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학교 가는 길가에 유채꽃이 잔뜩 피었다. 초등학교 때는 엄마와 함께 등교를 하면서 ‘이 꽃은 이름이 뭐야? 저 풀은 이름이 뭐야?’하고 묻고는 했다. 엄마는 길가에 핀 아주 작은 꽃의 이름도 알고 계셨다.
꽃을 좋아하는 엄마 덕에 집 앞 계단 구석에는 매일같이 그가 가꾸는 화분들이 일렬종대로 서있었고, 가족들이 읽는 책 사이에는 그가 낙엽으로 만든 책갈피가 꽂혀있었다. 차를 타고 가다 꽃이 보이면 차를 세우고 한참 사진을 찍다 오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꽃을 좋아하는 것만큼은 어린 나도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무슨 꽃을 제일 좋아해?”
계절마다 바뀌는 꽃들을 바라보며 저 꽃의 이름은 무엇인지, 언제 피고 언제 지는지 등을 묻던 날 중 어느 날은 다른 물음을 던졌다. 당신은 무슨 꽃을 좋아하느냐고. 어린 나는 생각했다. 엄마는 무슨 꽃을 좋아할까. 노랗게 수놓아진 유채꽃일까, 아니면 유년시절 집 앞 산길에 가득했다던 철쭉일까, 그것도 아니면 언젠가 한참을 서서 사진을 찍던 금잔화일까.
“엄마는 안개꽃이 제일 좋아.”
돌아온 대답이 너무 의외였던 탓에,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그때의 상황이 기억에 남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개꽃이 제일 좋다고? 되묻는 말에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색색의 꽃들이 아닌, 수수하기 그지없는 꽃의 이름을 듣고 나니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 왜 안개꽃이 가장 좋은 것일까? 엄마는 선선히 웃으며 이유를 덧붙였다. 안개꽃이 있으면 모든 꽃이 예뻐 보이지 않느냐고.
그 대답을 듣고서 무슨 생각을 했던가. 아마 ‘엄마는 그래서 안개꽃이 좋구나.’하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더 대화를 잇지 않았을 것이다. 혹 나중에 커서 그녀에게 꽃다발을 선물할 일이 생긴다면 안개꽃을 꼭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때의 나는 키가 엄마의 허리춤을 간신히 웃돌만큼 어렸고, 그녀에 대한 앎보다 세상에 대한 앎에 더욱 흥미를 느꼈으며, 어느 날부터는 꽃에 대한 감상도 지루해했기 때문에, 그날 주고받았던 대화를 유년시절의 기억 창고 어디쯤에 대충 내버려 두었던 것 같다. 다시 그 기억을 끄집어낸 것은,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한 편의 시를 접했을 때였다.
꽃이라면
안개꽃이고 싶다
장미의 한복판에
부서지는 햇빛이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을 거드는
안개꽃이고 싶다
나로 하여
네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네 몫의 축복 뒤에서
나는 안개처럼 스러지는
다만 너의 배경이어도 좋다
마침내는 너로 하여
나조차 향기로울 수 있다면
어쩌다 한 끈으로 묶여
시드는 목숨을 그렇게
너에게 조금은 빚지고 싶다
복효근, 안개꽃
둑이 무너져 내리면 그 안의 모든 것이 막을 틈도 없이 밖으로 밀려 나오는 것처럼, 안개꽃을 말하는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를 기억해냄과 동시에 그녀에게 무슨 꽃을 좋아하는지 묻는 어린 나와, 안개꽃을 답하던 엄마의 표정이 하나의 영화 장면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생각했다. 아, 엄마도 안개꽃이 가장 좋다고 했었는데. 기억의 발현은 그 시를 쓴 시인, 또는 화자가 그녀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 시의 모든 문장들은 엄마의 목소리로 재생되고 있었고, 이윽고 그런 깨달음을 주었다. 아, 안개꽃을 좋아하는 엄마는, 안개꽃을 무척이나 닮은 사람이구나, 하는.
