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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Dec 16. 2019

그릇이 아닌 글쓰기

역지사지 견물생심 글쓰기론

그릇이 아닌 글쓰기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청년 시절에 소설이라는 것을 쓰겠다고 작심한 뒤 지금까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생각이 정리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때그때 욕심이나 충동에 따라 이런저런 글을 써왔습니다(지금은 주로 '외로움의 해소'를 위해서 하루하루의 소감을 적습니다). 의도가 어떻든, 습작기의 어느 한 순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는 듯한 느낌’이 한 번쯤 있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입술이 타는 듯한 공포를 맛보았고 불순물이 제거되는 듯한 투쟁의 황홀경”(헤밍웨이,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비슷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 뒤로는 글쓰기가 한결 수월해졌습니다만 후일 생각해 보니 아마 그때가 몸으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처음으로 알게 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동안 벗으면 죽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무겁고 답답한, 철가면(鐵假面) 하나를 내려놓았습니다. 그 순간의 희열은 참 대단했습니다. 이십대 중후반에 찾아온 그 계시 아닌 계시 덕분에 지금껏 이러고 있습니다. 그마저 없었다면 무슨 꼴로 살고 있을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브루스 맥코미스키(김미란)가 지은 『사회 과정 중심 글쓰기 : 작문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책을 읽다 보니 문득 그 옛날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공자님이 말씀하신 ‘군자불기’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子曰 君子不器 (『論語』 「위정」)
* The Master said, "The accomplished scholar is not a utensil."
* 군자(君子)는 일정(一定)한 용도(用途)로 쓰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한 가지 재능(才能)에만 얽매이지 않고 두루 살피고 원만(圓滿)해야 한다는 말.
* 바람직한 지식인은 스페셜리스트이면서 동시에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말.
* 군자는 한낱 도구적인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바람직한 인간 존재는 덕과 인, 지식과 실천력을 겸비한, 자목적적(自目的的)인 통일(통합)체라야 한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올수록 설명이 좀더 자세히 이루어집니다. ‘자목적적인 통일(통합)적 존재’라는 말은 제가 한 번 붙여본 것입니다만, 현재 저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군자불기’에 가장 어울리는 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도구(器)’라는 말을 무엇의 ‘수단(적 존재)’이라고 본 해석입니다. 군자(이상적 인간 존재)는 그것(수단적 존재성)을 뛰어넘어 스스로가 존재의 목적이 되는 경지를 지향해야 한다고 공자님이 가르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한 가지 전문 기술이나 학식에 치중하지 않고 만사형통(萬事亨通), 두루두루 통하는 전방위적 인간이 되기를 공자님이 강조하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무리 형통해도, 그것 역시 결국은 또 다른 ‘기(器)’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쉽지, ‘자목적적 통일(통합)체’가 어떤 것인지 자세히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명해 보라면 저도 속수무책(束手無策), 달리 더 갖다 붙일 말이 없습니다. 아마 그래서 공자님도 비유로 표현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글쓰기 공부에 관련해서는 거기다가 몇 마디 부언(附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군자불기 역지사지 견물생심 글쓰기론’ 같은 것은 가능하지 싶습니다. 스스로의 삶이 자목적적이 될 때 ‘무엇을 쓸 것인가’는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 정도는, 그리고 그 세부적인 경험적 사례에 관해서는 몇 마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꿩 잡는 게 매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생긴 것이 아무리 매 같아도 꿩 하나 잡지 못하면 그건 매가 아닌 것입니다. 글쓰기 공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럴 듯해도 좋은 글쓰기를 산출하도록 돕지 못하는 것은 좋은 이론이 아닙니다. 화자(話者)의 층위가 어떻고 독자의 층위가 어떻고, 텍스트니 수사학이니 담론이니 하는 현란한 고담준론(高談峻論)의 끝이 허무하다면 그것은 올바른 글쓰기 공부가 결코 아닙니다. 그저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아주 부분적인 이해에 불과한 것들만 가지고 지식의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글쓰기 공부를 할 때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글쓰기는 표상적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절차적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실기(實技)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것, 혹은 가장 기본적인 것은 눈으로 본 것, 혹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손이 따라가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도 ‘손이 따라가 주어야 하는’ 기술의 영역에 속합니다. 아는 것과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쓰기에 숙달되면 자신의 앎을 이리저리 글쓰기를 통해서 굴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이 많아도, 이리저리 맘대로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농부가 땅을 파고 씨앗을 뿌려야 새싹이 나듯이, 글 쓰는 자도 반드시 직접 글을 써보며 실기의 새싹을 길러내야 합니다. 스스로 문리를 터득해야 되는 게 글쓰기입니다. 제가 앞에서(통째로 눈치껏, 군자불기) 글쓰기 공부에서는 특히 ‘분절적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 드린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입니다. 자꾸 나누어 생각하다보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라는 미혹(迷惑)에 들기 쉽습니다.

