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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유 Jun 10. 2022

세상 따위는 더러워서 버리는 의식의 흐름

왜 엄마는 다 알면서도 순응하고 살길 택했는지 알 것 같은 요즘이다

이 길이 내 길인줄 아는 게 아니라 그냥 길이 거기 있으니까 가다보니 어느덧 7년차 -인턴기간까지 합치면 8년차 에디터가 되었다. 세간에 잡지기자는 악마처럼 온몸에 프라다를 두른 채 유려한 글을 쓰는 직업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내가 하는 일은 마감까지 뭔가 재미나게 흥미로운 것을 아주 예쁘게 뽑아내야하는 것으로 글쟁이보단 콘텐츠 크리에이터에 가깝다. 영상 대신 지면에 무언가를 구현하는.​


문제는 나는 에디터가 글쟁이인 줄 알고 이 업계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이건 다 섹스앤더시티 때문임ㅠ


​사실 성격적으로는 비서나 공무원이 맞는 사람이었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전혀 낯선분야 취재나 1만자짜리 원고쓰는것보다 아무 것도 없는 백지 위에 새로운 기획을 짜내는 게 훨씬 어렵다. 성격상 기획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막 던지는 것도 못한다. 어느 정도 기본적인 정보와 토대는 잡아놔야지, 안 그러면 기획 하기로 했던게 조사과정에서 생각 못한 문제로 엎어질까 노심초사하는 불안증환자…


​그런 나라서, 보다 수월한 기획을 위해서는 매일 다양한 뉴스와 온갖 분야의 정보를 있는대로 빨아들여 저장해둬야만 한다. 뭐가 어떻게 연결돼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될지 모르고, 시의성에 맞는 기획인지 판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니까. 덕분에 나는 일을 시작한 이래로 줄곧 세상에서 벌어지는 별의별 뉴스에 빠삭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전국 아니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이슈를 트레킹하고 그에 대한 아티클과 책을 읽어내리는 건 재미있기도 했지만 동시에 매우 지치는 일이기도 했다. 뉴스만 보면 세상은 도저히 좋아질 기미가 안 보이니까. 환경은 오염되고 물가는 뛰고 전쟁이 벌어지고 혐오성 총기 난사가 있었고 젊은이들은 우경화되고 북극곰은 죽었다. 이런 세상에 내가 의미를 둬야 할 이유가 없었다. 기획을 짜는 것도 어려운데 뉴스는 암울했다. 매일 분노가 치밀었다. 세상은 더럽기만 했다.


​휴직한 지 3개월이 지났다. 지난 7년을 내내 뉴스를 보다가 뉴스를 놓은 지 딱 3개월이 된 것이다. 물론 뉴스를 보고 싶다 한들 아기는 그럴 틈을 안 주기도 하고.


​요즘의 나는, 어쩌다 세상의 끔찍하고 부정적인 뉴스를 접해도 그러려니 싶다. 전 지구를 아울렀던 나의 세계는 이제는 웃고 있는 나의 아가, 그 단 하나로 좁혀졌다.나와 아기가 행복한 지금 이 순간만큼 소중한 건 더 이상 세상에 없다. 그 순간을 오래오래 유지하기 위해 환경보호를 실천하고 반전 운동을 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거기까지 사고를 확장하고 싶지가 않다. 여기까지만. 아기가 꺄르륵 웃어줄 때 느끼는 행복 그 너머를 고민하고 싶지가 않다.


​고향집 책장 한구석에 꽂혀 있던, 엄마가 90년대의 어느 날 구매했다던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집에는 온통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밑줄친 내용은 가부장적인 사회 현상에 대한 비판이 대다수였다. 그 책을 보면서 나는 당연한 의문과 오만한 결심을 품었다. 왜 엄마는 다 알면서도, 그만큼 공부했으면서도 가부장 질서에 순응하고 살기를 택했을까? 난 절대 그렇게 살지 않겠어! 그러나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정말 옳지만 너무 큰 대의를 이룩하기 위해 세상과 싸우기에는 그냥 나와 나의 아기들과 함께하는 매 순간이 너무 소중하고 행복했을 것이다.


​몇 달 후면 나는 회사로 돌아가고, 다시 뉴스를 봐야 할 것이다. 기획하는 건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 때가 되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 지 아직은 전혀 짐작되지 않는다. 당장은 세상은 엉망진창이지만 세상 따위는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라고 곱씹어 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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