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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 Jan 26. 2021

초록색 약이 있어야 체스를 둘 수 있어

넷플릭스 시리즈 <퀸스갬빗> - 안정제 '리브륨'에 중독된 베스

당신의 직업이 체스 선수라고 하자.

어떤 약을 먹기만 하면, 머리 위로 몇 수 앞의 체스판이 그려지는 경험을 선사한다면, 당신은 과연 그 약을 먹는 것을 거부할 수 있을까?


이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하는 드라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스 갬빗'이다.


1967년 파리, 잠에서 깨어난 채 엉망이 된 방, 어질러진 테이블 위에서 멈칫하고 손이 제일 먼저 가는 곳, 바로 초록색 약이다.

문제의 초록색 약, 위기의 순간 번번이 나타나 베스를 구해준다. 그 구원이 진짜 구원이었을까. ©넷플릭스 퀸스 갬빗


베스(안야 테일러 조이)의 인생에서 초록색 약을 처음 만난 건 아홉 살 때 들어갔던 고아원에서부터였다. 집단생활을 하는 아이들은 매일 급식처럼 약을 받았고, 먹어야 했다. 온화한 성품을 길러준다는 초록색 약과, 주황/갈색은 튼튼한 몸을 길러준다는 이유로. 약병엔 Xanzolam이라고 새겨진 그 약을 말이다(자낙스도 알프라졸람도 존재하지만, 두 약 모두 초록색 약은 아니고, Xanzolam은 실존하는 약은 아니다)


베스보다 먼저 고아원에서 살고 있었던 아이들은 이 약물의 마법에 이미 취했다. 단순히 약물의 마법에 취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약을 현명하게 활용할지, 약물 효과 극대화의 방법마저 스스로 찾았다. 졸린은 말했다. 나라면 초록색은 아껴두었다 밤에 먹겠다고. 약물의 졸음 진정 효과를 제대로 체감했었기 때문이겠지. 그저 성품을 온화하게 해 준다고 말한 약이 실상은 단체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 시끄럽게 하지 않고,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만 같다.

초록색은 아껴 두었다, 밤에 먹는다고 한다. 무슨 약인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미 수면 목적으로 약을 활용하고 있다. 아이들이란. ©넷플릭스 퀸스 갬빗
이렇게 운명적인 약 X와의 강렬한 첫 만남이 시작됐다.


그리고 베스는 내약성(intolerance)으로 인해 마치 환각과도 같은 꿈속에 빠지게 된다. 건물 관리인인 셰이빌에게 배워 체스를 조금 알던 베스는 자리에 누웠지만, 잠은 커녕 천장이 체스판으로 편하고, 다음 그다음 수가 읽히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 생경한 감각에 취해 양치컵에 숨겨 두었던 X를 꺼내 먹고 또 먹는데. 그런데 그즈음 고아원에서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약물에서 안정제(tranquilizer)가 빠지게 된다. 성장기 아이들에게 필요치 않은 안정제를 먹여온 것이 들통이 낫기 때문이다.


베스는?

약 덕분에 머리가 새하얘 지는 경험에서 몇 수 앞의 체스판이 보이는 환상적인 경험을 이미 알아버렸는데?


약물 의존 증상(원작 소설의 작가가 어렸을 적 류머티즘으로 약물을 많이 먹었을 때, 꿈을 굉장히 많이 꾸었던 경험에서 착안한 에피소드라고 한다)이 이미 시작된 베스는 해서는 안될 일을 한다.


약국의 담을 넘었다. X를 손에 넣기 위해서


영화 상영 중 전쟁 씬의 상영에 맞추어 약국 담을 넘는다. 눈 앞에 X가 보이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퀸스 갬빗
한 움큼, 또 한 움큼을 퍼 먹고, 약병을 깨뜨리고 만 베스, 급기야 과량 복용으로 의자에서 추락한다. 기면 증상의 발현이다 ©넷플릭스 퀸스 갬빗


아홉 살 어린 나이지만, 베스에게 약물 X는 전부와 같았다. 정신과 약물들의 라벨에 하나같이 약물 의존성에 주의, 갑작스러운 중단은 반동(Rebound) 증상을 일으킬 수 있음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베스는 그런 위험을 알지 못했다. 의존성이 높은 마약류 약물에 중독된 사람들이 마약 또는 유사마약을 훔치는 사건(프로포폴, 에토미데이트)들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유리병 안의 알약을 퍼먹던 베스는 마침내 약을 훔쳐먹은 사실을 들켰을 때, 기면(drowsy) 상태로 의자에서 떨어지고 만다.


어떻게 될까 걱정한다지만, 주인공에게는 나름의 사연(주인공 버프)이 있지 않나. 무사히 잘 자라 입양을 가게 된 베스.

