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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유 Feb 16. 2023

마음을 지옥으로 끌어내리는 마감과 육아의 병행

만 30년간 인생을 아주 쉽게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다른 장르의 새로운 막이 시작된 모양이다. 일터에서 하루종일 구르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가정에서도 한 몸 뉘일 안식을 찾을 수 없는 지옥불의 나날들.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찬 인생 2막. 촉발되는 모든 스트레스를 억지로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기며 그저 하루하루를 방어하듯 아픈 온 몸을 이끌고 버텨야만 하는 30세 이후의 삶...

3월호는 정말 헬이었다. 사실 지난 2년간의 3월호와 비교해 보면 그렇게 일이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왜 헬이었냐면 아가를 온전히 돌봐주는 누군가가 없이는 회사일도 육아도 애매하게 임할 수밖에 없어 마음만 지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내가 일반적인 복직맘이 가질 수 없는 업무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시부모님이 24시간을 할애해 아가를 온전히 케어해주신 덕분이었다. 나는 얼마나 복받은 워킹맘이었나! 취재했던 이들에게 긍정적 변화가 있었다는 연락을 받은 뒤, 글을 멋지게 편집해줘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받은 뒤, 인터뷰를 근사하게 살려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은 뒤, 뿌듯해하며 '나 복직하자마자 생각보다 일 잘 해내고 있네?' 하고 깝치던 내 뒤에서는 시부모님을 필두로 많은 이들이 열심히 희생 중이었던 것이다.

취재를 하다가도, 행사 초대를 받으면서도, 글을 청탁하면서도, 한 달 내내 나는 아가 생각을 했다. 아가에게 이유식을 주면서, 아가를 씻기면서, 아가 옆에서 자장가를 불러주면서, 한 달 내내 나는 일 생각을 했다. 어느 한 쪽도 완전하게 만족스럽지 못한 나날이었다.

와중에 타지 촬영은 어쩜 이렇게 많은지, 스케줄을 하루만 삐끗하면 펑크가 나는 터라 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덕분에 조율해 놓은 것을 보고할 타이밍을 놓쳤고, 다음 스케줄을 가서는 완전히 잊어버렸고, 결국 문제가 사채 이자처럼 불어나 시간이 흐른 뒤 아주 혼쭐이 났다. 원래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나 자신을 굳건히 믿고 있었는데, 나도 이 정도로 정신이 없으니까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스스로 조금 충격이었다.


나는 원래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웬만한 것들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아침에는 구리에 갔다가 점심에는 용인, 오후에는 이천에 갔다가 저녁에는 명동에 가야 하는 촬영 스케줄을 마치고 집에 가서는 아가를 돌보고 기저귀와 이유식 재료와 분유 보유 상황을 체크해 적절하게 배달받을 수 있도록 주문량을 조절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는 정말 완전하게 지워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마감 때가 되면 어떻게든 일이 흘러가기는 흘러간다. 이번 달 가장 신경을 곤두세워 준비한  기사는 정말 아무런 지적이나 수정도 거의 없이 무탈히 데스킹을 마쳤다. "걱정했는데 재밌게 잘 썼네." 팀장의 한 마디에 진짜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 했다. 이 정도면 수정도 거의 하나도 없는 수준이었다. 솔직히 감격했다. 이밖에 혹시나 글이 안 올까, 안 오면 어떻게 땜빵해야할지 걱정했던 해외 외고도 무사히 도착했고, 여러모로 속을 썩였던 화보와 인터뷰도 약간의 문제는 있었지만 어쨌든 마무리는 됐다.

내일이면 정말 이 지옥 같았던 3월호가 끝난다!

그러나 마감이 끝나면 또 다음 기획이 시작되고 일터에서 하루종일 구르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가정에서도 한 몸 뉘일 안식을 찾을 수 없는 지옥불의 나날들은 향후 10년은 쳇바퀴처럼 반복될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선망을 받는 일이지만 지금의 나에게 좋은 직업이냐고 하면 글쎄. 어느 날은 천직 같아서 정말 기쁜데 어느 날은 진짜 세상에서 제일 안 맞는 일 같아서 너무너무 슬프다. 문제는 아가를 낳은 뒤로는 슬픔의 주기가 점차 짧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자존감은 하락하고 송은이가 그랬다듯 엑셀 공부를 해야 하나 또는 쿠팡에서 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몸이 너무 힘들다. "육아와 마감을 병행하다니, 너 정말 존경스런 애야." 20년의 경력을 가진 선배로부터 들은 얘기다. 처음 저 말을 들었을 땐 자랑스러웠다. 슈퍼맘의 뒤에는 시부모님이든 친정부모님이든, 노후를 갈아낸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 있다. 시부모님께서 더 이상 도와주실 수 없게 된 지금, 이제는 한계가 온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일을 사랑한다. 내가 쓴 기사로 긍정적 변화를 맞이한 사람들이 있고, 내가 편집해준 글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쓴 인터뷰에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아무나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경험을 이대로 끝맺기엔 아깝다. 아,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새벽 1시에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알딸딸해지자마자 "이 일을 사랑한다"고 쓴 걸 보니 이거야말로 진짜 취중진담이 아닐까 싶다. 그럼 내 선택은 어디로 가야 하나. 나도 모르겠다. 일단 이번 달은 끝냈다는 게 중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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