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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Oct 16. 2023

소설, 레드빈 케이크 5

레드빈 케이크(5)     


어머니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아들은 이북에 두고 내려왔다. 내가 형이라고 할 때 그것은 어머니의 둘째 아들, 작은형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형들은 모두 이북 출생이다. 어머니는 작은형을 낳고 얼마 안 있어 피난길에 올랐다. 1.4 후퇴 때다. 평양의 관사에 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병 핑계를 대고 장수산으로 떠났을 때 큰형을 데리고 사리원의 외가로 내려갔다. 인편으로 아버지로부터 이남으로 가자는 연락을 받고 어머니는 두 이들을 데리고 친정을 나섰다. 갈 길이 멀었으므로 꼭두새벽에 집을 나서야 했다. 돌도 안 된 작은형을 업고 머리 위에는 옷가지 보따리를 인 채 큰형의 손을 잡고 나섰다. 그런데 동구 밖을 나설 무렵 큰형이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외할머니에게로 다시 뛰어갔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였다. 그날따라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보라가 거세게 쳤다. 날은 아직 어둡고 바람은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

“난 할머니집에 있을래!”

평양에서 유치원 다닐 때 입었던 세라복을 입고 나섰던 큰형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나 싶었다.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따듯한 외할머니 품으로 달려갔다. 외할머니도 그냥 두고 어이 가라고 손짓을 했다. 어머니가 스물 다섯 살 때였다. 날은 춥고 갈 길은 아득했다. 짧으면 사나흘, 길면 한두 주일이면 다시 돌아오겠지 생각하고 어머니는 발길을 돌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누구도 짐작지 못한 생이별이었다. 약속 장소에서 아버지를 만났을 때 얼핏 어머니는 무언가 잘못 되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해주에서 인천행 배를 타면서는 아주 느낌이 좋지 않았다. 혹시 크게 잘못 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미군이 제공한 LST에 오르는데 미군 병사가 옷가지 보따리를 뺏더니 바다로 던져버렸다. 사람 한 사람 더 타는 일이 급하다는 거였다. 그때까지도 그곳이 한 많은 피난살이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스물다섯의 어머니는 까맣게 몰랐다. 비극의 운명이 찾아왔다는 것을 몰랐다. 배는 부산으로, 거제도로, 이리저리 떠돌다가 마지막 종착지로 제주도를 택했다. 부모 자식과의 생이별을 시작으로, 그 파란만장한 인생선(人生線)이 자신의 눈앞에 놓이게 될 줄을 그때까지도 어머니는 몰랐다. 제주도에서 나를 낳을 때까지도, 해를 넘기며 아버지가 뭍을 떠돌아다니며 정착지를 찾아 헤맬 때에도,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이 조기에 그렇게 허망하게 끝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제주도는 어머니에게는 그야말로 따뜻한 남쪽나라, 머나먼 이방이었다. 그곳에서의 삶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모든 게 구름 잡는 일처럼 느껴졌다. 해녀들의 길게 내뿜는 숨소리를 들을 때마다 꿈을 꾸는 듯했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났을 때 어머니는 나를 낳고 잠시 해녀 일을 배웠다. 그러나 짧은 숨 때문에 본격적으로 그 길로 나서지는 못했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내 출생지를 한 번 돌아다보고 왔다. 제주시 K읍은 맑은 바닷물과 조개껍질이 주성분인 하얀 모래로 유명한 곳이었다. 검은 바위들이 해안가 도로의 경계석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형은 나를 업고 가서 검은 바위에 앉혀놓곤 동무들과 헤엄을 치며 놀았다.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온몸이 발갛게 익었다. 울다울다 지칠 때쯤이면 어머니가 밭일을 끝내고 나를 데리러 왔다.

“애기를 이렇게 두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갸?”

어머니의 호된 핀잔에도 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잘못 장소를 찾았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물가라 더 위험했다. 물만 위험했던 것은 아니다. 한 번은 어머니가 나를 방안에 혼자 두고 낮잠을 재웠는데 나중에 보니 내 머리맡에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내려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형이 밖에서 갖고 놀다가 들여놓은 막대긴 줄 알았다고 한다. 그게 구렁이라는 걸 알고 주인집 할머니에게 달려갔더니 할머니가 쌀알을 뿌리며 달래서 내보내더란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바닷가 바위 위가 안전했다. 푸르고 깊은 바다와 속 없이 검은 바위들과 두 명의 어린 자식들을 보면서 젊은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속을 나는 짐작도 할 수 없다. 고립된 삶은 언제나 ‘사건 그 자체’들만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낯선 상태에서는 생각도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낯선 이방에서의 삶은 늘 현재만 강요한다. 어머니는 더했을 것이다. 밤도적처럼 들이닥친 운명 앞에서 무슨 생각인들 들 수 있었겠는가.

