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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철 Jan 13. 2019

<브라질 팔도유람>  
08.1 노데스치(북동부 지방)

토르데시야스 그리고 네덜란드

토르데시야스 그리고 네덜란드


내가 아는 한 친구는 브라질 여행을 계획하면서 언어도 역시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브라질 여행을 준비하면서 스페인어를 공부하였다. 그래서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고 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알아, 그런데 이왕 공부하는 거 스페인어가 나을 것 같아. 브라질만 포르투갈 쓰고 다른 라틴국가는 스페인어를 쓰니깐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것이 좀 나을 것 같아.”

많은 사람이 브라질로 여행을 가면서 포르투갈 습득하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는 다른 중남미 국가는 거의 모두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데 유독 브라질만 포르투갈어 쓴다는 점이다.

그것은 히스패닉이라는 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보통 라티노를 일컫는 말 히스패닉의 의미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라티노는 일반적으로 라틴아메리카 출신을 의미한다. 

그러니깐 브라질 사람은 라티노라고 불리지만 히스패닉은 아닌 셈이다.

왜 유독 브라질만 포르투갈어를 쓰는 이유는 간단히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기 때문이고 다른 국가는 스페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역시 콜럼버스에서 시작이 된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어느 나라보다 빨리 탐험하고 브라질까지 도착해서 식민지로 삼았던 원동력은 바다로 향한 집중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유럽 내륙에서의 경쟁보다는 자신의 앞마당에 펼쳐진 바다를 개척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조건이었다.

이미 항해의 왕자, 마린보이라고 불릴만한 엔리케 왕자부터 솔선해서 바다의 항로를 개척했다. 그는 유럽을 벗어나 남쪽의 아프리카까지 진출했고 새로운 세상의 탐험을 계속했다. 당시의 아프리카 북서부의 카나리아 제도 남쪽 보자도르 곶은 일종에 악마의 바다였다. 딱 거기까지 사람들이 갈 수 있는 한계점이었다. 이곳은 암초가 많고 수심도 낮아서 통과한 배들은 없었다. 바다의 여신 세링냐의 이야기부터 괴물의 이야기까지 수많은 전설과 카더라가 난무하는 공포의 바다였다.

하지만 바다의 왕자 엔리케는 이곳을 통과해서 그의 신화를 써나갔다. 이런 탐험으로 당시 세계의 왕인 교황 마르티누스 5세에게 보자도르 곶 이남의 항해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런 배경으로 아프리카를 탐험할 수 있게 했고 후의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탐험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야망 넘치는 모험가, 한몫 잡고 싶은 사람들, 일하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탐험과 모험을 위해 리스본에 모여들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은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콜럼버스 역시 그 속에 있었다. 그는 여자와 아이 빼고 전국의 재단사까지 모두 리스본 항구에 모여들었다고 불평을 해대었다. 그들의 신기루는 바로 인도였다. 인도는 후추의 땅이며 황금과 귀금속의 땅이었다. 인도에 다녀온다는 것은 아주 커다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서쪽 대서양을 직진해서 건너가면 가장 빠르게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지금처럼 펀딩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는 포르투갈의 국왕에게 후원을 요청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포르투갈 국왕은 외국인인 그에게 –그의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후원을 해주는 것을 꺼렸다.

또한, 포르투갈이 그동안 개척한 아프리카를 지나가는 해로를 무시하고 직접 대서양을 지나가는 그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 1세의 후원으로 출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1492년 이 출정으로 서인도 제도의 바하마 섬을 발견하고 돌아온다. 

콜럼버스는 본인이 그곳이 정말 인도로 알았든지 아니면 그동안의 큰소리를 친 것 때문에 더 큰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인지는 본인만이 알겠지만, 큰소리로 세상에다 자신이 인도로 가는 새로운 바닷길을 열었노라고 부르짖었다. 그의 큰 외침 혹은 우김으로 인해서 세상은 여전히 인도와는 너무나 먼 그곳을 서인도라고 부르고 있다.

어쨌든 그는 귀국의 길에 자신에게 후원을 거부했던 포르투갈에 들러서 얄밉게도 자신을 무용담의 입방정을 떨었다. 그리고 스페인으로 의기양양하게 귀국하였다.

포르투갈로서는 배가 아플 만도 했다. 

즉각 포르투갈은 예전에 교황 마르티누스 5세가 선언해 준 포르투갈 독점권을 내세워 그 ‘보자도르 곶 이남은 우리 땅’이고 주장했다. 

그리고 스페인은 당시 스페인 출신으로 암흑의 핵심이라고 불릴만한 교황, 알렉산드로 6세를 꼬드겨서 ‘알렉산드르 6세 칙령’을 발표했다. 내용은 유럽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카보 베르지 섬에서 경도(세로) 100 리그 (약 450km)을 기준으로 서쪽은 스페인 땅 동쪽은 포르투갈 땅이라고 선언했다.

