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9조(제삼자의 변제) ①채무의 변제는 제삼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삼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이해관계없는 제삼자는 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변제하지 못한다.
채무는 원래 채무자가 갚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채무자 외에 다른 사람이 채무를 변제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철수는 나부자에게 1억원의 금전채무를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철수를 짝사랑하는 옆집의 영희가, 철수의 빚을 안타깝게 여겨서 대신 나부자에게 1억원을 변제하려고 합니다.
나부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나부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1억원을 받는 것입니다. 사실 철수가 계좌이체를 해주건, 영희가 현금으로 가져다 주건 상관없습니다. 누구에게든지 1억원을 회수하기만 하면 나부자의 목적은 완수됩니다. 그렇다면, 나부자의 입장에서는 가난하고 갚을 능력도 없는 철수가 돈을 갚기를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영희가 철수의 빚을 대신 갚도록 하는 것이 훨씬 이득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3자가 채무자의 채무를 변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채권자에게 큰 불이익이 없을 수 있으므로, 제469조제1항 본문은 채무의 변제를 (채무자가 아닌) 제3자도 원칙적으로 할 수 있다고 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제한은 있습니다. 항상, 아무나 다른 사람의 채무를 변제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제한이 있을까요? 제469조에 답이 있습니다. 아래의 3개 제한에 위반하여 이루어진 제3자의 변제는 무효입니다.
첫째, 채무의 성질에 비추어 제3자가 변제할 수 없는 것인 경우에는 안 됩니다(제469조제1항 단서). 예를 들어 철수의 채무가 금전채무가 아니고, 피아노 연주를 해주는 채무였다고 해봅시다. 사실 철수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채무라면, 이 채무를 변제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이 세상에 철수뿐이므로, 영희가 대신 변제할 수는 없게 됩니다. 설령 영희도 사실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고 해도 안 됩니다. 철수에게는 철수 고유의 연주법과 개성이 있는데, 영희가 그것을 대신해줄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이와 같이 채무자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은 채무의 내용에 좇은 이행을 할 수 없는, 그런 성질의 급부를 일신전속적 급부라고도 부릅니다.
*참고로, 고용관계에서 노무를 제공하는 경우에는 사용자의 동의를 받으면 제3자가 대신 노무를 제공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기는 합니다(제657조제2항). 위에서의 피아노 연주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 기억해 두세요.
제657조(권리의무의 전속성) ①사용자는 노무자의 동의없이 그 권리를 제삼자에게 양도하지 못한다.
②노무자는 사용자의 동의없이 제삼자로 하여금 자기에 갈음하여 노무를 제공하게 하지 못한다.
③당사자 일방이 전2항의 규정에 위반한 때에는 상대방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둘째,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 경우에는 안 됩니다(제469조제1항 단서). 예를 들어 철수가 나부자에게 1억원을 빌리는 계약을 체결할 때, 계약서에 "채무는 철수가 직접 갚는다. 다른 사람이 갚아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면, 영희는 철수의 빚을 대신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의 경우에는 채무자가 원치 않으면 대신 변제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위의 사례에서, 사실 철수는 영희를 좋아하지 않는데 철수를 짝사랑하는 영희가 싫다는데도 철수를 계속 쫓아다니다가 철수의 빚을 갚아주려고 한다고 해봅시다(영희에게 증여의 의사까지는 없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철수 입장에서는 자기가 빚을 못 갚으면 못 갚았지 영희에게 은혜를 입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 영희는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이므로 채무자(철수)의 의사에 반해서 변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해관계 없는' 제3자란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대법원에 따르면, "민법 제469조 제2항은 이해관계 없는 제3자는 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변제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민법 제481조는 변제할 정당한 이익이 있는 자는 변제로 당연히 채권자를 대위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위 조항에서 말하는 ‘이해관계’ 내지 ‘변제할 정당한 이익’이 있는 자는 변제를 하지 않으면 채권자로부터 집행을 받게 되거나 또는 채무자에 대한 자기의 권리를 잃게 되는 지위에 있기 때문에 변제함으로써 당연히 대위의 보호를 받아야 할 법률상 이익을 가지는 자를 말하고, 단지 사실상의 이해관계를 가진 자는 제외된다."라고 합니다(대법원 2009. 5. 28.자 2008마109 결정).
예를 들어 영희가 단순히 철수의 옆집 여자가 아니라, 철수의 금전채무를 보증하고 있는 보증인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철수가 빚을 갚는지 못 갚는지 여부는 영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영희는 이해관계가 있는 제3자인 거죠. 이처럼 '이해관계 있는' 제3자의 경우, 제469조제2항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철수의 허락이 없더라도 철수의 빚을 갚을 수 있습니다.
만약 채무자인 철수가 반대하는데도 영희가 남몰래 나부자에게 돈을 줘버린 경우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한 변제는 앞서 말했듯이 무효입니다. 철수가 반대했는데도 돈을 준 것이기 때문에 철수에 대해서 뭘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즉, 구상권을 취득하지 못합니다. 다만 나부자에게 부당이득을 이유로 돈을 돌려달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오늘 공부한 내용에 대해서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채무인수를 공부할 때 위에서와 상당히 닮은 논리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제453조 파트 참조). 물론 채무인수와 제3자의 변제는 개념상 다른 것이긴 하지만, 조문의 구조나 논리 자체는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한번 비교해 가면서 차이점을 공부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참고로, 이행인수 약정에 따라 인수인이 채권자에게 변제하는 경우에는 제3자의 변제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결정이 있으니(대법원 2012. 7. 16.자 2009마461 결정), 관심 있는 분들은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행인수의 개념은 제453조 파트에서 이미 언급하였습니다.
제453조(채권자와의 계약에 의한 채무인수) ①제삼자는 채권자와의 계약으로 채무를 인수하여 채무자의 채무를 면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의 성질이 인수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이해관계없는 제삼자는 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채무를 인수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생각해 봅시다. 영희가 철수의 빚을 다 갚아주고 나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그것이 제469조에 따른 제한에 걸리지 않는다면, 제3자의 유효한 변제로 나부자의 채권은 소멸합니다. 철수는 나부자에게 더 이상 채무를 갚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영희가 철수를 단순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철수로부터의 위임이나 사무관리 등에 기인하여 돈을 갚아준 것이라면, 영희는 철수에게 구상권을 취득(제688조, 제739조)하게 됩니다(김준호, 2017). 아래 조문들은 추후 나중에 자세히 살펴볼 것이므로, 여기서는 우선 제3자의 변제의 효과로 채권자와의 관계에서 채무자가 해방된다는 것만 이해하시면 족합니다.
제688조(수임인의 비용상환청구권 등) ①수임인이 위임사무의 처리에 관하여 필요비를 지출한 때에는 위임인에 대하여 지출한 날 이후의 이자를 청구할 수 있다.
제739조(관리자의 비용상환청구권) ①관리자가 본인을 위하여 필요비 또는 유익비를 지출한 때에는 본인에 대하여 그 상환을 청구할 수 있다.
오늘은 제3자의 변제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내일은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김준호, 「민법강의(제23판)」, 법문사, 2017, 119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