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복철 Jan 13. 2019

<브라질 팔도유람>  
08.3 노데스치(북동부 지방)

세땅, 람피엉 루이즈 곤자가

많은 브라질 사람들은 노데스치라고 불리는 북동부 지역이 진짜 브라질이라고 말한다. 노데스치는 문화적으로 정말 풍성함이 넘치는 지역이다.

노데스치라고 불리는 북동부 지역은 브라질 지도에서 보면 북동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역을 말한다. 노데스치란 말은 말 그대로 북쪽을 의미하는 Norte와 동쪽을 의미하는 Este가 합쳐서 북동부인 Nordeste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출신의 사람들을 노데스치노라고 부른다. 

이 노데스치에 속한 지역은 페르남부쿠, 바이아, 세르지피, 알라고아스, 파라이바, 히우그란지노르치, 세아라, 피아우이, 마라냥이 속한 지역이다. 이곳은 특유의 노데스치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반골적인 분위기가 강해서 반란과 외세에 대한 전쟁도 잦던 지역이었다.


이런 노데스치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말은 바로 세땅이다. 세땅은 척박한 땅, 황무지를 의미하는데 이 세땅 만큼이 극적이고 민중적인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이 아무것도 없는 땅, 살기에 척박한 땅, 세땅이 개척되기 시작한 이유는 바로 가축이 사육되면서였다.

처음이 가축이 사육된 것은 사탕수수 농장 주변이었는데 당시 주된 산업이었던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서 비옥한 토지는 사탕수수 재배가 독점하였다. 그리고 1701년 포르투갈 당국은 가장 비옥한 지대로 알려진 해안으로 80Km 이내 지역에서는 가축 농장 등을 설립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했다. 

사탕수수 농업은 대부호, 대지주 등 가장 힘이 있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북동부 사람은 내부의 오지로 가서 새로운 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세땅의 개척은 정말 거친 작업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북동부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강하고 거친 마초의 기질과 끈질긴 기질이 타고 흐른다.


세땅은 그야말로 비가 잘 오지 않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 가뭄이 심하면 노데스치노들은 생존을 위해 자신들의 터전인 세땅을 등져야 했다. 그들은 마치 화전민처럼 다른 땅에 가서 땅을 일구던가 아니면 멀리 도시로 떠나야 했다.

‘파우 지 아라라’ 란 운송수단은 그들에게 마지막 탈출구였다. 트럭을 개조해서 만들어진, 말하자면 트럭 버스였다. 이 트럭 버스는 사람들은 짐칸에 실리다시피 했다. 이 운송수단으로 많은 노데스치노들은 고향을 등졌다. 며칠 밤낮의 거친 여정을 해가며 그들은 대도시로 생존을 위해서 떠났다.

그들은 리우 데 자네이루나 상파울루 같은 대도시로 가서 달동네에 살면서 새로운 희망을 이어 나갔다. 브라질리아가 건설될 때에는 많은 북동부의 사람들은 그곳에 가서 브라질의 새 수도를 건설했다. 


이렇게 고향을 등지는 아픔과 고향에 대해 그리움은 수많은 노래를 만들어냈다. 이런 수많은 노래는 비단 북동부 지방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브라질 사람들의 정서에 호소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브라질 사람들은 모두 고향에서 떠나온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유럽에서 아프리카에서 아니면 원래 자신의 땅에서 떠나 이곳에서 정착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브라질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사우다지, 그리움에 대한 정서가 아주 강하다. 그리움만으로 해석이 되지 않은 사우다지는 브라질의 가장 특별한 정서이다. 우리도 우리만의 특별한 정서로 '한' 정서가 있듯이 말이다. 마치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질 못했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아리랑 고개를 구슬프게 넘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아사 브랑카는 브라질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한 노래이다. 브라질을 대표하는 노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사 브랑카는 직역을 하면 하얀 날개란 뜻이지만 비둘기 종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노래는 고향을 등지는 노데스치노의 그리움, 즉 사우다지를 노래하고 있다. ‘바이앙의 왕' 루이즈 곤자가가 만들고 노래했다. 


