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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님이 Nov 16. 2019

루돌프 사슴 코

손바닥 소설

붉은 기운이 점차 줄어든다. 벌써 몇 년째인지 모른다. 이대로 가다가는 올 크리스마스이브에도 그 거래를 해야만 한다.


몇 해 전 어느 가을밤이었다. 늘 붉게 빛나던 코가 이따금 빛을 읽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휘감긴 전구처럼 몇 번 깜빡이더니 곧 빛을 되찾았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이브 오후가 되자 다시 깜박이던 빛이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 붉고도 따뜻한 빛은 켜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 당장 어두운 밤을 밝히며 썰매를 끌어야 하는데……. 사실 나 하나가 빠진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다른 사슴들이 조금씩 수고를 보태면 된다. 어쩌면 밤에 갑자기 다시 빛날 수도 있다. 아니면 이대로 영영…….

나는 포인세티아 잎을 한 장 뜯어 검은 코에 엮고는 길을 나섰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산타를 환영하지 않는 여왕을 찾아갈 셈이었다. 그녀는 뭐든 다 갖고 있기에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운이 좋으면 붉게 빛나는 동그란 구슬을 하나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음으로  성문을 두드리자 여왕은 기꺼이 문을 열어주었다. 오랜 세월을 홀로 지내왔다는 그녀는 뜻밖의 손님을 반가워하며 안으로 안내해주었다. 사정을 털어놓자 붉게 빛나는 동그란 구슬은 갖고 있지 않지만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자며 뜨끈한 브로콜리 수프를 끓여주었다. 수프를  먹고 나서 여왕에게 포인세티아 잎을 건넸다. 부족할  없는 여왕이지만 고민을 들어주고 수프를 대접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실은 빛나지 않는 코를 누가 알아볼까  가리기 위한 장식이었지만.

“어머나, 이 고운 빛깔 좀 봐. 아차, 그렇지. 포인세티아의 붉은 빛깔을 내게 주면 너의 그 코가 다시 붉게 빛나도록 해줄게.”

“정말요? 하지만 포인세티아는 붉어야 아름답잖아요. 모두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려고 포인세티아로 집 안을 화려하게 장식하는걸요.”

“크리스마스이브 단 하루면 된단다. 당일도 아니고 이브잖니. 어차피 다들 산타의 선물을 받고 나면 꽃 장식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 쓸모가 없어지면 넌 버림받겠구나. 나처럼 고독해진다니 가엾어라.”

“정말 이브 딱 하루만이죠?”

“어? 음, 뭐, 며칠 더 갈 수도 있고.”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여느 크리스마스이브처럼 어둠을 비추며 산타의 썰매를 끌었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은 선물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고 집 안 곳곳에 장식해둔 포인세티아가 하얗게 색을 잃자 집 안에도 눈이 내린 것 같다며 신기해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일말의 죄책감마저 사라졌다.

이듬해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산타의 붉은 장화를 한 짝 가져가 거래했다. 산타는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하더니 급한 대로 바짓단을 늘여서 하얘진 장화를 가렸다. 그 이듬해에는 빈손으로 여왕을 찾아갔다. 더는 교환할 것이 없는 까닭도 있었지만 과연 어디까지 거래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갖고 오지 않은 것도 거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른 일곱 마리 사슴의 빛나는 코와 교환할래요.”

“그거 정말 기발하구나. 평소의 일곱 배로 밝게 빛나는 붉은 코를 선사해줄게.”

그날 밤 홀로 썰매를 끄느라 힘은 들었어도 나만을 의지하는 산타를 보니 뿌듯했다. 일곱 배로 환하게 빛나는 붉은 코 덕분에 이브의 밤을 대낮보다 더 밝게 비추는 경험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밤하늘의 달과 별을 이긴 기분이랄까. 너무 눈부셔서 눈이 따끔거리고 눈물이 흐르는 것조차 흐뭇했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자 일곱 마리의 사슴들이 쑤군댔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다. 얼마 전부터 또다시 빛이 잦아들더니 지금은 당연하다는 듯이 까맣기만 한 코가 태연히 자리 잡고 있다. 오늘은 무엇으로 거래를 하지?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아이들의 발그레한 홍조는 어떨까? 홍조가 없다고 해서 까르르 웃는 아이들이 사랑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밤을 알리며 불타오르는 노을도 탐이 난다. 낮과 밤 사이에 노을이 없다고 해서 내일이 오지 않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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