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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 Sep 06. 2021

후쿠시마, 서울, 그리고...
연극 <공포가 시작된다>

키타하라 타케루의 백혈병, 알았더라면 놓치지 않았을 전조증상


대학로 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극단 산수유의 "공포가 시작된다"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열흘뿐이다. 

극단 '산수유'라는 이름만 보고 선택했다. 

그리고 극장에 도착하기 전 알고 있었던 내용은, 언젠가 다른 극에서 보았던 몇몇 배우들의 이름 그리고, '후쿠시마'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사실뿐이었다. 


연극 <공포가 시작된다>(토시노부 코죠우 작/ 류주연 연출)는 9월 3일부터 12일까지 딱 열흘만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2011년 3월,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체르노빌에 이은 역사상 2번째, 7등급 원전 사고다. 격납용기가 한꺼번에 녹아내려, 방사능 유출수가 바다로 빠져나갔고, 그 사고 수습은 10년이 지난 올해까지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연극은 그 도쿄전력의 하청업체에서 사고 수습을 위해 일하는 타케루와 동료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키타하라 씨로 불리는 타케루는 도쿄전력의 하청업체에서 한참을 일하다, 죽었다. 그리고 내일은 그의 49재날이다. 


티켓을 교환하고, 자리를 고르고 나면, 좌석번호가 부착된 티켓과 함께 리플릿은 준다. '공포가 시작된다'에 대한 간략한 정보, 실제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키타하라 씨(김용준 분)는 죽었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그리고 그의 49재 하루 전날, 키타하라의 직장 동료였던 쿠시마 카츠히로(신용진 분)의 아내 쿠시마 히사코(김선미 분)의 방문에서부터, 지나온 이야기들을 교차하며 보여준다. 시점의 전환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시점의 전환이 오히려 다중의 심리, 실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보여 더 사실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 기저에는 훌륭한 배우들의 열연이 바탕이 되어있다. 

캐스팅 보드를 찾지 못한 내가, 무대를 기억하는 법, 개막날이었던 9월 3일 히요리는 박시유, 쇼타는 홍성호 캐스트였다. 

그리고 훌륭한 연기로 구성된 연극 내내, 어쩌면 도쿄전력의 하청 노동이 주는 이 메시지가 단순히 후쿠시마에서 비롯된 공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는 쿠시마 가의 아들 쇼타(홍성호 분)에게는 보이지 않는 방사능에 대한 공포이고, 아내 히사코(김선미 분)에게는 남편의 건강과 안녕에 대한 불안이기도 하다. 


나 만큼이나 동료를 중요시 생각하는 키타하라 씨, 타케루(김용준 분)에게는 원청과 하청의 권력관계에 대한 두려움, 동료들의 일자리를 내가 잃게 만들 수는 없다는 거대한 힘에 대한 두려움이고, 그의 아내 무쓰미(우미화 분)에게는 남편의 어려움을 짐작하면서도, 그의 가부장적 면모나 혹은 '경제적 이점'에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 이기도 하다. 


류짱, 류세이(김신영 분)와 히요리(박시유 분)에게는 후쿠시마 출신 둘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기도 하다. 타쿠미(반인환 분)가 두려움에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다른 직업을 찾지 못한 것, 그리고 키타하라 씨의 어지럼증이나 넘어짐을 보면서, 든든한 버팀목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까지 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일본에, 후쿠시마에 그치는 걸까. 
산재, 특히 직업성 암은 한국에선 없는 일일까. 


미주노선을 오래 탔던 아시아나 항공 승무원이 전리방사선에 노출되어, 타케루와 같은 급성 백혈병에 걸린 적도, 삼성 반도체의 유미와 동료들이 급성 백혈병에 걸렸고, 안타깝게도 사망했으며, 그 산재를 인정받기 까지의 지난한 과정이 있었다. 그나마 탄광 노동자나 석면 취급자의 중피종은 인과성이 보다 뚜렷하기에 인정받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고(일어나지 않아야 좋을 일이기에, 이것이 다행스럽다거나 수월하다고 해 좋은 일은 아니다) 전기나 전자 노동자의 다발 골수종 등 암 발병 또한 종종 발생하는 일이다. 


