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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한댁 Feb 18. 2020

보낼 수 없는 편지

네가 꼭 읽었으면 좋겠는데...


정은아 안녕~

너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라는 생각을 많이 하다가 너에겐 누나가 없으니까 그냥 동생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그 집에는 최고 존엄이라는 게 있다는 거 잘 알지만 그런 거 빼고 사람대 사람으로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렇게 

쓴다. 너는 잘 살고 있냐는 말은 생략할게. 세상이 네가 어떻게 사는지 다 아니까 말이야. 

그 집을 떠난 지 벌써 20년이 넘었네. 너도 나에게 집을 떠나니 어떠냐고 묻고 싶지?

아닌가? 다 알고 있어서 묻고 싶지 않으려나? 난 네가 알고 있는 것처럼 좋은 집에서 잘살고 있어. 


너도 잘 알겠지만, 그 집에 살면서 어릴 적부터 어버이수령님이라고 불렀던 너의 할아버지가 죽고 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들었니? 너의 아버지가 집 재산을 어떻게 말아먹은 건지 쫄쫄 굶기면서 버티라고 하는데 넌 굶어보지 않아서 모르지? 배고프니까 미쳐버리겠더라. 인간의 기본 욕구 중에 제일 중요한 게 생존의 욕구인데 그것을 견디고 참으라고 하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겠어?

그런데 계속 굶고 있는 우리에게 집을 지키라는 거야. 어디 가지도 못하게 하고 먹을 것, 입을 것도 없는데 

무조건 정신력으로 버티라고 하더라. 너희 가족은 그렇게 배불리 먹고 살면서 말이야.

네가 생각해 봐. 어떻게 버티냐?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도 힘든데 감시와 폭력에 개인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이야기하면 말 반동이 되니 집안에 있을 땐 늘 입조심, 생각 조심하며 살아야 했어. 생각과 발언의 자유조차 없었지. 그렇게 우리는 그 집에 갇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무지하고 생각 없는 바보로 살았어.

결국 우리는 어떻게든 굶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야 해서 그 집을 떠났고 중국이라는 곳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살았어. 그 집에선 우리를 안 받아 주더라. 너의 아버지와 친하다는 이유로 지옥같은 그 집의 사정을 잘 알면서도 돌려보내더라고. 하긴 같은 뭐 그 집도 생각의 자유, 발언의 자유가 없는 건 마찬가지더라고. 

그 집을 떠나서야 알게 된 사실! 사회주의니 공산당이니 하면서 어쩜 그리 똑같은지 말이야...

디시 돌아가는 건 죽기보다 싫어서 계속 도망 다녔어. 그러다 보니 메뚜기 마냥 조금만 불안한 기미가 보여도 펄 쩍펄쩍 뛰어 도망쳐야 했어. 그래도 중국 아저씨네는 굶기지는 않더라. 먹을 거는 넉넉히 줬어. 

그런데 잘 먹여놓고 또 언제 잡아갈지 모르니 늘 불안했어. 


그렇게 불안하고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때 사랑하는 남자가 사는 집을  만나게 되었지. 이 집이  없었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내 인생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이 집에 처음 왔을  정말 고생 많이 했어. 왜 그런지 알아?

어버이수령님이라 부르며 살던 그 집에서 집안 교육을 제대로 못 받고 이상한 교육만 맨날 말도 받았잖아. 말도 안 되는 거짓으로 꾸민 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우상화교육과 주체사상교육이었잖니...

거기에 배려나 격려보다는 형제들끼리 서로 의심하며 고자질하게 만들고 상호 비판하게 하는 부정적인 교육을 더 많이 받았잖아. 그러다 보니 긍정보다는 부정적이고 전투적인 것이 내 몸에 배어 있더라고.

너도 부모가 되었으니 이제 알겠지? 어릴 적 배운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말이야. 

그래서 첫걸음을 떼는 아기처럼 다시 배워야 했는데 그게 쉽지가 않더라. 그 집에서 받은 교육은 아주 어릴 때부터 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노예로 만들기 위한 무지한 세뇌교육이었잖아.

