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2조(특정물의 현상인도) 특정물의 인도가 채권의 목적인 때에는 채무자는 이행기의 현상대로 그 물건을 인도하여야 한다.
제462조는 채권의 목적이 '특정물의 인도'인 경우를 규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채무자는 이행기의 현상(채무 이행을 하는 시점에서의 상태)대로 그 물건을 인도하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예전에 특정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던 바 있습니다. 특정물은 당사자가 물건의 개성을 중요하게 보고 대체할 수 없게 정한 물건을 말합니다. 특정물의 개념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대체될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의사(意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특정물≠부대체물). 이 부분이 기억이 잘 안 나는 분들은 제374조 파트를 복습하고 오셔도 좋습니다. 특정물인도채권의 경우, 채무자가 물건을 인도하기 전까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 보존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공부하였던 적 있습니다.
제374조(특정물인도채무자의 선관의무) 특정물의 인도가 채권의 목적인 때에는 채무자는 그 물건을 인도하기까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 보존하여야 한다.
제462조가 특히 문제 되는 것은 계약체결과 채무이행의 시점이 다를 때입니다. 예를 들어 철수가 지나가다 영희가 직접 만든 만년필을 보고, 그 자리에서 돈을 주고 만년필을 산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요. 영희는 그냥 만년필을 철수에게 건네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철수가 만년필을 사기로 계약은 했는데, 물건을 며칠 뒤에 받기로 하면 어떻게 될까요? 며칠 뒤에 영희가 만년필을 보내려고 보니, 계약을 하던 시점보다는 펜이 좀 닳아 있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철수는 영희가 직접 만든 그 만년필을 사려고 했던 것이므로, 만년필이 조금 닳았다고 하여 시중에 파는 다른 만년필로 대체하여 건네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결국 다소 변형이 있다고 하더라도, 채무를 이행하는 시점의 형태 그대로 철수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습니다.
"만년필 매수인인 철수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계약 당시에는 멀쩡했던 만년필이 변질되었는데도 그냥 그 만년필을 받고 땡이라는(?) 건가요? 영희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습니까?"
이런 생각을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학자들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만약 계약 체결 후 채무자의 고의나 과실에 의하여 물건에 하자가 발생했는데도, 채무자가 이행기의 모양 그대로 목적물을 인도하면 채무불이행책임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건 너무한 것이 아니냐, 이런 겁니다. 채무불이행책임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도 불법행위책임이 성립할 수도 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물건을 인도하지 않은 시점에서는 여전히 소유권은 물건의 판매자(영희)에게 있으므로, 영희가 고의나 과실로 만년필을 상하게 한 경우라도 자기 소유의 물건을 망가뜨린 것이어서 불법행위책임이 성립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윤용석, 2015).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 걸까요?
"계약 당시에는 멀쩡했던 물건에 이후 하자가 생긴 경우, 그 하자 그대로 이행을 하면 채무자는 채무의 이행을 다 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이는 결국 민법 제462조에서 말하는 "~인도하여야 한다."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해석하는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합니다만(학계에서의 논쟁에 관해서는 아래 [심화학습] 참조), 일단 학계에서의 다수 견해에 따르면, 제462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목적물의 상태가 좀 변하더라도, 그 상태대로 넘겨주면 변제제공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걸 받지 않으면 채권자에게 채권자지체가 성립한다."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정물의 현상인도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내일은 변제로서의 타인 물건의 인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위에서 말한 특정물채권에서의 문제에 대하여 학계에서 이루어진 논리의 흐름을 한번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별도로 '심화학습'으로 분량을 배정하였습니다. 모른다고 하여도 향후의 공부에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관심 있는 분만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관건은 "특정물의 인도가 채권의 목적인 때에는 채무자는 그 물건을 인도하기까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 보존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한 제374조(선관주의의무)와, "특정물의 인도가 채권의 목적인 때에는 채무자는 이행기의 현상대로 그 물건을 인도하여야 한다"(현상인도의무)라고 규정한 제462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입니다. 아래에서 1설, 2설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은 편의상 한 것이고 큰 의미는 없습니다.
먼저 1설은 제462조를 충실히 받아들여, 이행기에 물건에 하자가 있건 말건 채무자가 그것을 넘겨주면 '현상인도의무'는 달성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채무자는 변제제공을 한 것입니다. 채권자가 물건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물건을 수령하지 않는다? 그러면 채권자지체가 성립합니다.
