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대 학부 입학의 부활, 성균관대 약대 666.4:1로 떠올린 단상
"미쳤나 봐"
그리고 이어지는 ㅋㅋㅋ의 연속
이틀 전 마감한 대입 수시 결과에서 약대 학부 입시가 부활했고, 666.4:1이라는 어마 무시한 경쟁률을 기록한 모교의 소식이 카톡으로 전해진 순간이었다.
고교시절, 약학과는 하등 관련 없는, '수학' 영재교육에서 알게 된 언니는 나보다 한 해 먼저 약대를 갔고, 재밌는 거 좋아하는 인싸 언니를 따라(아직도 믿을 수 없다, 이 언니의 MBTI가 I로 시작한다는 걸) 다른 학교 약대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함께 참여했던 IPSF(International Pharmaceutical Student Foundation)에서 만난 다른 약대 동생까지, 짧게는 15년째, 길게는 20년째 이어지는 인연이 모인 방이었다.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주제의 대부분은 일하며 얻는 소식, 약사로 만나왔던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셋 모두 약대를 졸업하고, 약사가 되었고 세부 전공은 다르지만 대학원을 졸업한 약학석사이고, 그렇지만 박사과정까지 가서 공부하는 삶을 선택하진 않아서, 각자 다른 회사에서 약사이자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삶. 늘 그렇듯 언니가 쏘아 올린 약계 소식에 동생들이 반응하며, 그제의 대화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21/09/883664/
왜 약사가 되려는 걸까?
우연히 약대생이 된 나는 약사로 사는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04년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입엔 실패해, 대입 재수학원을 오가던 20살이었다. 당시는 교과과정이 6차에서 7차로 바뀌었고, 수능점수도 400점 만점이 500점으로 바뀌었으며, 사회탐구 시험을 칠 필요는 없어졌고, 과학탐구의 비중은 올라갔다. 과학탐구의 구성도 공통과학 + 심화 1과목이 아닌, 모든 과학탐구 영역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변화된 참이었다. 첫 입시가 그렇듯 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런 상황에 치러진 수시모집에 나는 재수생 지원이 가능한 학교의 의약학 계열을 찾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모두 의대만 지원하다가, 성균관대 약대가 논술 100%, 지원만 하면 서류 심사 없이 모두에게 논술 기회를 준다는 말에 덜컥 지원했으니까. 그렇게 쓴 원서가 의대 3장, 그리고 성대약대 1장. 유일한 약대 지원이었다. (물론 붙을 거란 기대도 안 했다. 논술을 경험해보자는 생각이 강했으니까)
그런 나였음에도
2004년 여름, 운은 내편이었나 보다.
7월, 지금은 모교가 된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 6층 조병두 국제홀에서 시험문제를 받아 들기 전까지도, 어떤 유형이 출제될지 몰랐었다. 그랬으니, 학교로 향하는 새벽 5시 첫 KTX를 타고 그 안에서도 전형적으로 일반 논술의 관점으로 쓰인, 논리적 전개 같은 책을 읽고 있었겠지. (당시 성균관대의 자연계열 논술형 전형은 과학적 사고를 측정하기 위해 과학 지문이 출제됐었다)
운이 내편이라고 생각했던 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입시의 혼란 때문에 물리 화학 생물을 모두 선택했던 학생들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고, 내가 졸업했던 고등학교는 6차 교육과정 시절에도 고교 2학년부터 매주 2시간씩 물리 2/화학 2/생물 2를 모두 가르쳤다는 것이었다. 약대에 진학한 내 화학 실력이 형편없었던 것과는 별개로, 시험에 출제된 열역학 제2법칙이나, 이상기체에 대한 정의, 샤를-보일에 대한 법칙을 모두 알고는 있었다는 것이 나 같은 재수생에게 매우 유리했었다고 회고한다. 그렇지만, 의대진학을 목표로 했었고, 그래서 심층 면접까지 감안해, 생물 2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던 나는, 시험지를 받은 순간의 기억으로는 물리 1/화학 1은 그럭저럭 알고 있었지만, 심화 지식은 까먹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전략적 사고로 연어 회귀에 대한 1번의 사고 실험 문제를 아주 잘 써야겠다. 보통은 자연 상태에서 회귀하는 것에 대한 사고 실험으로 끝날 가설 검증을, 실험실적 환경에서 모델링하는 방법까지 써내면서 "과학은 가설을 실험을 통해서 검증하고, 그것을 통해 이론을 확립하는 것"이라는 자연계의 기본 원칙을 어필하려고 애썼다.
물리/화학은 열역학 2법칙과 이상기체를 써내는 개념을 묻는 문제를 맞히고, 제대로 된 사고 과정을 묻는 3번 문제들은 대강 써 내려갔고 말이다. 2교시의 자기소개서를 현장에서 작성하라는 것 역시 그런 문제가 출제되는지 조차 몰라서, 현장에서 내가 왜 이 학교에 지원하고 우수한 사람인지, 약대를 졸업하면 무엇이 하고 싶은지를 1시간 안에 막 창작해서 써내던 아찔한 순간이란.