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우리에게 가르친 교육은 우스꽝스러운 것들이어서 교육받았다고 말하기도 창피했고

교육 어떻게 받은 거냐고 혼나기도 했고 학습된 인성을 벗어버리느라 고생 많이 했어...





지금 내가 사는 우리 집은 어떤 집인지 알아? 일단 생활총화를 안 해서 너무 좋아! 사랑과 격려와 행복과 자유와 평등이 있는 집이야.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이 모든 것을 나 스스로 선택하며 살 수 있는 그런 집이야. 그 집에 있으면 평생 불가능한 일을 이 집에서 마음껏 하고 있어. 

그래서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에서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어. 


정은아!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할아버지와 아버지 같은 사람? 너는 그래도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누리며 살았으니 다른 세상을 만들거라 생각했어. 모든 잘못은 거짓으로 출발한 너의 할아버지와 은둔 생활하며 핵폭탄 만드느라 집안 경제를 전부 말아먹은 너의 아버지의 책임이 크니까.  너는 이 기회에 진심으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고 그 집안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사람이 될 거라 생각했거든.  너에겐 충분히 그럴 기회가 주어졌으니까!

이번엔 그 집안을 제대로 일으켜 세울 줄 알았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집으로 말이야. 네가 그 집안의 기둥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왜 아직도 가족과 형제들을 괴롭히며 그렇게 사는 거야? 

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못했던 외교도 하는 것 같더니만, 정치라는 것은 내가 잘 몰라서 너와 정치 이야기는 논할 수 없지만, 너도 말 못 할 고민은 있겠지? 많이 두렵겠지? 잃을 게 너무 많으니까. 

전 세계가 손가락질하는 우스꽝스러운 놀이와 불안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소통을 하며 살면 안되는거니?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서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소통 말이야. 

그 집에서 힘들게 살았던 누나가 너에게 하는 이 말은 동생에게 조금이라도 사람답게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야.



어떻게 살았는지 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너는 네 아이들에게 그렇게 어둡고 낙후된 못난 세상을 물려주고 싶어? 네가 살고 있는 평양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건 껍대기일뿐인데 네 인생도 과연 그렇게 영원히 화려하고 무한일까? 

세상에 무한이란 없고 모든 것은 유한이야.

아이폰도 안 터지는 가짜 세상을 그렇게 화려하게 보여준다고 과연 네가 빛날까?

세상은 넓고 평양보다 아름답고  화려하단 걸  유학파인 너는 나보다 더 잘 알겠네. 

아름다운 세상을 네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다면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생각을 해서 이제라도 세상이 주는 기회를 놓치지 말았으면 해. 이 편지가 너에게 갈까? 꼭 갔으면 좋겠다. 좀 사랍답게 살아보라고. 

돈 없는 나라에서 미사일이네 핵이네 만들면서 왜 그렇게 흥청망청 낭비벽이 심한 거야?

그러다가 또 아버지처럼 집안 경제 다 말아먹으면 어떡해? 절약하며 살아야지.

하긴 핵무기보단 그 집에 살고 있는 형제들이 알게 될 사실이 더 무서운거겠지... 


마지막으로 다이어트 좀 해! 

우리 집에선 살까기를 한다고 날린데 그 못사는 나라에서 너만 살이 쪘더구나...

스트레스가 심하겠지. 잃을게 많으니 두렵기도 할테고. 그 모든 걸 내려놓지 못하니까 만병의 근원인 비만을 초래하는거야. 담배도 많이 피더라. 담배도 좀 끊어! 

어르신들 앞에서 담배 꼬나물지 말고 건강에 안 좋은 건 다 하고 사네...

인민복을 입고 할아버지의 가면을 쓰고 가짜 삶을 살지 말고 진정한 너의 모습으로 옳은 일을 하며 이왕이면 좋은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아! 그리고 아프면 말이야 아무리 좋은 지도자 자리도 소용없어. 거짓으로 사람들을 기만하지 말고 세상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사람답게 살았으면 좋겠어.  

늦었다고 생각할때가 가장 빠른 때일수도 있고,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는 법이래...

이 편지를 네가 본다고 해도 너는 이해할까? 이만 쓸게.


                                                                                남한에 시집간 북한댁 누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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