새로운 가정에서는 잘 살기를 바랐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화목해 보이던 부부였지만, 양부는 사업을 핑계로 다른 지역에서 다른 가정을 이뤘고, 양모는 이로 인한 불안 증상을 보이고, 예민한 모습과 더불어, 기껏 입양한 아이에게 좋은 옷을 사 주지도, 비교적 간단한 오븐 사용법 하나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입양이 되며, 약 X와의 인연은 끊어진 줄 알았는데, 이게 왠 걸, 양어머니가 처방받아 복용하는 약이 또 그 초록색 알약이 아닌가.


"이 의사는 약을 항상 모자라게 줘"

가득 차지 않은 약을 보고, 심부름을 한 딸을 의심하기보다, 매번 처방전을 모자라게 준다고만 생각하는 엄마.

이렇게 데면 데면한 사이였지만,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다니, 어머니의 약 심부름을 하는 베스. 약병이 비어 보인다. ©넷플릭스 퀸스 갬빗

아버지가 떠나고, 오롯이 둘만 남은 모녀,

셰이빌에게 참가비를 빌려, 겨우 나간 체스대회에서 우승한 베스는, 상금으로 100달러를 얻는다.

그리고 여자들은 체스를 하는 게 아니라던 엄마는, 나를 떠나간 남편이었던 사람에게 10불 20불에 의존하지 않고, 돈을 스스로 벌 수 있다는 사실에 태세 전환을 한다.


바로,

베스의 체스대회 참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도 빼먹고(물론 합벅적 병결이다. 엄마가 증언한) 전미 일주를 넘어, 때로는 해외 대회에 참여하기도 한다. 인터넷이 없고, 실시간 뉴스가 없던 때라 학교를 빼먹은 베스가 체스대회에 나갔다는 걸 알 수 없어서였겠지만 말이다. 엄마는 비싼 호텔을 멋대로 예약하는 바람에 당초 목표로 했던 상금 헌터는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친구 같은 애증의 모녀 관계가 소녀 베스가 좀 더 자라는 시기까지 쭈욱 계속된다.


전 세계에서 그녀보다 강하다는 러시아 챔피언 보르고프와의 대결을 위해 찾아갔던 멕시코 챔피언십의 호텔방에서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엄마가 죽고 만다. 아마도 간염일 것이라고.


엄마의 죽음으로 상심한 그녀, 검안을 위해 찾아온 의사는 목격자이자, 변사자의 가족인 베스를 챙기는데, 베스는 필요한 물건이 있다. 바로 안정제다.

엄마의 죽음 앞, 안정제를 요구하는 베스 ©넷플릭스 퀸스 갬빗

그녀가 어린 시절 손을 댔었고, 엄마도 먹었었던 그 초록색 약, 초록색 약의 분류가 바로 안정제(tranquilizer)다.

호텔에 진정제는 있다고 하지만 단호하게 거부한다. ©넷플릭스 퀸스 갬빗

호텔에서 근무하는 의사는 진정제는 있다고 설명하지만, 진정제는 원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안정제와 진정제는 뭐가 다른 걸까?


기전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벤조디아제핀계 약물 같은 경우는, 저용량일 때는 불안에 대한 안정, 고용량에서는 수면을 포함한 진정 작용을 하기도 하다 보니, 실제 환자를 대할 때면, 통칭 신경안정제라는 말로, 통용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안정제와 진정제를 적어도 일반 대중은 크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의미 이기도 하다.


안정제(Tranquilizer)는 근육을 이완시키고, 긴장과 불안을 감소시킴으로 사람을 차분하게(calm) 만드는 약으로 진정이나 수면 작용은 없다. 페노티아진(Reserpine), 저용량 벤조디아제핀계 약물이 여기에 속한다.


진정제(Sedative)는 활성, 동통, 중등도의 흥분상태를 줄이는 약으로, 생리학적 기능적인 활동을 낮춘다. 당연히 수면 작용도 동반한다. 바비 츄레이트계, 고용량 벤조디아제핀계가 이에 속한다.


즉, 이론적으로 가장 큰 차이는 졸음을 유발하느냐 아니냐다.


초록색 알약의 정체는 리브륨이었다. ©넷플릭스 퀸스 갬빗


베스가 애타게 찾았던 리브륨은 분류상 안정제에 속한다.

저용량으로 쓰는 벤조디아제핀계 약물 이어서다. 성분명으로는 클로르디아제폭시드(Chlordiazepoxide), 한국에서는 리버티(Liberty)라는 상품명으로 팔린다. 오리지널인 리버티는 품목 허가번호로 볼 때, 1981년 허가를 받았고, 지금 4개 회사에서 5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지금은 환인제약에서 생산 판매하지만, 원래는 미국으로 망명한 폴란드 출신 오스트리아 약학자였던 슈테른 바흐가 로슈 연구원으로 취업, 개발한 것으로 로슈가 1957년부터 오래도록 유통해왔다. 이 로슈는 여전히 바리움(디아제팜)을 생산, 판매하고 있으니, 리브륨의 아들뻘인 바리움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두 가지 모두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상 마약류에 속한다.