서로의 주장은 양보할 수 없었고 일촉즉발의 분위기까지 형성되었다. 결국, 100 레구아의 거리는 350 레구아로 바뀌는 선에서 서로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스페인의 한 마을인 토르데시아스에서 맺어져서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라 불린다.

이로 인해서 콜럼버스가 도착한 서인도 제도는 스페인의 땅이 되었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동쪽으로 가는 인도를 보장받았다.

이 조약으로 인해서 전반적인 라틴아메리카는 스페인령이, 그리고 지금의 브라질은 포르투갈령이 되었다.

이 조약은 1494년에 맺었고 그 뒤 6년 후에 브라질은 포르투갈에 의해서 발견이 된다.

스페인과 교황의 칙령을 포르투갈이 그토록 반대한 이유는 이미 브라질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포르투갈의 왕궁 문서 보관 서에 저장되어있던 기밀기록이 모두 유실되어서 브라질 발견과 이 조약에 관한 진실은 저 너머로 가버렸다.

만일 알렉산드로 6세의 칙령 혹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지도가 유지되었다면 현재의 북동부 지역만이 혹은 남서부 일부 지역만이 브라질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토르데시아스 선은 유명무실해진다.

사실 이 토르데시아스 선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가 자기들끼리 멋대로 세계를 양분하는 협정을 만든 셈이고 그것을 교황이 인정해준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나라들인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는 이 협정에 콧방귀를 끼었고 무시해버렸다. 

교황이 그것을 인정했다고 하나 종교개혁 이후로 교황의 권위는 많이 추락해 있었다. 사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승인한 교황 알렉산드로 6세부터 타락하고 악당 같은 교황들이 가톨릭을 암흑의 시대로 만들어버렸고 종교개혁이 나온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1세는 아프리카 원정 중에 전사하였다. 그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의 왕을 계승할 대가 끊겨버렸다. 궁여지책 속에 스페인 왕 필리페 2세가 과거 혼인 동맹으로 인한 포르투갈 왕정의 피가 있다는 근거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이 되고, 이 두 나라는 이베리아 동군연합이란 이름으로 합쳐진다. 그리고 이 동군연합으로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된다.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국과 포르투갈 식민지국은 애매해졌다. 양국이 합쳐진 마당에 토르데시아스 선은 별 의미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브라질은 이 당시 애매해진 토르데시아스 선을 무시하고 서쪽으로 많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국제적인 관계도 변화가 있었다. 특히 과거부터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과는 우호적이었으나 스페인과는 대립적이었다. 결국, 스페인과의 동군연합은 네덜란드와 대립적인 관계가 되어버렸다.


네덜란드는 결국 브라질을 침략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이미 설탕 산업과 노예무역에서 경쟁적인 관계였다.

1604년 네덜란드는 바이아를 침략하고 점령해버렸다. 그리고 근 1년간 점령했다.

네덜란드는 북동부의 페르남부쿠 지역을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점령하고 또한 많은 영향을 미친다.

1630년 올린다의 정복으로 1637년까지 이 지역에서 네덜란드와 계속 전쟁이 펼쳐진다.

그 뒤 1637년부터 1644년까지 평화로운 시기였는데 당시는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반 나사우가 페르남부쿠 지역을 통치했다.

그리고 다시 1645년에서 1654년까지 북동부 지역을 재정복 하였다.

네덜란드의 지배는 포르투갈의 지배와 다른 분위기를 가져왔다.

특히 마우리츠 반 나사우의 북동부 시절의 통치는 남달랐다. 

포르투갈은 탐험하고 부수고 정복하고 착취했다고 하면 네덜란드는 비즈니스의 개념을 가져왔다. 여러 농장을 매각하고 또한 다양한 인종의 관용을 가져왔다. 또한, 다른 인종과의 결혼에 대해서도 관대하였다.

그저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닌 결혼 즉 가정을 이루는 것을 장려했다. 다양한 인종들의 다양한 문화에 호의적이었고 예술가나 문인들의 방문에 좋아했다.

당시의 가톨릭 시대의 유대인들은 천시받는 백인이었지만 나사우는 유대인에게도 관대했다. 유대인들은 탄압으로 인해서 그들의 유대교를 비밀스럽게 믿었지만, 북동부에 이주한 네덜란드 유대인은 공개적으로 유대교를 믿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사는 많은 유대인이 북동부로 건너왔다. 하지만 이 유대인들은 네덜란드가 브라질에서 퇴각할 때 함께 브라질로 떠났다. 이 유대인들은 수리남, 자메이카, 미국의 뉴욕으로 떠났다.

당시 이들은 맨해튼 섬을 인디오에게 헐값에 사 지금의 뉴욕을 기원이 되었다. 당시의 뉴욕의 이름은 뉴암스테르담이었다.

이런 이유로 브라질의 북동부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문화적으로 혹은 인종적으로 조금은 다른 양식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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