그리고 키타하라 씨가 걸렸던, 급성 골수성 백혈병은, 그 발생원인으로 방사선 노출을 명시하고 있다. 방사선 노출과의 인과관계가 꽤나 확립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 근거로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지역에서의 급성 백혈병의 발생빈도가 10~15배가량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 이유다. (일본 히로시마 원폭피해, 러시아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예)


공포가 시작된다가 펼쳐지는 중앙 무대. 

급성 백혈병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급성 골수성 백혈병(AML)은 그 진행 속도가 매우 빠르다. 암세포가 두배로 불어나는데 걸리는 시간을 뜻하는 TDT(Tumor Doubling Time)이 52시간가량(44~60시간)으로, 대개 수일~일주일 내로 암이 퍼지는 성질을 보이는, 일단 암이 혈액 중에 관측되고 나면, 그 퍼지는 속도가 상당히 빠른 암종이다. 빠른 치료가 중요한 암이라는 뜻이다. 


백혈병은 고형암처럼 1기~4기의 병기로 나누는 대신, 염색체 변이를 포함한 예후 인자들에 따라, 저위험군, 중간위험군, 고위험군으로 나누는데,  예후가 좋은 군에서는 1차 관해 후에 고용량 씨타라빈 항암제를 포함하는 공고 요법을 시행하는 경우 항암 화학요법만으로도 60~80%가 완치를 바라볼 수 있고, 표준 위험군에서는  관해 유도 치료 및 관해 후 치료를 할 경우 약 40~ 60%까지 완치가 가능하지만, 예후가 나쁜 군은 항암 화학요법으로 관해 및 공고 요법 시 10~15% 정도만 완치가 된다. 다른 혈액암과 유사하게 급성 골수성 백혈병은 조혈모세포 이식을 통해 완치를 기대할 수 있는 질병이다. 그런데 키타하라 씨는 8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는 아마도 예후가 좋지 않았고, 진단이 늦어(몇 번의 전조 증상이 있었는데, 그는 한사코 병원에 가는 걸 거부했다) 치료의 효과가 좋지 못했던 것 같다. 관해 유도 치료(Induction Tx)를 통해 1차 관해를 얻지 못해, 공고 요법이나 이식과 같이 완치를 기대할 수 있는 치료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짐작해 본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병원 근무를 하던 시절, 차트를 확인하다 보면 유난히도 건강검진 중 우연히 발견된 경우가 많은 암종이 위암과 더불어, 급성 백혈병이었다. 대부분 환자의 증상이 말초혈액에서의 빈혈, 백혈구 및 혈소판 수의 감소로 인한 증상이다 보니, 피검사를 하게 되는 건강검진에서 확인되는 비율이 특히 높을 수밖에 없다. 빈혈로 인한 피로, 쇠약감, 안면 창백 등이 있고, 혈소판 감소로 인한 쉽게 멍이 들거나, 코피가 나거나 잇몸 출혈이 발생하며, 면역 기능의 저하로 인한 감염으로 발열 등의 증상이 발생할 수 있고, 식욕부진과 체중 감소 등을 특징적으로 한다. 


여기까지만 봐도, 멍이 들었다. 멍이 늘어났다며 파스를 붙여달라고 하고, 코피를 흘리고, 소바 한 그릇을 먹지 못하며 입맛이 없다고 했던, 키타하라 씨의 모습들은 모두 백혈병의 전조증상과 일치한다. 