장밋빛 인생이라는 말이 있다. 엄마는 그런 삶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아니, 꿈꿨을 것이다. 그녀는 가끔 학생 때 꿈꿔왔던 미래를 말하곤 했다. 그림을 좀 더 배워서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거나, 하는. 엄마는 종종 이루지 못한 꿈들에 대해 아쉬워하면서도, 그래도 우리와 함께 하는 지금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그 말에 쉬이 수긍할 수 없었다. 더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디자이너가 된 엄마는 지금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동시에 나는 두려워했다. 너희가 아닌 당신이 꿈꾼 삶을 선택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까 겁났고, 그녀로부터 ‘너희가 있어 행복하다’는 말을 들으면 이유 모를 안도감이 생겼다. 나는 엄마가 장미꽃처럼 화려한 삶의 중심에 있기를 바라면서도, 언제나 내가 주인공인 세상 그 주변에 그녀가 피어있길 바랐다.
그러한 바람처럼, 엄마는 늘 내 주변에 피어있었다. 당신의 이름보다 'OO엄마'라고 불리는 삶을 자처하면서. 젊은 날 꿈꿔오던 수많은 것들을 뒤로한 채 자식들의 곁에 서기를 선택하기까지 얼마나 큰 결심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세 아이의 엄마나,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가며 언젠가 장밋빛 인생을 꿈꿨을 그녀가 몇 번을 좌절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는 아주 오랜 시간, 우리가 있어 괜찮다고 말해왔다. 당신에게 가장 값진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면 된 것이라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열아홉 그날, 시 위로 겹쳐지는 주름진 얼굴에 코끝이 아려오는 것은 그래서였다. 엄마는 한평생 우리의 주변을 에워싸기를, 이런 마음으로 에워싼 것이었구나. 우리가 더더욱 아름다워 보이도록,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오랜 시간 빌려주면서. 나는 열아홉이 되어서야 오래전 안개꽃이 좋다고 말하던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나도 꽃 중에서 안개꽃이 가장 좋다. 당신의 말처럼 모든 꽃을 아름답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고, 당신을 닮았기 때문에 안개꽃이 좋다. 그리고 당신의 아름다움을 빚진 것에 대해 무척이나 감사하다고, 그렇게 전하고 싶었다.
어릴 적 나는 모든 것의 중심에 서고 싶어 했다. 작게는 학예회 무대의 가운데 자리, 또는 어느 대회의 1등 자리를 욕심냈고, 크게는 미래에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받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의 나의 의견을 따르고, 나를 인정해주기를 원했다. 그 욕심에 목말라하고 스스로를 상처 입히던 때가 열아홉이었다. 사회에서 말하는 ‘좋은 대학’이라는 곳에 합격해야 지금보다 더 인정받을 수 있고, 더 선망받고, 인생이 더욱 화려해질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의 중심에 설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꼭 사회를 이끄는 리더가 아니어도 되며, 남들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선망받는 사람이 아니어도 되고, 주변에 날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 화려하진 않더라도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더 아름다울 때가, 진하지 않더라도 오래 머무는 향기가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그런 삶을 가치 있게 여기기로 한 후, 열아홉의 나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할 수 있었다. 남들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남들까지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사람이 되기로.
새로운 목표로 나아가는 길에 스물다섯인 오늘의 내가 있다. 그러나 나는 가끔 초조해한다. 남들에게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내 자리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생기곤 한다. 그때마다 생각한다. 장미꽃과 같은 삶이 있으면, 안개꽃과 같은 삶이 있다고. 그리고 그 어떤 삶을 살아가도 나의 가치를 잃지 않는다고. 장미꽃과 같은 삶을 살아내는 순간에는 내 주변의 안개꽃에게 향기를 나눠주는 사람이 되고, 안개꽃과 같은 삶을 살아낼 때면 나의 아름다움으로 다른 아름다움을 거들자고. 나만 아름다울 것이 아니라 함께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고 말이다.
엄마가 나의 안개꽃이듯, 나 또한 엄마를 장식하는 안개꽃일 수 있다. 이렇듯 우리는 누군가에게 장미꽃이면서, 안개꽃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장미꽃일 때의 삶만을 가치 있다 여기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그러나 <안개꽃>이라는 시가, 그리고 언젠가 그녀가 말했듯 안개꽃은 장미꽃 같은 화려한 꽃 못지않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나는 앞으로 삶의 어느 순간 주변부에 머무는 삶이 찾아오거든 기껍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 삶이 부모님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삶, 어떤 색, 어떤 모양의 친구들과도 어우러지는 삶, 시드는 사회를 은은히 빛내는 삶, 그러한 삶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삶이라면 얼마든지 기쁘게 살아내기로 한다. 사랑하는 이들의 곁에서, 그렇게 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