형에게는 제주도 시절의 그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전혀 없다. 어머니에게 들었던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내 기억을 재구성한다. 내 육체가 기억하는 최초의 장면은 또렷하다. 제주도를 떠나 목포에 도착해서 기차로 서울로 올라갈 때가 내 기억의 출발점이다. 이리저리 역 구내에서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철로를 본 것이 내 최초의 기억이다. 그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다 놀란다. 그 나이에 있었던 일을 어떻게 다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다 기억하는 건 아니다. 어머니 무릎과 아버지 무릎에 번갈아가며 얹혀서 왔다는 것과 엿가락처럼 구부러지던 그 철로길이 전부다. 기억력이라면 단연 형이 압권이다. 형은 총명하게도 기차 안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까지 다 기억하고 있다.

“야, 한강이다~ 저것 보라우, 저게 한강이야.”

아버지는 기차가 한강을 건널 때 그렇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게 그렇게 신나는 일일까? 형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참 낯설었다고 했다. 요즘 드는 생각이지만 형에게는 평생 아버지가 낯선 존재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르긴 해도 큰형 문제가 형과 아버지 사이에서 늘 모종의 콤플렉스 상황을 만들어내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한 번씩 큰형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애써 외면하곤 했다.

그 와중에 기억에 갑작스런 혼선이 왔다. 대전에서 살 때의 고모님과 관련된 그림이다. 갑자기 고모님의 ‘붕대감은 흰 손’이 떠올랐다. 그리고 콩쥐 고모님의 붕대 감은 흰 손이 팥쥐 어머니의 심술 탓이었을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한 끼 양식을 빌리러 온 동갑의 시누이에게 팥도 아니고 멥쌀도 아니고 보리쌀 한 됫박을 내 주었다. 콩쥐는 그것을 치대고 치대어서 하얀 쌀밥으로 만들었다. 그러느라 손바닥이 헤져 병원까지 갔어야 했다. 콩쥐는 자신의 손을 버려서 식구들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한 끼 밥상을 얻은 것이다.

하루는 고모님댁에 놀러갔다. 혼자서도 다닐 수 있었으니 가까운 곳이었던 모양이다. 그날 따라 고모님은 나에게 쓸데없는 역정을 냈다. 조막만한 발바닥에 무슨 묻을 것이 있다고, 아장거리며 고모집을 찾은 어린 친정 조카의 발바닥을 세숫대야 안에서 아프게 문질러댔다. 그래도 나는 울지 않았다. 울면 콩쥐 고모가 더 무섭게 할 거니까.

연전에 마침 대전에 볼 일이 생겨 일이 끝난 뒤 옛 기억을 더듬어 옛날 집터를 찾아가 보았다. 성당이 있고, 수녀원이 있고, 고등학교가 있고 좀 떨어져서 개천이 있었다. 고모부가 그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택시를 타고 **성당으로 가자고 했더니 출발하자마자 금방 내려줬다. 지금은 시내 한 복판이었다. 걸어도 10분 안에는 닿을 곳이었다. 어릴 때는 한적한 시골 느낌이었다. 그때는 집 뒤가 야산이었고 그 기슭에 성당이 있었다. 형과 함께 힘들게 걸어 올라갔던 기억이 있다.

“사람 뼈가 있어야(무섭지 않니?) ~”