그리고, 실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전과 사고 후 7년의 사이를 두고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시 시립병원의 암 발생 통계를 보면 모두 더 많이 발생했다. 사실 단면적으로 시점을 잘라서 봤기에, 트렌드를 보다 장기적으로 볼 필요가 있어, 이것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표를 인용하려고 했지만, 표가 트렌드를 모두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시점만을 쪼개어 비교해 둔 것이라 도리어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인용은 생략한다)


키타하라 씨처럼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진단되면, 최초 치료는 관해 유도 치료를 시행한다. 기본적으로 아라씨(Ara-C)라 부르기도 하는 씨타라빈과 안쓰라사이클린계(다우노루비신 또는 이다루비신 중 하나, 독소루비신 또는 미토마이신은 선택하지 않는다)의 조합으로 7+3 요법을 대개 시행한다. 이 결과 완전관해(CR : Complete Remission)가 유도되면, 다음 단계 치료로 넘어갈 수 있으며, 이때 위험도에 따라 다음 치료가 결정되는데, 공고 요법 및 동종 조혈모세포 이식을 실시하게 된다. 


새로 진단된 급성 골수성 백혈병의 치료 - 출처 : 국립암센터

 

구체적으로, 급성 골수성 백혈병의 항암 화학요법은 항암제 2~3가지 약물들을 함께 사용하는 병용요법으로 흔히 M3 type이라 불리는 전골수성 백혈병은 다른 아형과 달리 관해 유도에 ATRA(비타민 A)와 안트라싸이클린 계열의 항암제를 함께 투여하고, 1차 관해유도시에 공고 요법으로 항암제 치료를 하며 ATRA를 유지요법으로 2년간 투여하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 치료방식은 유사하다. 최근에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FLT3 유전자가 있는 경우, FLT3 inhibitor를 추가하기도 한다. 


관해 유도 치료는 혈액과 골수 내에 존재하는 백혈병 세포를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관해 유도 치료는 안트라싸이클린 계열의 약제를 3일간 투여하고 시타라빈을 7일간 투여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고 완전관해에 도달할 확률은 약 70~80% 정도이지만, 병의 관해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재 관해 치료를 받아야 한다. 완전관해가 되면 골수검사에서 골수 아세포가 5% 미만이며 백혈병으로 인한 증상이 사라지게 되고, 이때, 혈액과 골수가 정상적인 모양과 기능을 되찾게 되나 치료 후 완전관해가 되었더라도 1억 개의 잔존 백혈병 세포가 남아 있을 수 있어, 완전관해에 이른 급성 백혈병 환자에게는 재발을 방지하고 완치를 위해 관해 후 치료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 관해 후 치료는 공고 요법 또는 강화요법이 있고, 이 같은 강력한 치료가 완치율과 장기 생존율 등을 높일 수 있다. 


공고 요법으로는 관해 유도 치료와 같거나 다른 약제를 사용하며 관해 유도 이후 4~5주가 지나면서 혈액수치가 회복하게 되면 공고 요법을 시행하는데, 공고 요법의 횟수에 관해서는 아직 표준화가 된 것은 없으나 대부분 3~4번이 적당하다고 간주된다. 


어쩌면 류헤이나 딸에게서 HLA Typing이 맞아 조혈모세포 이식을 시도하는 신파의 노선을 밟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결말을 택하지 않고, 담담히 직업성 암의 어쩌면 가장 나쁜 예후, 그리고 그 직업성 암을 인정받기 위한 기저의 원인,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불안, 구조적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극이 주는 울림이 더 컸다. 
어설프게 희망을 그리지 않아서, 그래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남겨진 사람들의 불안, 갈등, 사회 구조의 불안, 서울에는 키타하라와 그 동료들이 없는가를 생각하게 해 줘서 말이다. 
커튼콜, 촬영이 가능했다. 작업원들과 기자, 류헤이, 코하루, 쿠시마 가족, 키타하라 가족, 그리고 모두

극이 다루고 있는 탈핵 노동은 하청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하청에 재하청은 재정과 경제 논리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원작자 토시노부 코죠우의 치열한 취재로 이루어졌다. 실화에 기반했다는 이야기다. 재정을 절감하고, 안전성을 강조하기 위해, 방독 마스크를 방진 마스크로 바꾸고, 이를 원한다면 방독마스크를 쓸 수 있지만, 소속과 실명을 쓰라고 하는 바람에, 실상은 방독 마스크를 쓸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놨다. 


