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Dec 31. 2019

짊어진 자들의 고단한 여행

신과 악마

짊어진 자들의 고단한 여행


나는 해도 안 된다, 타고 난 게으름뱅이다. 불운을 안고 태어났다. 그런 열등 콤플렉스 속에서 살 던 때가 있었습니다. 유소년기의 태반을 그런 우울한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의 저는 어린 병자(病者)였습니다.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언가를 잔뜩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그 이유를 밝혀보려던 것이 졸작 『장졸우교』였습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꽤나 길고 힘든 암중모색(暗中摸索)이 필요했습니다. 젊어서 사회에 뛰어들고 작가가 되고 교수가 되면서 한 때 ‘마음먹은 대로 되는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기가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옛날의 그 우울한 기분이 다시 찾아들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하나 부러울 것 없는 가정’의 성실한 가장(家長)이 되어 있었는데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열패감에 다시 시달려야 했습니다.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라는 말이 자주 저의 혀끝에서 머물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걸 하나 보면 진득하게 만지고 쓰다듬으며 그냥 두고 즐겨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조바심으로 주물러 터뜨리지 못해서 안달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때도 저는 ‘나이 든 어린 병자’였습니다. 아직도 무언가를 잔뜩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몸으로 부딪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꽤 오랜 기간, 심장이 터지고 온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도 마다하고 그것과 싸웠습니다. ‘나와의 싸움의 기술’인 검도는 그래서 제 삶의 주 일과가 되었습니다. 어려웠지만 ‘어린 병자’가 부리는 심술은 상당히 완화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계기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나이 50에 닥친 일입니다. 안 좋은 일에 휘말려 좀비들의 세계를 구경해야 했습니다. 한 번 더 모질게 마음을 싸잡아야 했습니다(이때 페이스북이 큰 도움을 줬습니다).
‘선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논하는 것은 이제 그만하고 선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그리고 타고난 게으름이 내 육신을 다시 자신의 영토로 데려가기 전에, 본업인 글쓰기에 대해서 기본부터 다시 다지기로 했습니다. 전작(前作)을 가져다 놓고, 조바심으로 주물러 터뜨린 것들을 다시 수습하고, ‘늙어서’ 다시 보게 된 것들을 하나씩 첨가하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아침 글을 쓰지 않은 자는 작가가 아니다, 그 당연한 ‘말씀’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일모도원(日暮途遠), 항상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었지만 인생은 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외면하며 살았던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겸허히 다시 숙고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놈들은 재미있는 장난을 하나 생각해냈지. 그들은 어린애를 웃겨보려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얼러보기도 하는 거야. 그러다가 마침내 성공해서 아이가 웃기 시작하면, 바로 그 순간 터키놈 하나가 아이 얼굴에서 한 자도 안 되는 곳에서 권총을 겨누는 거야. 그러면 아이는 깔깔 웃어대며 권총을 잡으려고 조그만 손을 내밀 거든. 이때 이 예술가는 아이 얼굴에다 대고 방아쇠를 당겨서 그 조그만 머리를 박살내고 마는 거야.... 이 얼마나 예술적이냐, 그렇잖니? 부언하자면 터키인들은 단 것을 무척 좋아한다는 거야.”
“형님, 뭣 때문에 그런 얘길 하시는 거죠?”
알료샤가 물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만약 악마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서 인간이 창조해 냈다고 한다면 인간은 자기 모습과 비슷하게 그걸 만들어냈을 거야.”
“그렇다면 신(神)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정진홍 『고전, 끝나지 않는 울림』에서 재인용]


악마가 없었으면 신(神)도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감당할 수 없는 악(惡)의 존재를 목격하고서도 신을 부르지 않는다면 그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 말은 결국 인간은 스스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제 안의 그 무엇을 해결하기 위해서 또 다른 그 무엇이 필요했습니다. 알료샤의 말, “그렇다면 신(神)의 경우도 마찬가지죠”라는 대사는 아무래도 허언(虛言)인 것 같습니다. 그저 짝을 맞추기 위한 값싼 대구(對句)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인간에 내재한 신은 없습니다. 신은 언제나 계시나 기적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인간들이 선호하는 신(神)은 언제나 실존이라기보다는 당위에 가까웠습니다. 만약, 악처럼, 인간이 스스로 자신 속에 내재한 선(善)을 완전히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었다면 구태여 신을 불러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내재한 선(善)만 확인할 수 있었어도 그렇게 구차해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신(神)을 불러내지 않고 우리 안의 선(善)에 대해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반드시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선(善)을 외치면 귀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까지 없던 것이라고(혹은 내 생각 안에 있다고)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과도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모험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놓치는 자는 영영 ‘살아서 구원받을’ 기회를 잃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실존으로서의 신’을 가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늘 짊어진 자들의 고단한 여행일 뿐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벌레 인간과 별똥별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