2. ‘통째로 눈치껏’, 많이 읽어서 수사(修辭)의 묘(妙)도 익히고, 따라 써보면서 맥락을 타고 문의(文意)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몸소 체득해야 합니다. 수사의 묘도 중요하지만 문화적, 역사적 환경으로서의 맥락에 능통하지 않으면 좋은 글을, 오래, 쓸 수 없습니다. 맥락적이지 않은 글들, 친환경적이지 않은 글들은 생명력이 짧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홑껍데기만 남습니다. 수사만 넘치는 글은 겉만 글이지 속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3. 기본적인 기술, 부단히 읽고 쓰는 행위(연습)를 통해서 글쓰기 개인기를 축적해 나가는 동시에 내가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위로인지, 공격인지, 수단인지, 목적인지, 봉사인지, 밥벌이인지가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합니다. 그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마구 글을 쓰다 보면 결국 민폐가 되어 패가망신(敗家亡身), 끝이 허무하게 됩니다. 해방이면 해방, 실천이면 실천, 수단이면 수단, 목적이면 목적, 글 쓰는 동기가 분명해야 합니다. 목적에 부합하는 글쓰기에 몰두해야 합니다. 꾸준히 그렇게 쓰다보면 일도만도(一刀萬刀), 언젠가는 ‘불기(不器)’의 경지에 들 수 있습니다.

4.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역지사지, 견물생심’입니다. 자기(self)를 해체하고, 수시로, 자유자재로, 중심 이동이 가능해지도록 수신(修身)해야 합니다. 상허하실(上虛下實), 상체는 가볍게 하고 하체는 무겁게 해서 이동 시 중심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결국 승부는 여기서 난다고 보면 됩니다. 많은 어중이떠중이 글쟁이들이 평생토록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속절없이 그 앞에서 주저앉습니다. 꼴에 분석가니 문장가니 평론가니 하며 나대지만 그 역시 끝이 허무합니다. 도하 신문에 글께나 싣는 자들의 8,90%는 그 수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견물생심’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때에 맞게 생각하는 힘’입니다. 자기 안에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물(物)에 즉하여 ‘생심(生心)’하는 능력입니다.

5. 이 모든 것을 꾸준하게 계속해야 합니다. 글쓰기 역시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 멈추면 저만치 떠내려가고 없습니다. 거세정진(去勢精進), 만사를 젖혀놓고 피터지게 연습해야 합니다. 하루를 쓰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쓰지 않으면 읽는 이가 알고, 사흘을 쓰지 않으면 세상 모든 이들이 다 아는 것이 글쓰기의 세계라 여기고 꾸준히 써나가야 합니다. 하이퍼그라피아(글쓰기 중독증)가, 의식의 수준에서 제어될 수 있게 될 때까지 몰입해야 합니다.


이상 다섯 가지의 계율(?)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실천해 낼 수 있으면 명실공히 자타가 공인하는 글쟁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정도도 실천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그릇이 아닌' 글쟁이로 자처한다면 자칫 ‘글쓰기 오적(五賊)’ 신세를 면치 못할지도 모릅니다. 글 좀 쓰는 식자들에게 ‘글쓰기 오적의 신세’는 늘 가까이 있습니다. 글쓰기의 텍스트적 수준, 수사학적 수준, 담론적 수준, 호출되는 독자, 환기되는 독자, 투사적 독서, 해설적 독서, 시학적 독서, 믿을 수 있는 화자, 믿을 수 없는 화자, 발견 학습, 문제해결로서의 글쓰기, 문화적 생산, 맥락적 배치, 롤랑 바르트, 데리다. 푸코 등등 온갖 ‘말들과의 전쟁’만 치르다가는 결국 사문난적(斯文亂賊), 혹세무민(惑世誣民) 하다가 글다운 글 한 편 못 남기고 우주의 먼지로 사라질 것이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나중에, 글을 좀 써본 뒤에, 읽어보면 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라는 것을 절로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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