루이즈 곤자가의 페르남부쿠의 세땅 지역인 에슈, Exu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장터에서 장돌뱅이들의 아코디언 연주를 보고 나서 곧바로 이 악기와 음악에 매료되었다. 북동부에서 여러 시골의 장터 돌아다니면서 연주를 하는 집시들이 많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동네 지주의 딸과 사람에 빠졌는데 그녀는 공주님 같은 백인이었고 루이즈 곤자가는 흑인 혼혈이었다. 결국, 그 사랑은 들켜버리고 동네 지주의 위협으로 그는 사랑을 잃고 그리운 고향에서 도망을 가야 했다. 그는 군대로 입대를 해버렸다. 군 생활을 마치고 그는 당시 수도인 리우 데 자네이루로 갔다. 그는 리오에서 떠돌아다니면서 아코디언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북동부 세땅의 장터를 떠돌아다니는 집시 음악인 같은 밴드를 조직했다. 이 밴드에서 그는 노래와 아코디언을 연주했고 트라이앵글 연주자 그리고 자붐바라고 불리는 큰북 연주자 이렇게 3인조 편성의 밴드였는데 그것은 일반적인 바이앙 음악의 기본이 되었다.

그의 음악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대 히트를 차지했다. 그 당시는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였다. 

지금처럼 대중 매체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북동부 음악은 남서부의 리우 데 자네이루와 상파울루서는 완전히 새로운 음악이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눈물을 흘리는 팬들이 있었는데 바로 북동부에서 먹고살기 위해 리오로 온 노데스치노들이였다. 그들에게 루이즈 곤자가의 음악은 고향이고 사우다지(그리움)였다.

그것을 발판으로 리오에서 시작된 그의 음악 열풍은 모든 브라질을 뒤흔들었다. 당시 모든 레코드 공장은 모두 그의 앨범을 찍어내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레코드 공장에까지 가서 찍어야 했다. 

바이아 음악은 크게 바이앙, 샤샤두, 쇼치, 포호 등으로 세분되기도 한다. 이 음악에 맞추어 사람들은 살사 같은 커플 댄스로 춤을 추는 데 이 춤을 통틀어 포호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포호는 원래 오리지널인 북동부 사람뿐 아니라 브라질 사람들에게 가장 일반적인 사교춤이 되었다.


그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별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 아들도 음악을 하기를 원했고 집을 나갔다. 결국, 아버지와 의절을 한 그는 아버지의 후광 없이 혼자서 파벨라에서 살면서 음악을 계속했다.

그리고 혼자의 힘으로 음악인으로서의 성공과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가 70년대와 80년대 브라질 대중음악의 아주 중요한 싱어송라이터인 곤자깅냐이다. 그는 여러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노래 '무엇일까 무엇일까?'란 브라질 사람들의 최고의 애창곡 중에 하나이다.

당시 최고의 가수인 곤자깅냐는 후에 그의 공연에 아버지를 불러서 그들의 삶 같은 ‘여행자의 삶’이란 노래를 부르며 화해를 한다. 


루이즈 곤자가는 바이앙의 왕을 넘어선 브라질 민중 음악의 선구자이다. 왜냐하면, 진정 그의 음악을 통해서 브라질 사람들은 삶의 고단을 달랬기 때문이다. 

루이즈 곤자가는 항상 세땅 지역의 전통의 의상을 입고 공연을 했다. 그것은 가죽 의상으로 반원 모양의 모자, 샌들, 코트, 가죽 바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런데 이 옷은 사실은 강가세이루라고 불리는 북동부의 도적들이 입던 옷이었다.