그러나 2설은 위 견해가 타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물건에 문제가 생긴 이유가 만약 채무자의 고의나 과실에 기인한 것이라면, 그러한 경우에도 하자 있는 물건을 넘기기만 하면 "채무의 내용에 좇은" 변제제공이 된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겁니다. 2설에서는 제462조가 단순히 "이행기의 모양 그대로 인도를 하는 것=변제제공"을 규정한 조문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유형에 따라 판단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같은 특정물채권이라도 인도에 의하여 비로소 채권자가 권리를 취득하는 유형이라면(동산의 매매계약), 현상인도의무가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무이고, 선관주의의무는 그에 포함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결국 선관주의의무를 다하건 다하지 않았건, 물건에 하자가 있는 상태로 넘겨주면 채권자는 수령을 거부할 수 있다고 봅니다.
반면, 특정물을 채무자가 점유해서 사용, 수익하다가 채권자에게 돌려주는 경우(예를 들어 임대차계약), 이런 경우에는 좀 상황이 다르다고 봅니다. 여기서의 특정물 반환(예를 들어 월세 주택의 반환)은 법률관계 청산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원칙적으로 이행기의 현상대로 인도를 하면 반환의무는 끝난다는 겁니다. 채권자는 수령을 해야 합니다. 안 하면 채권자지체가 성립해요. 다만, 돌려받은 집에 문제가 있으면 집주인은 선관주의의무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거지요.
결국 선관주의의무를 다한 채무자가 이행기에 현상대로 물건을 넘겨주면 원칙적으로는 이행지체의 책임은 면할 수 있을 것이나, 그 외에 채무불이행책임은 위에서처럼 인도 의무의 유형에 따라 구별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지원림, 2013).
3설은 제462조에서 말하는 '현상인도'의 범위를 좀 다르게 해석합니다. 물건이 망가지면 망가진 대로, 그냥 넘겨주는 것이 현상인도가 아니라, '본래의 목적물의 인도와 동일성이 인정되는 한도' 내에서 인도를 하여야 그게 바로 유효한 변제가 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만년필의 펜 끝이 아주 살짝 닳았는데, 그 정도라면 본래의 목적물(철수가 영희의 만년필을 보고 계약을 체결했을 때의 만년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상태에서 인도를 한다면, 영희는 인도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만년필이 고장 나서 아예 잉크가 흘러나오지 않아서 펜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는 정도라고 합시다. 이런 상태의 물건이라면 그런 물건을 인도한다고 하여도 본래의 만년필과 동일성이 인정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라면 채권자(철수)는 물건의 수령을 거절할 수 있고, 거절하더라도 지체책임이 성립하지 않습니다(김준호, 2017).
4설은, 3설에서 말하는 '동일성'이 애매한 개념이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제462조는 현상인도의무를 선관주의의무와는 별개로 '목적물의 인도'에 대해서만 규정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374조와 제462조에서 규정된 2개의 의무는 서로 종속되고, 포함되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서로 떨어져 있는 별개의 의무라는 거죠. 따라서 선관주의의무를 다하건, 다하지 않건 제462조에 따라 채무자는 일단 목적물을 인도하여야 합니다. 선관주의의무와 현상인도의무는 다른 것이니까요. 대신 선관주의의무의 위반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훼손된 목적물을 넘겨주었다? 그러면 현상인도의무는 다했지만 결국 선관주의의무 위반으로 손해배상책임을 지게 됩니다. 하지만 선관주의의무를 다했음에도 물건이 망가져서 그 상태대로 인도하였다면, 채무자는 선관주의의무와 현상인도의무를 모두 달성하였으므로 책임을 질 것이 없게 됩니다(송덕수, 2020).
5설은 아예 제462조가 무의미한 규정이므로 삭제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단 이 견해에서는 제462조의 현상인도의무는 제374조의 선관주의의무를 전제로 하고 있는 규정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제462조에 명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선관주의의무를 다한 채무자가) 이행기의 현상 그대로 물건을 인도하면 채무를 면하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물도그마 이론이 유행한 독일에는 정작 제462조와 같은 규정이 없고, 프랑스와 일본에는 존재하는데, 우리나라는 프랑스민법의 제도를 일본을 통하여 받아들였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와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와 달리 물권변동에서의 의사주의(예를 들어 계약을 체결하기만 하면 공시 없이도 소유권이 매수인에게 이전)와 채권자위험부담주의(쌍무계약에서 양쪽 모두의 잘못 없이 목적물이 멸실·훼손되면, 여전히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대가를 요구할 수 있음)를 취하고 있으므로 상황이 다르다는 겁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채무자위험부담주의와 물권변동에서의 형식주의를 채택하고 있죠.
