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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철 Jan 13. 2019

<브라질 팔도유람>  
05.1 남부지방

이민세대와 가호필랴

이민세대와 가호필랴


브라질은 예전부터 전 세계의 축구선수 공급처였다. 어느 나라건 축구 클럽이 있다면 브라질 선수는 예외 없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축구 클럽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브라질식 바비큐를 만드는 사람인 슈하스케이루 역시 전 세계의 브라질 슈하스코 식당으로 진출해있다. 그 외에도 브라질 사람의 해외 진출이 가장 많은 분야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델이다. 브라질 미녀들과 모델 등은 패션쇼의 런웨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광고, 케이블티브이, 홈쇼핑 등을 장악해 왔다.

유명 모델 등의 사진은 인터넷을 통해서 전 세계 남자와 여자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이런 사진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몸에 대해 바램을 자극한다. 이 바램은 패션뿐만 아니라 미디어, 의료, 식품 등의 거대 시장을 만들고 세계는 그에 대해 비싼 몸값을 지불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은 다이어트란 말로 귀결된다.

이런 비싼 몸값 중의 상위 모델들은 지젤 번천이나 알레산드라 암브로지우, 아드리아나 리마 같은 브라질 모델들이 차지했다. 

보통 미국 출신의 모델을 미국 모델이나 중국 출신의 모델을 중국 모델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특히나 브라질 출신의 모델을 브라질 모델이라고 많이 부르는 이유는 그 수도 워낙 많이 있기도 하겠지만 브라질 모델이라면 딱 떠오려 지는 이미지가 강렬하기 때문이다.

브라질 모델들 특유의 매력은 무엇보다 글래머스한 건강미에 있다. 보통 늘씬한 모델이라는 표현처럼 마른 체형 -그것이 너무 지나쳐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던 마른 것-보다 브라질 모델들은 건강이 넘쳐 보이고 탄력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특히나 비키니, 란제리 등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또한, 혼혈의 매혹이 있다. 백인 같지만 그렇지도 않고 흑인이지도 않은 그들만이 이국적인 피부색, 특히나 다양한 색의 눈, 그리고 강렬하면서 매혹적인 표정은 사람의 마음을 아득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브라질 모델들은 섹시함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래서 섹시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브라질이 떠올리게 되고 브라질은 섹시한 나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전 세계의 모델 계를 이끄는 브라질 모델들은 브라질 내에서도 유난히 남부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브라질 남부인 히우그란지두술, 산타 카탈리나, 파라나 출신들이 브라질 모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나 히우그란지두술 출신은 70%가 넘는다.

산타 카탈리나는 예전부터 브라질 내에서 미녀의 동네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산타 카타리나의 여자들은 서슴지 않고 자신이 산타 카타리나 출신이라고 말한다.

상황이 이 정도면 이런 동네에 가면 길거리가 스트릿이 아닌 런웨이가 아닐까 하는 환상을 가져 볼 만하기도 하다. 

유난히 모델이나 미녀들이 남부지역에 많은 이유는 이곳에서 유럽의 이민자들이 정착을 해왔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이민 와서 브라질의 문화에서 정착한 후손들이 있고, 또한 인디오, 아프리카계의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자연스럽게 섞이면서 혼혈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브라질 남부는 세계 패션을 이끄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보다 친근하면서도 이색적인 주목을 확실하게 받았다.


19세기 중반부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많은 유럽 사람들이 브라질로 향해 이민을 오기 시작했다. 이 이민자들은 그나마 자신의 살던 곳과 기후와 풍토가 비슷한 남부에 정착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소를 키우는 목축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들을 카우보이의 의미인 가우슈라 불렀다.

브라질의 남부 특히 히우그란지두술 지역은 특수한 지역이었다. 과거 브라질의 중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리우 데 자네이루나 미나스 제라이스의 중서부 지역이나 바이아나 페르남부쿠인 북동부 지역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단지 거리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정치적인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가우슈는 지리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오히려 라플라타강 지역인 우루과이나 아르헨티나에 더욱 긴밀함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부터 남부 지방의 히우그란지두술 사람들은 무척 독립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브라질 사람이지만 그 안에는 히우그란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속에는 강인한 가우슈 문화가 깔려있다.

실제로 이 히우그란지두술을 상징하는 주의 깃발을 보면 1835년 구월 이십일. 히우그란지 공화국이라고 쓰여 있다.

히우그란지두술은 파호필랴 혁명, 혹은 파하푸스 전쟁을 통해서 브라질에서 독립해서 그들의 공화국을 만들었다. 

파호푸스는 누더기를 입은 사람을 뜻한다. 이것은 전쟁 중에 상대편 진영에서 그들은 비하하기 위해서 부르던 이름이었다.

이들이 전쟁 혹은 독립을 일으킨 것은 중앙정부의 불만이 있었다. 히우그란지두술 지역의 경제를 지탱하는 것은 목축업과 밀 농사였다. 특히 노새를 기르고 샤르끼(charque)라 불리는 육포를 생산하였다. 

노새는 주로 운송수단에 사용되었는데 철도운송이 시작되자 시들해졌다. 남부 지방에는 밀 농사도 지었는데, 밀 농사 역시 미국에서 밀수입이 시작되자 경쟁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하지만 육포는 거의 남부 지방에서 거의 독점적인 위치에서 생산이 되었다. 그래서 수입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한편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육포가 브라질로 유입이 되면서 육포를 생산하는 업자는 손실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들은 중앙 왕정에 세금 감면을 요구했지만, 그것은 무시되었다. 당시는 왕정 시대였고 왕정파와 공화파의 의견 대립이 심하던 때였는데 중앙 왕정이 무시는 지역의 왕정파와 공화파 모두에게 중앙 왕정을 반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불만이 가득해진 히우그란지두술의 가우슈 들은 벤토 곤살베스가 리더가 되어서 주도인 포르투 알레그레까지 그들의 불만을 표현하는 행진을 시작하였다. 그때가 1835년 9월 20일이었고 이것을 시발점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파호필랴 혁명이었고 그들은 히우그란지 공화국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벤투 곤살베스는 이 가우슈의 공화국의 첫 대통령이 되었다.

이 전쟁은 브라질 역사상 가장 긴 전쟁으로 기록이 되는데 그것은 10년이나 지속이 되었다.

결국, 마침내 브라질 중앙정부와 협상을 통해서 평화협정을 맺고 히우그란지 공화국은 브라질로 다시 돌아갔다.

이 파호필랴 혁명은 가우슈 문화의 신화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가우슈 사람들의 모든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들의 전통 그리고 그들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9월 20일은 가우쇼들에 가장 중요한 날이 되었다. 가우슈 들은 그날의 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매년 하고 있고 그들은 그들의 전통에 대해 자부심과 자신의 땅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고 있다.


<전형적인 가우슈 복장을 입고 가호필랴 축제 때 행진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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