그 때 학교를 다니던 몇 살 위 동네 형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던 게 생각났다. 귀신이 나올지도 모르니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협박 아닌 협박이었다. 이번에 가 보니 성당 앞에(옛날 정문 옆에) 그 자세한 사연을 적은 입간판이 서 있었다. 6.25 때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학살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살던 그 당시로는 불과 10년도 채 안 된 과거지사였다. 모두 쉬쉬하며 입단속을 할 때였다. 살육의 현장, 그 언저리에 집터를 정한 것 자체가 우리가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 같다. 풍경은 이미 많이 바뀌어 있었지만 골목길은 여전했다. 성당 아래로 신작로로 통하는 작은 골목길이 그대로 있었고 좌우로 여남은 채의 단층집들이 있었다. 저 집들 중의 하나가 우리집이었을 것이고 그 옆이 또 고모님댁이었을 것이다. 내 나이가 다섯 살이 되기 전의 일이다. 팥쥐 어머니, 콩쥐 고모님. 한 분은 일찍 가셨고 한 분은 여태 계신다. 어머니는 희미하고 고모님은 선명하다. 그게 슬프다. 내겐 외가 쪽 피가 이제 다 말라버린 것 같다. 옛날이야기는 언제나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다. 죽은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눈도 없고 귀도 없다. 그런 생각이 드니 갑자기 심청가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오른다. 황후가 된 딸 앞에서 심봉사가 하는 넋두리다. “나는 아들도 없고, 딸도 없소~”라는 심봉사의 하소연이 가슴을 후벼 팠던 기억이 난다. 팥쥐 아들은 그게 슬프다. 어머니와의 추억은 토성 앞에서의 몇 년 간이 거의 전부다. 그 앞뒤의 시간들은 희미하고 불친절하다. 어머니와 내가 함께 했던 세상은 아무리 길어도 10년이 안 된다. 그나마 여기저기 토막난 채로 따로따로 버려져 있는 쓸쓸하고 서러운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

어머니는 그렇게 일찍 내 곁을 떠났지만 여전히 나는 어머니를 쉬이 떠나지 못한다. 어머니가 내게 남긴 모든 것이 신경증이 되어 시간을 거스른다. 어머니가 내게 남긴 스크래치(scratch) 중의 하나가 냄새 과민증이다. 냄새가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 잦다. 가장 싫은 게 향수다. 어쩌다 그것이 후각을 파고들면 기분상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거의 전이 수준의 발작으로 발전한다. 한 번씩 잘못 걸리는 날에는(겨드랑이에서 냄새가 나는 이일 때가 많다) 그 향기 입자가 내 코에서 완전히 소거될 때까지 중단 없이 재채기가 나온다. 주변 사람들의 기분이 나빠지는 건 두 말할 것도 없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런 일을 당하면 얼른 중간에서 내려 버린다. 

비단 냄새뿐이 아니었다. 소리도 그랬다. 아무리 더워도 잘 때는 꼭 창문을 닫고 잔다. 글을 쓸 때 들리는 예상 밖의 소리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일부러 백색소음을 틀어놓고 글을 쓴다. 어머니는 그림도 잘 그렸지만 냄새로 무엇이든 분간을 잘 해내었다. 음식은 물론이고, 옷이 깨끗하고 더러운 지도 모두 냄새로 파악했다. 우리 몸에 배인 때의 냄새 같은 것들을 예민하게 집어내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가 만든 음식은 우선 그 냄새부터가 좋았다. 그 생각을 하니 지금도 숙주나물을 무치던 어머니의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코끝을 맴돈다. 지금도 내게는 음식 냄새가 식욕을 돋우는 절대적인 요소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팥 삶는 냄새와 숙주나물 무치는 냄새다. 그 황홀한 냄새를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어머니가 세상을 버리기 대여섯 달 전쯤부터 당신이 칩거한, 두 사람 눕기도 비좁은 골방 안으로 단 한 번도 나를 들이지 않았다. 당신 곁에 남아있는 ‘하나 남은 아들’을 그렇게 어머니는 박대했다. 첫아들 손을 눈보라 속에서 놓아버렸던 것처럼 그렇게 속계에서의 마지막 핏줄과의 손도 놓아버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신 방안의 냄새, 당신의 체취가 너무 역겹다는 거였다. 그때 어머니가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다.

“몰골도 몰골이지만 냄새가 너무 안 좋으니끼니 들어오지 말라우”

고개를 돌린 채 내게 그렇게 말했다. 일체의 바깥출입이 없이 방안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던 때였으니 골방 안의 냄새가 향기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미 나는 그 냄새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그냥 어머니 곁에 있고 싶었다. 어머니 곁에서 친구집에서 빌려온 무협지도 읽고 어머니의 잔심부름도 도맡아 하고 싶었다. 설마 하면서도, 어머니와의 이별을 그렇게 치러내고 싶었다. 나는 왜 냄새가 어머니와 나 사이를 가로막아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막무가내였다.

“들어오지 말래두!”

얼씬거리기만 해도 어머니는 단호하게 내쳤고 나는 그런 어머니를 거역하지 못했다. 그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통 기억에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섬망(譫妄)이라는 망각증이었다. 자아가 감당하기 어려운 강한 자극을 받고 혼란에 떨어지거나 약물(알콜) 중독이 심할 때 발생하는 정신질환이다. 슬펐다.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슬픈 게 아니라 그것 때문에 어머니와의 기억을 잃는다는 게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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