채권자위험부담주의 하에서 제462조와 같은 규정이 있다면, 이는 물건이 좀 망가지더라도 채무자가 그 상태대로 채권자에게 넘겨주면 돈(반대급부)을 달라고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므로 해석상 자연스럽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와 같이 채무자위험부담주의 하에서 제462조와 같은 규정이 있는 것은 충돌의 우려가 있습니다. 계약체결 후 채무자가 선관주의의무를 다했는데도 물건이 망가진 경우, 채무자는 제462조에 따라 일단 망가진 물건이라도 건네주면 되며 채권자를 그 수령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채권자는 매매대금도 줘야 합니다. 하지만 채무자위험부담주의 하에서는 물건의 훼손 상태가 심각한 경우에는 사회통념상 이행불능이라고 볼 수 있어 제537조가 적용되는데, 이 경우에는 매매대금을 안 줘도 되기 때문입니다. 즉 제462조에 따르면 채권자가 매매대금을 줘야 하고, 제537조에 따르면 대금을 안 줘도 되는, 서로 안 맞는 결론이 나온다는 겁니다(김대정, 2014).
또한, 프랑스와 일본같이 물권변동이 의사표시만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의사주의를 취하는 경우, 계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미 특정물의 소유권은 매수인에게 넘어간 것이고, 매도인이 '남의 물건'을 보관하다가 물건에 하자가 발생한 경우라면 당연히 불법행위책임이 성립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경우 제462조와 같은 규정이 있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관주의의무를 다한 채무자는 불법행위책임을 면하게 해 준다는 취지로 해석하면 됩니다. 꽤 의미 있는 규정이 되는 거죠. 하지만 우리 민법과 같이 형식주의를 취하는 경우에는 다릅니다. 계약이 체결되어도 물건의 소유권은 여전히 매도인에게 있고요, 관리 소홀로 물건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건 매도인이 자기 소유의 물건을 망가뜨린 것이어서 그것 자체가 바로 매수인에 대한 불법행위를 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우리 민법 하에서 제462조는 "선관주의의무를 다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물건에 하자가 생겼다면, 그 물건을 넘겨주면 불법행위책임을 지지 않는다"라는, 즉 잘못을 안 한 사람은 잘못을 안 했으니 책임이 없다는 당연한 법리를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어서 무의미하는 겁니다(김대정, 2014: 28면). 최종적으로 이 견해에서는 제462조는 삭제하고, 관련된 문제들은 일반적인 채무불이행, 불법행위, 위험부담 등의 규정과 이론에 의하여 해결하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6설은 5설의 견해를 비판합니다. "과연 현상인도에 관한 규정이 채권자위험부담주의와 물권변동의 의사주의를 전제로 한 것이 맞는가?"라고 의문을 던집니다. 오히려 프랑스와 일본에서 현상인도의무에 관한 규정이 있는 것이 별로 큰 의미가 없는 게 아니냐, 이런 겁니다. 의사주의 하에서는 특정물의 매수인은 바로 소유권을 갖게 되고, 매도인은 남의 물건을 보관하는 사람이 되는데, 그렇다면 남의 물건을 보관하면서 선관주의의무를 지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는 겁니다. 주의의무를 다했다면, 설령 물건에 문제가 있어도 그대로 넘겨주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현상인도의무는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그에 대한 규정이 있어도 큰 의미는 없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 법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특히 매도인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하여 목적물이 훼손된 경우에도 매수인은 목적물을 반드시 수령해야 하고 거절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자기 소유물을 거절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윤용석, 2015: 215-218면). 최종적으로 6설에서는 제462조는 삭제하여야 할 규정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민법체계상 꼭 필요한 규정이고, 선관주의의무를 다한 경우에만 제462조가 적용된다고 봅니다. 선관주의의무에 위반한 경우에는 제462조가 적용되지 않으며, 채권자는 수령을 거절하거나 채무불이행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윤용석, 2015: 222-224면).
사실 특정물의 현상인도와 관련된 문제는 선관주의의무(제374조), 채무불이행책임(제390조), 채무자 위험부담주의(제537조), 매도인의 하자담보책임(제580조) 등이 모두 관계되어 있는, 아주 복잡한 사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간의 의견 차이도 분분하지요.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학자들의 의견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보고 서로 비교해 보았습니다. 더 깊은 공부를 원하시는 분들은 각각의 참고문헌 원본을 직접 읽고, 과연 제462조가 우리 법제에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한번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문헌
김대정, "特定物債務者의 現狀引渡義務에 관한 민법 제462조의 改正方案", 「중앙법학」 제16집 제4호, 2014, 23-33면.
김준호, 「민법강의(제23판)」, 법문사, 2017, 1200면.
송덕수, 「채권법총론(제5판)」, 박영사, 2020, 61-64면.
윤용석, "특정물채권과 특정물도그마", 「재산법연구」 제31권 제4호, 2015, 211-212면.
지원림, 「민법강의(제11판)」, 홍문사, 2013, 899-90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