키타하루도 그랬다. 어지럼증으로 넘어져 다쳤지만, 산재 청구를 하지 말라는 사장의 말에, 어쩌면 류헤이나 타쿠미가 일자리를 잃어버릴까, 말하지 못했다. 불안하지만, 남편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할 수가 없었던 아내도 있었다. 사는데 돈이 필요했고, 무너져버린 후쿠시마에서 많은 돈을 벌고, 적금을 더 많이 넣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더 나은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카쓰히로는 같이 일하는 동료가 아프면 이 위험한 일을 그만두마, 아내인 하쓰미와 약속을 했지만, 키타하루의 입원 앞에서 그러마 말할 수 없었다. 아프지만 동료들을 위해 산재신청도 못하고 참았던 그 죽일 놈의 의리 때문이었다. 그들이라고 해서 왜 두렵지 않았겠는가. 키타하루가 나 사실은 불안했다 하고, 흘리는 회한의 눈물처럼, 두려움, 공포가 없었어, "상관없잖아"를 외치는 남자들의 바보스러움 때문이 아니었다. 동양권에 많은 우리 동네, 우리 마을, 우리 회사의 과도한 공동체 의식 때문만도 아니었다. 


우스꽝 스러운 춤과, 개그는 이미 찾아온 공포를 이기는 그들만의 방식이었다. 


우리나라도 산재 인정은 어렵다. 특히 직업성 암은 5mSV(밀리시벌트)이상의 큰 방사선에 노출된 경우가 아니라면, 암의 인과관계가 아직도 불분명 하기에, 다른 원인이 모두 배제될 때에만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역설적으로 인정되게 된다. 길게 썼지만, 한국에서 이 일이 일어났을 때, 산재로 인정될 가능성은 여전히 낮다는 것이다. 육종암에 걸려 투명하던 소방관의 이야기, 삼성 반도체 백혈병 이야기, 아시아나 승무원의 백혈병 이야기가 그러했다. 


그런가 하면, 위험의 외주화에 대해서는 여러 하청 노동자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했다. 


검진이나,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경제적 안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일을 그만두면, 경제적 안정은 떨어진다. 경제적 안정이 감소하면, 건강한 삶이 아니라 삶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선뜻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것, 그래서 그들은 다시 위험한 환경으로 내몰린다. 


1년에 20 안 먹었는데, 백혈병에 걸린 게 아니라, 그 기간을 모두 쪼개어 봤더니, 20이 넘은 1년이 총 8번 있었고, 그중 사망 2년에 인접한 시점에 6번 분포했다는 기자의 말,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기사감은 될 수 없다는 말. 그 말을 듣는 아내 무쓰미(우미화 분)의 심정은 어땠을까.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라가 나를 지켜줄 거라 믿는 다던 남편의 말과 다르게, 사실은 아주 위험한 현장에 노출되어 있었고, 그를 말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 어쩌면 그토록 믿었던 나라로부터 배신당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고무줄 같은 기준이 한국엔 없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모두가 떠난 무대, 남은 폐기물들. 무대를 담고 떠난 관객인 내 마음에 이 폐기물들의 잔상이 남았다. 

모두가 퇴장하고 떠난 무대 한편에 핵폐기물들은 남았다. 굳이 이 화면을 찍어온 이유기도 했는데, 지금 우리 주변엔 '공포'가 없을까. 나는 위험하지 않으니까 그 공포를 외면해도 되는 것일까. 


두고 간 폐기물 뭉치처럼, 극장을 퇴장한 관객의 마음엔 어떠한 형태로든 공포가 남았을 것이다. 

이미 시작된 공포, 두려워하고 떨기보단 마주하자.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본다. 쇼타의 그것과 같은 개인의 공포를 넘어, 사회의 국가의 공포를 극복할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하겠지. 그게 이 극이 지금 2021년, 한국 서울에 올라온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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