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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an 01. 2020

아무 것도 아니다

콩쥐와 팥쥐

<아무 것도 아니다>

미셸 푸코(1926~1984, 프랑스의 철학자. 정신의학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했으며 서양문명의 핵심인 ‘합리적 이성’의 독단적 논리성을 비판하고 소외된 비이성적 사고, 즉 광기(狂氣)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의 역사성을 논구했다)를 두어 사람의 젊은 동료들과 함께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직 젊어서(마음만?) ‘공부’에 아직 미련이 좀 남아있을 때였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자기가 읽은 것에 대해서 발표를 하고 소감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두 사람은 잘 했는데 저는 바빠서(마음만?) 한 번도 발표를 하지 못하고 끝을 내야 했습니다. 이제 세월도 흐를 만큼 흘러서 이른바 ‘변명의 효력’도 찾기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제게는 미셸 푸코가 전혀 와 닿지가 않았습니다. 텍스트 자체도 난삽하거니와 저자가 동원하는 전거(典據)와 사용하는 어법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제게는 그 핵심적인 내용들이란 것들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나 ‘전변설(轉變說)’ 같은 불교 이론과 하나 달라보이질 않았습니다. 도통 책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 읽지 못했네요...”라는 변명 아닌 변명으로 그 시간을 때우곤 했습니다.

푸코에게나 저에게나 문제였던 것은 ‘말(이름)’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노자도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말했습니다만 푸코 역시 ‘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노자와는 좀 다른 차원이긴 했습니다. 푸코는 좀 순진한(?) 편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시종일관 너희들 ‘콩쥐들의 말은 못 믿겠다’만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들어 보면 크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콩쥐들이 쓰는 말은, 따지고 보면, 그저 마르크스 아니면 니체인 것입니다. 그 중간에 여러 모양들이 있긴 하지만 결국은 그 두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순진한(?) 콩쥐들은 틈만 나면 혁명이고 초월입니다. 콩쥐가 싫은 팥쥐는 그런 이분법이 싫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런 이분법은 그저 말장난입니다. 그 말장난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게 팥쥐들은 이해가 안 됩니다(콩쥐들이 쓴 책 때문에 죽은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팥쥐는 그렇게 ‘아는 것’에 목숨 거는 이들이 불쌍합니다. “안들 무슨 소용인가?”(김이듬)를 모르는 그들이 참 딱합니다, 그래서 팥쥐는 그저, 그냥, 한 번 찍찍거려 보는 겁니다. 그 ‘찍찍거림’에 환호작약(歡呼雀躍)하는 것은 오히려 콩쥐들입니다. 마치 그것이 대단한 ‘지식의 고고학’이나 되는 것처럼 떠받듭니다.

콩쥐들에게는 그것이 자신들의 한계를 돌파해 주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무슨 심각한 데몬스트레이션으로 간주됩니다. 팥쥐의 찍찍거림, 그 ‘문자주의’에 깜빡 죽습니다. 말(음성언어)을 메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문자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아주 먼 옛날, 갑골문자에서처럼 문자가 신성을 불러내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때에도 당연히 그랬습니다. 말이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을 문자는 탐사할 수 있었습니다. 문자는 마치 CT와 같습니다. 말로 들어낼 수 없는 폐부의 실핏줄까지 그것은 모두 찍어낼 수 있습니다. 푸코든 누구든, 미친 듯이 글을 써대는 사람들은 오직 문자행위, 그 살아있는 정충처럼 움직이는 문자행위에 몰두하고 있을 뿐 다른 의도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요약한다는 것이, 한두 마디의 말로 줄여서 발표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제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요약이 된다면 그건 이미 찍찍거림이, 푸코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요약을 포기하고 그 대신 『정신의학의 역사』 앞부분을 일부 발췌해 놓은 것을 당시 공부 모임 멤버들에게 메일로 보냈습니다.


...18세기 잉글랜드에는 1713년 설립된 노리치의 베델 수용소를 포함하여 7개의 수용소 혹은 공공 자선소가 더 있었다. 그러나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립기관, 처음에는 “광인의 집madhouse”이라 불리다가 나중에는 “개인 신경 클리닉”이라 불리게 된 곳에도 많은 수의 환자가 입원해 있었다.(의사가 자비로 진료소를 설립하여 ‘신경성’ 환자를 진료한 곳으로 ‘신경성’이라는 용어 아래 신경성 환자와 정신병 환자 등 온갖 비기질성 불편함을 진료했고, 후일 정신분석의 요람이 된다. (에드워드 쇼터 지음 ․ 최보문 옮김, 『정신의학의 역사』, 바다출판사, 2009. 21-22쪽 참조.) 그렇다면 소위 정신의학의 창시자라고 불린 사람들 대다수가 가지고 있던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 자본주의와 중앙권력의 잔혹한 동맹이 정신의학을 탄생시켰다는 푸코식 개념은 과연 적합한가? 동기도 없이 타성에 젖은 집단에게 노동 규율을 주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탈자들을 감금하는 권력의 게임판에 올라간 의사들이 과연 정신의학의 창시자라고 볼 수 있는가? 사실 바티와 러쉬는 초기 자본주의 경제의 중심 - 특히 필라델피아와 런던 -에서 시장 경제 분위기에 푹 젖어 있었다. 반면, 아직 중세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18세기 말 피렌체에서 키아루지가 자본주의에 눈떴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더욱이 레오폴드 대공이 오스트리아 군주의 권한을 확장하기 위해 토스카나 정신병원 체제까지 통제하려 했었다고 말하는 것은 익살극 속의 말귀와 진배없다. 당시 빈의 경제적 관심의 대상은 토스카나가 아니었고, 젊은 레오폴드(통치권을 잡던 1765년 당시 18세에 불과했다)와 그의 모친 마리아 테레사는 산업부흥으로 국가기강을 확립하려 했다기보다는, 전통적이고도 계몽주의적인 “절대권력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위의 책, 38-39쪽.)


분열이든 고립이든, 아니면 노화(老化)의 결과든, 자신과 집단과의 사회적 관계를 배제한 사유는 ‘위로와 위안’ 이상의 효용을 가지기가 어렵다는 게 저의 당시 소감이었습니다. 인용문의 출전이 되는 책의 뒷부분으로 가면 “통찰력, 관찰능력, 지적 능력, 선한 의지, 끈기, 인내, 경험, 당당한 체격, 존경을 끌어낼 수 있는 표정”이 정신과 의사에게 요구되는 자질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마땅하고 옳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자질은 모든 콩쥐들의 최종 목표이기도 합니다. 통찰력도 없고 지적 능력도 떨어지고 선한 의지도 없고 당당한 체격도 없고 끈기, 인내, 풍부한 경험을 통해 수립한 자신의 생에 자긍심도 없는 이들이 타인의 정신(우리 모두의 정신)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것은 정신과 의사가 아니더라도 읽고 쓰면서 나이를 먹은 우리 모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콩쥐들의 세계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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