 목사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입니다.
그러다보니 소설은 다분히 개신교적 사고와 색채가 곳곳에 느껴집니다.
작가이신 이청준님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학가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선생님께서는 목사님도, 전도사님도, 성직자도 아닌 그냥 너무나 유명한 작가분이라는 점이죠.
설마하니 이청준 선생님을 모를까 싶지만 혹여 모르는 분들이 있었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이나 읽고 난 후의 소감은 어김없이 개신교 서적으로 치부하기 쉬울 것입니다.
나도 이 책을 처음 접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보면 이청준 선생님도 그리고 이 소설도 개신교를 찬양하는 서적으로 생각했던 듯싶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읽었고, '이렇게 절망의 끝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구나. 근데 꼭 하나님이 곁에 있어야 희망이 있는 건가?'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이 글을 쓰기위해 이청준 선생님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한 결과는 역시나 비 개신교인이라는 놀라움을 나에게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이렇게나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진정으로 이 소설이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지 그리고 어찌나 감동적인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 개신교인이 바라본 하나님의 세상.
잠시 그분들이 부르는 '주님'의 품안으로 사뿐히 안겨보겠습니다.
소설속 주인공 안요한은 목사인 아버지를 둔 개신교 집안에서 1939년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몸을 빌려 한 마리 어린 새끼 양을 얻으셨다.
안요한, 이것이 아버지가 당신의 새끼 양에게 지어 주신 이름이었다.
당신 자신이 너무 늦게 섬기기 시작한
당신의 하나님께 대한 참회와 감사의 속죄양으로 삼으시려는 뜻이었다.
주인공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장하는 과정 속에 개신교는 끝 모를 거부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삶의 궤적이 그러하듯 벗어나려해도 벗어 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인공과 하나님의 관계이고 그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 아버지 그리고 이러한 출생과 성장 환경입니다.
소설을 보고 내가 느낀 주인공은 매우 밝은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어떤 어려움과 역경에서도 희망의 빛을 보아가는 주인공은 타고난 성직자의 참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눈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한 순간은 결혼 후 얼마 안 되는 시점에서입니다.
그 전까지 그는 흔히, 그 당시 평범한 듯 성공적인 삶을 이어 나갔고 매사에 충실하며 행운도 함께 하였습니다.
만약 당신에 눈이 언제 부턴가 재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어떠하겠나요?
누구나 그렇듯 주인공역시 마지막 동아줄을 잡기위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시술에 의지하려고 하는 그의 모습과 그로인해 찾아온 다른 신체 기능의 파괴는 그를 더욱 나락으로 인도합니다.
또한 그의 가족들도 그에 곁을 떠나게 되니 얼마나 비참하고 삶이 고단할까요?
주인공은 그러한 고생과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는 순간 그 역시도 인간의 미약함으로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려 합니다.
그가 죽음을 결심하고 사과상자위에 올라 천장에 박힌 못에 넥타이를 매달아 그의 목을 걸었을 때 심한 발버둥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선에 먼저 숨을 쉴 수 있는 것이 그렇게 편하고 후련할 수가 없었다.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것이 그렇게 반갑고 좋을 수가 없었다.
죽음을 도와주던 사과상자는 밥을 짓는 아궁이로 그 몸을 불사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