약대를 졸업하고 약사로 산다는 것, 혹은 연구하고 싶은 공부가 있다는 것, 그걸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논술 시험장에서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나 때도 88.4:1이었어
저, 지옥에서 온 글빨. 여하튼...!
으로 마무리되기 까지, 왜 김대리는 퇴직하고 약대에 오려고 하는 걸까, 너는 그때 무엇을 생각했냐, 와보면 막상 별거 없는데 같은 추억여행을 하면서... 오랜만에 라떼는 말이야를 이야기하며, 과거를 추억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내가 졸업하던 해, 그 이후로는 약대는 2+4의 6년제로 전환되며, 더 이상의 고졸 신입생은 없어졌다. 그러니 지금처럼 약대를 수능 안 보고, 논술로 입학하기와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동력이 없었기에, 그저 잊힌 기억이었는데 말이다. 15년~20년을 함께 봐 온 친구들이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약사로 살아온 십수 년만큼, 그보다 긴 세월을 약사로 살아가야 할 평생의 친구들이다 보니, 지난 이야기도 다가올 이야기도 이리 하는 거겠지. 큰 고민을 하지 않고, 약대에 진학했던 나는, 워낙 출중한 실력의 동기들 덕분에 같은 시간을 노력해도 성적이 나오지 않는 속된 말로 ROI가 확보되지 않는 공부 노동에, 짜인 시간표에 내 선택이라곤 생화학 실험과 생약학 실험 중 무엇을 더 먼저 하는 반을 고를 것인가와 같은 것 밖에 없던 닫힌 삶에, 무료함을 느낀 나머지 학교 홍보대사 S-Angel(중앙동아리), 한국 약학대학생연합(KNAPS), 일간지 인턴기자까지 매 순간 재미와 나름의 의미를 쫓아 살았다. 호된 방황을 거쳐, 결국 약사로 살기까지, 의미 없는 경험은 없다지만, 전공 너머의 삶을 생각해 보지 않고, 길을 선택했기에 부딪힘도, 중구난방으로 나열된 경험들을 하나의 타래로 엮어내기까지 시간이 걸린 깃도 사실이다.
어쩌면, 인생에서 경험한 가장 혹독했을 경쟁률, 그래서 지금도 가끔 저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그 이후에 숱한 탈락을 경험했던 언론사 입사 시험도, 이직 시도도 그 어떤 것도 저 88.4:1을 능가하는 숫자는 없었기에.
그 시절 싸이월드에 오늘을 기억하겠다고 합격증, 합격 안내 화면을 캡처해서 사진으로 올렸던 것 같은데, 그 기억에 싸이월드가 부활했다던데 라며, 어제 찾아봤지만, ID 확인만 되고, 게시물 개수만 확인되더라는, 또 다른 추억여행과 함께 말이다. 여물지 않았고, 고민도 없었기에, 약대를 졸업해도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고 가져도 된다는 말을 해 준 사람도 없었기에, 시행착오를 숱하게 거쳐야 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은 꿈꿀 수 있는 젊음 이어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언론사 입사 대비 글쓰기를 배우겠다고 병원약학 수업을 땡땡이치고, 율전을 떠나 혜화로 향하는 셔틀버스를 탔던 내가, 첫 직장을 병원으로 정하고, 그 경험이 바탕이 되어 동기들 중에 제일 먼저 전문약사를 따고, 병원약사회 인증 전문약사를 취득했는데, 병원을 떠나고, 저널리즘스쿨에서 공부하며 꿈을 놓지 않다가, 제약회사에서 의약정보 담당자로 일하기 까지. 굴곡이 없다면 없지만, 또 약대생치곤 파란만장한 경험 아니던가.
삶이, 회사생활이 매번 쉽지만은 않다. 가끔은 제가 수능을 안 보고 대학에 입학해서요. 자연계인데도, 논술 100% 전형으로 합격했기에, 아 제가 논술로 대학에 가서요 라고 이야기를 하면 놀라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회사에서 아이를 둔 상사나 동료들이 주로 그런 반응을 보이지만 말이다. 어떻게 공부했냐 물으실 때마다 운이 좋았어요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운이 좋았을 뿐 특별한 공부 방법은 없었다는 게 사실이어서, 그저 내가 켜켜이 쌓아온 시간의 포텐셜이 그때 터졌고, 그때 내 운을 어느 정도 끌어당겨 쓴 게 아닌가 싶을 만큼이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 그때의 이야기를 무용담 삼아 꺼내들 수 있게 된 지금,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말해 보려고 한다.
"라떼도 88.4:1이었어, 나 그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사람이야"
그러니, 내가 못해낼 일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