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T가 돼버린 (전) F의 감상성 되돌아보기
오늘은 24년 5월 15일 수요일. 부처님 오신 날로 쉬는 날이다. 종교적인 신앙은 없지만 5월 15일만 되면 부처님께 일말의 신앙이 드러나곤 한다. "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빨간 날에도 사무실에서 배달의 민족으로 뭘 시킬까 고민하는 동료들이 있지만, 나는 감사하게도 쉴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2024년 서울의 하늘은 휴일만 되면 비를 내리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어린이날 연휴 때에도 침침한 하늘로 인사하더니 오늘도 밤까지 그칠 여지도 안 주고 내려대는 탓에 집 근처에서 여유를 부리기로 결심했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생맥주를 시켜서 저녁에 나의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낮잠을 푹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저녁에는 생활맥주의 4.5도 레드 라거 2캔을 사 와서 집에 있는 맥주잔에 따른다. 20살에 호프집 알바를 한 덕에 잔에 맥주를 따를 때 거품 30%, 맥주 70%의 완벽한 비율로 잔에 따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돈을 벌려고 한 20대 초반의 3개월 경력이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잠깐의 여유를 가지며 다시 책상에 앉았다. 딱히 할 일은 없다. 아니, 할 일이 있지만 굳이 지금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있다. 의식적으로 여유를 즐기고자 자리에 앉아 나라는 사람의 감상성을 되뇌어본다.
사람의 특성을 논할 때도 이성적인지 감성적인지로 나누지만 나는 왜인지 감성적이다라는 표현이 썩 좋은 의미를 내포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지나치게 감성적'인 사람들의 극단적인 사례를 미디어에서 많이 노출하기도 하고, "감성적인 사람들은 이성적이지 않다"라는 주장들이 생각나서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감성적이다라는 표현보단 감상적이라는 말을 택하겠다. '감성적'이라는 것은 사람의 특성 자체를 나타내는 말 같지만 '감상적'이라는 말은 사람의 감성 역량을 나타내는 말 같기도 해서이다.
나는 감상적인가? 사전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생각을 하던 찰나 "사전적 의미"를 들먹이는 것도 감상적이지 않은 것 같아 포기했다. 내가 생각하는 "감상적인 사람"의 정의를 해보자면 "어떤 상황에 직면하거나 콘텐츠를 볼 때 자신만의 생각과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 그런 면에서 점점 더 감상적이지 않아지는 나를 느끼지만 감상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느끼는 "감상성"의 크기만큼 내 삶의 감상이 커질 수 다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내 삶의 가치는 내가 부여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삶의 패턴은 단순하게 바뀌어간다. 일하고, 퇴근하고, 가끔씩 운동하고, 연애를 하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나름의 최선이 있기에 큰 불만은 없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다."라는 기준과 그 기준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면 된다. 그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는 나의 감상이 내 삶의 만족을 더 커지게 한다.
2024년은 어찌 보면 나에게 역사적인 날이다. MBTI의 정체성이 ENTJ로 바뀐 해이기 때문이다. 이전 4년 동안은 ENFJ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ENTJ라는 결과가 나올 때부터 내가 생각하는 나의 기질도 약간씩은 바뀌기 시작했다. 객관적인 결과로 증명되었기 때문일까. MBTI가 한 사람의 기질을 판단하진 않지만 그 사람이 생각하는 판단 근거의 척도는 될 수 있기에 좋은 기질의 단서가 된다는 것은 믿고 있다.
ENTJ로 결과가 나오고 나서 스스로 생각해 본 변경점은 몇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로는 더 이상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웃지 않았다. 예전에는 내가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조심스러워했지만 이젠 불편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나의 불편함을 드러낸다. 불편한 상황에서 불편해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불편해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생각에 근거한 행동이다.
또한 나의 감상력은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대할 때만 발동하기 시작했다. 일을 오래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를 줄이기 위한 방어기제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변화를 썩 나쁘지 않게 판단했다. 지금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과 고민들이 있을 텐데 그 모든 사건에 나의 에너지를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조금은 편해졌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주변 사람들과 내 삶에 있어서는 감상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감상의 순간이 적어졌다곤 해도 나의 삶을 때론 감상해야 하고,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의 순간들도 감상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예전엔 넓고 얕게 감상적이었다면 지금은 좁고 간간히 감상적인 사람이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의 감상력을 잃지 않으려 나의 휴일에 내 감상력을 감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