바로 가시가 많은 선인장 같은 관목이 즐비하고 작은 돌길이 많은 세땅에 이동에 쉽고 자신들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개발된 일종의 군복이었다. 그들은 목축이 성행한 지역에 특성에 따라 가죽으로 이런 옷을 입었고 이 옷은 강가세이루(도적)의 상징이 되었다. 강가세이루 중에서 가장 유명한 람피엉이 이 옷을 개발하였다.


람피엉은 브라질의 로빈 후드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브라질에서 가장 무서운 도적이었지만 그래도 부자, 정치인, 지역유지를 털어서 가난한 사람을 많이 도와주었다. 

그는 20세기 초반에 가장 이름을 날리던 도적이었다. 당시 많은 북동부의 민중들은 대부분 가난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강가세이루를 동경하기도 했고 람피엉이 곧바로 전설이 되었다. 

람피엉은 페르남부쿠에 테하 탈랴다란 곳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공예품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는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책을 읽기 위한 안경을 썼는데 그것은 흔치 않은 것이었고 사실 도적의 이미지와도 맞지 않았다. 그의 사진을 보면 정말 구한말의 지식인처럼 보인다. 람피엉은 램프란 뜻인데 그것은 그가 총을 연달아서 정말 빨리 쏘기 때문이었다. 그가 총을 쏘는 속도는 정말 무하마드 알리가 속사포 같은 펀치를 날리는 것보다 더 빨랐다. 특히 밤에 그가 총을 쏘는 것을 보면 계속 쏘는 총의 불빛이 너무 빨라서 마치 램프처럼 빛이 난다고 해서 람피엉이 되었다. 그에 관한 수많은 전설과 이야기 그리고 소문들이 만들어졌다.

우는 아이들도 람피엉이 온다면 울음을 딱 그쳤다. 헤펜치스타(헤펜치를 하는 사람)같은 이야기꾼들은 '지옥에서 돌아온 람피엉' 같은 람피엉 시리즈를 끊임없이 꼬데우로 만들어냈다. 람피엉은 꼬데우의 단골 소재였고 그가 주인공인 꼬데우는 언제나 베스트셀러였다. 


<람피엉, 코리스코등 전설적인 강가세이루를 주제로 한 꼬데우>

그가 강가세이루가 된 것은 21살 때였는데 바로 아버지가 토지 분쟁에 얽혔고, 결국에는 경찰에 의해서 사망하면서부터이다. 그와 다른 형제는 복수를 결심하고 그 길로 강가세이루가 되었다.

그는 마리아 보니따란 여인과 1930년대 사랑을 나누었고 평생을 함께했다. 마리아 보니따 역시 다른 강가세이루처럼 입고 총을 쏘며 똑같이 활동하였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람피언은 당시 북동부의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시세로 신부의 신봉자였는데 시세로 신부는 북동부의 신앙의 성인이었고, 람피엉은 대중에게 선의를 가지고 있는 악의 화신이었다. 이들은 시세루 신부가 있던 주아제이루 노르치에서 한번 만났다.

신출귀몰한 무용담과 대담한 약탈 등을 계속했지만 결국 그는 1938년 6월 28일 새벽, 세르지피에 있는 비밀 은신처에서 경찰의 습격으로 저항도 못 해보고 사망했다. 당시는 30명에서 40명의 강가세이루가 잠을 자고 있었다. 경찰은 당시 최신의 무기인 기관총을 앞세워서 강가세이루를 끝내버렸다. 아마 누군가가 밀고를 한 것이다. 

람피엉과 마리아 그리고 많은 강가세이루가 참수를 당했고 그의 목은 전시가 되었다. 경찰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또 다른 전설을 없애고자 했다.

람피엉은 그렇게 그의 전설은 끝이 났다. 랑피엉은 도적이지만 여전히 브라질에서는 의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여전히 북동부의 이야기, 영화, 노래 그리고 카니발이 되면 살아 돌아와 여전히 사람들에게 북동부의 세땅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땅의 사람들>


작가의 이전글 <브라질 팔도유람>   08.2 노데스치(북동부 지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