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 「건강이 최고야」
저런 인간쓰레기.
종종 TV에서 비윤리적인 범죄 뉴스를 접한다. 나는 피해자 입장에 서서 끔찍한 일에 경악하거나, 가해자를 "저런 인간쓰레기"라고 가볍게 욕하면서 지나가는 편이다. 나와 가까운 친지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을 사람들이고, 흉악 범죄자는 나랑 완전히 다른 '인간 말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적극적으로 독자를 흉악 범죄자의 입장에 서게 하는 시가 있다. 가해자의 편을 들어 그의 범죄를 정당화한다는 게 아니다. 난데없이 독자를 공범자로 몰아세운다.
건강은
너무 건강한 건강은
건강이 너무 많아 어디다 써야 할지 모르는 건강은
겨울에도 반팔 입고 조깅하고 찬물로 샤워하는 건강은
몸에 좋다는 것 찾아 먹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건강은
음모처럼 막무가내로 돋아나 아무때나 아무데서나 뜨거워지는 건강은
범행을 완강히 부인해왔다. 그러나 경찰이 렌터카에 묻어 있는 두 어린이의 혈흔을 확인하고 범행동기를 추궁하자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운전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에서 혼자 두 병 넘게 먹은 것 같다"고 진술을 번복했다가 다음날 다시 말을 바꾸어 "술에 취해 차를 몰고 가다가 아이들이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데 반항해서 죽였다"고 범행을 일부 시인했다. 사건 초기 탐문수사에서도 경찰은 다세대주택 반지하방에서 건강을 검문한 적이 있었으나 너무 건강해서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영계의 흰 넓적다리 속에 삽입되는 순간 발기되는 이빨, 부드러운 근육의 탄력으로 이빨을 조여오는 육질. 쫄깃쫄깃하게 저항하다가 뜯겨지는 난폭한 뿌리들. 끈적끈적하게 분비되는 침들. 맛의 오르가슴을 느끼고 부르르 떠는 엄지발가락. 혀를 꽉 껴안고 전율하는 닭살.) 으으, 먹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 핫크리스피 치킨!
아, 잠깐, 잠깐만. 건강이 막 나오려고 그래. 아으, 참을 수가 없어. 가만히 좀 있어봐. 쌀 것 같단 말이야.
얘들아, 학원 갔다 이제 오는구나. 이 귀여운 얼굴로 몇시간 동안 칠판만 쳐다봤니? 건강도 생각해야지. 이 아저씨는 너무 건강해서 미치겠구나. 텔레비전에서 광고하는 핫크리스피 건강 알지? 한 마리 사줄게 따라올래?
― 김기택 시집 『껌』 (2009), 창비
'건강'의 이름은 왜 건강일까
'건강' 이 사람, 여러모로 낯설지 않다. 활력이 유별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자기 몸보신에 힘쓰는, 어디서 많이 본 유형의 사람이다. "아무때나 아무데서나 뜨거워지는" 인체의 신비에 당혹감을 느껴 본 남성이라면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는 '건강'이다. 또한 2연의 '건강'도 익숙함의 결이 다를 뿐 역시 어디서 많이 봤다. 술을 빌미로 범행을 부인하고 감형을 받으려는(과거에 실제로 받았던) 사람이 좀 많았던가.
단순히 익숙하다고 느낀 '건강'이 3연에서는 내 몸에서 일어난다. 아동 성폭행의 현장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치킨의 맛으로 다가와 배덕감이 들지만…, 끔찍해야 할 현장이 왜 이리 맛있게 느껴지는가. 알맞게 염지된 닭의 짭조름한 육즙과 오르가슴의 쾌감이 교차한다. 자극으로 가득한 치킨 광고를 보며 영계의 기구한 사연을 생각하지 않듯, 범죄 현장의 심각성이 내 사정일까. '건강'도, 광고 속 인물도, 그리고 나도 현장을 맛있게 먹어 지'웠다.
악의적인 편집이랄까, 인간말종 범죄자 '건강'을 (남성의) 혈기왕성한 건강으로 그린 설정이 불쾌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악의적인 편집 덕분에 저 인간쓰레기가 나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를 다 읽고 당황스러웠던 건 불쾌한 이 시보다, 흥분감이 남아 있는 나 자신이었다.
특정 환경에 놓이지 않은 주제에 '나는 누구도 해치지 않았다'며 그간 얼마나 자신 있게 나와 범죄는 무관하다 생각했는지. 시인이 '건강'의 범죄를 특정 인물의 고유한 특성(가정환경, 질환 등)에 기인한 것으로 그리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다. 「건강이 최고야」는 내 도덕적인 오만함을 되돌아보게 한다. 친자식을 끔찍하게 살해한 메데이아를 희대의 악녀라고 욕하지만, 막상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를 읽으면 배신한 배우자에게 최대의 복수를 안길 궁리를 함께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듯이 말이다. (구체적인 맥락은 다르지만) 악인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고 평범하다는 한나 아렌트의 통찰이 새삼 와닿는다.
가해자-되기가 부과하는 위기
여성이라서, 아니면 정말 성욕과 무관하다고 해서 「건강이 최고야」를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입을 가진 인간의 본질적인 폭력성을 겨냥하는 시집 『껌』의 의미 맥락이 「건강이 최고야」에도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식재료에 대한 감사함 없이 치킨을 유린하거나, 그 결과 영정사진 인증샷이 된 먹스타그램·먹방을 보며 닭의 생명을 짓밟지 않았는지> 시가 내게 묻는다.
치킨은 보통 대량 밀식 사육 환경에서 한 달 남짓 자란 영계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치킨을 먹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러나저러나 공장제 축산 시스템에서 길러진 닭의 죽음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다. 치킨을 한없이 먹든, 줄이든 모두 사회윤리적으로 비난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러나 포르노라 할 만큼 탐욕을 부추기는 자극이 범람하는 오늘날, 내가 함께 맛있게 먹어 지'우기만 했을 그네들의 사정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상 조회수 1이 리벤지 포르노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지 모르듯, 책임 없는 소비가 의도치 않은 비윤리와 폭력을 낳는 경우의 수가 얼마나 많을까.
자신을 잠재적 가해자의 지점에 두어 보고 행위의 결과를 따져볼 때 자신의 윤리를 계발할 여지가 생긴다. 그것이 '가해자-되기'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위기고, 그래서 남기는 기회가 아닐까. 피해자에게만 마음을 투사하다 보니 자신을 점검하는 일을 한동안 잊었었다.
*상단 표제 이미지는 네이버 블로거 라나(http://blog.naver.com/1000salang)님께 동의를 구하고 편집한 것으로 원 이미지 저작권은 라나님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