일반적인 불안이나 긴장부터, 건강상의 문제 혹은 수술 전과 같은 특수 상황에서의 불안 긴장, 그리고 알코올 금단 증상에 쓰이는 이 약 10mg 도 초록색이다.

에메랄드 빛 필름 코팅정으로 비록 초록 캡슐은 아니지만 말이다.

리버티 정, 퀸스 갬빗의 리브륨이 이 약이다. 출처 - 식약처 의약품 안전나라

다른 벤조디아제핀계와 유사하게 시냅스 후 GABA 뉴런에 작용하는 리브륨(다른, 벤조디아제핀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부부의 세계 민현서 편을 참조, https://brunch.co.kr/@musicalpharm/16) 은 제일 먼저 상업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벤조디아제핀계 약물로, 소실 반감기가 30~100시간에 이르러, 디아제팜만큼이나 반감기가 긴 약이다. 복용 후 작용을 나타내기까지는 약 1시간가량이 소요된다.  저 초록색 알약으로 한 번에 1알부터 5알까지를 하루에 2~4번 복용할 수 있는 약이고, 하루 최대는 100mg, 초록색 알약 20개 분량이다.


한국에선 마약류로 규정된 약물인데, 놀랍게도 멕시코에서는 처방 없이 살 수 있다니. 아 나르코스의 나라였고, 1960년대임을 감안해도 놀랍기는 매한가지다.

멕시코에서 리브륨은 OTC 였다고 한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넷플릭스 퀸스 갬빗


대신 호텔 의사는 메프로바메이트를 먹어보라고 권하는데....


리브륨 대신 메프로바메이트를 추천하는 의사와 응? 그건 뭐지? 하는 베스 ©넷플릭스 퀸스 갬빗


메프로바메이트(Meprobamate)는 지금 한국에선 구할 수 없다. 2012년에는 유럽 의약청(EMA)에 의해 시장 철수를 권고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미국이나 대만 등 일부 국가에선 여전히 유통 정보가 확인되는 약이기도 하다. 항불안제로 한 때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렸던 영광의 과거도 있는 약이지만, 추후 벤조디아제핀계 약물들이 개발되고 개량되면서 영광의 세월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메프로바 메이트는 불안 작용을 줄인다고는 하지만 졸음을 유발한다. 즉, 안정제가 아니라 진정제다. 먹고 나면 1시간 이내에 진정(Sedation) 상태에 도달하고, 반감기는 약 10시간가량인 약물이다.


지금 생각하면, 메프로바메이트는 이미 오래 지난 약물인데 싶지만, 보다 강력한 효과가 있는 리브륨을 달라는, 리브륨은 약국에서도 그냥 살 수 있다고 알려주며, 굳이 지난 메프로바메이트를 먹어보라고 하는 멕시코 의사의 진의를 알 길은 없다.


메프로바메이트라고 해서 의존성이나 중독 위험이 덜한 거도 아니다 보니, 말이다.

이 메프로바메이트는 밀타운(Miltown)이라는 이름의 상품명으로 팔렸고, 엄마들의 작은 알약(Mother's Little Helper)이라는 가사로 롤링스톤즈의 노래에 나오기도 했다. 베스의 엄마처럼, 자신의 능력치 대비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없던 그녀들이 안전하게  가정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도와주는 약물이라고 마케팅을 했다고 하니, 어쩌면 시대의 단면과도 닿아있다.


다행히도 베스는 또 한 번 보르고프와의 대국을 앞두고 찾아온 안정제의 유혹을 꿋꿋이 이겨내지만, 점진적 감량도 없이, 알코올 중독까지 겸했던 환자가 하루아침에 약물을 끊는다는 것, 그건 꿈같은 얘기다. 그러기에 소설, 그리고 드라마 겠지만,


중독을 일으키는 약물들이 위험한 건 쉽게 리바운드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도 있다. 그래서 약을 끊을 방법도 정해져 있다. 서서히 1~2주마다 총량의 10~25% 씩 단계적으로 약물의 양을 줄여야 한다. 리바운드를 예방하며 의존성 있는 약물을 서서히 줄여나가는 방법으로 약품의 라벨에도 제시된 방법이다.


이렇게 보면 끊었다기보다는 잠시 참고 유혹을 한 번은 이겨낸 것 같은 베스지만, 무사히 약물의 손짓을 이겨내고, 보르고프를 이긴 것처럼 우뚝 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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