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통과를 촉구합니다
죽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슬픔을 몰고 온다. 알지 못하는 이의 죽음에도 우리는 함께 아파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 흔히들 영화 <7번 방의 선물>이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같은 작품을 보고 울어본 경험이 있을 거다. 혹은 다큐멘터리나 뉴스에 나오는 인물들의 사연에 눈시울을 붉혀봤을 테다. 우리 모두 공감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탓이다. 그 대상을 알지 못하더라도 죽음을 둘러싼 당사자의 억울함과 유족들의 상실감에 공감하여 함께 비통해하는 존재, 그런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러나 타고난 감각도 제대로 쓰이지 않으면 무뎌지기 마련이다. 이토록 진한 공감의 존재인 우리가 죽음에 무뎌지고 있다. 정확히는 ‘산업재해 사망사고’에 더는 슬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숨 쉬듯 반복되는 사망사고에 우리의 통각은 마비되었다. 안전보건공단의 통계에 따르면 매년 2,0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산업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다. 말 그대로 매일, 누군가는 자신의 일터에서 떨어지고, 끼이고, 부딪히고, 맞고, 깔려 죽는다. 서글프고 원통한 비극의 주인공이 매일 떠오르는데도, ‘매일’,‘2,000명’의 잔혹함은 그저 무의미한 숫자로 희석되어 우리에게 그 어떤 충격도, 슬픔도 주지 못한다. 다음날이면 또 다른 비극, 또 다른 슬픔이 깨어나는 사회에서 모든 죽음과 억울함은 전 사회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 가운데 일부의 죽음, 그러니까 더 비극적인 사연만이 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애도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무뎌진 통각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드물게 찾아오는 사회적 슬픔 역시 잠류할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슬프게 했던 구의역 김 군 사망 사건, 화력발전소 김용균 사망 사건을 기억하는가. 당시 우리는 김 군의 컵라면 유품을 보며, 김용균 씨의 생전 사진을 보며 함께 울고, 함께 분노했다. 그러나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한순간이다. 우리는 이내 일상으로 복귀했고, 저마다의 삶으로 시선을 거뒀다. 다음, 또 그다음 비극이 사회를 관통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머무른 슬픔 뒤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비싸서 그래. 사람보다 크레인이. 그래서 낡은 크레인을 계속 쓰는 거야.” 정세랑 작가의 <보건교사 안은영> 속 크레인에 깔려 사망한 인물의 대사다. 작가는 여기에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값없게 느껴졌다.” 그렇다. 우리는 인간의 목숨이 자본의 가치보다 값싸게 여겨지는 세상을 살고 있다. 매일 사망사고를 만들어 내는 기업은 사고에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여전히 산업현장의 안전 비용을 최소화하며 인력을 최대한으로 뽑아내는데 몰두한다. 그리고 정부와 국회는 우리 사회의 오랜 고통을 모른 체하며 이를 더 곪게만 하고 있다. ‘김용균법’이라 불리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여전히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고, 그의 유족은 오늘도 국회 앞에서 단식 농성으로 처절한 외침을 이어나가고 있다. 인간의 죽음보다 산업의 발전과 자본의 가치가 중시되는 이 사회의 굴레 속에서, 산업재해는 지극히 개인적인 비극이자 일시적 슬픔으로 축소되고 있다. 국가가 선명한 사회적 고통에 적극적으로 무통 주사를 놓고 있는 셈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을 연구하며 슬픔에 담긴 존재론적 의미를 더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슬픔이라는 감정은 좌절과 상실의 상징적 표현에서 그치지 않고, 그 좌절과 상실의 사태를 벗어나 새로운 삶과 존재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하는 갈망을 일깨운다. 이러한 그의 분석으로 보았을 때, 슬픔이 인간의 새로운 존재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하는 것처럼, 사회적 고통은 사회를 새롭게 할 힘을 만든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반복되는 산업재해의 비극 앞에서 느끼는 슬픔의 감정은 ‘정제된 슬픔’이라 할 수 있다.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한순간이고, 우리는 이내 일상으로 별 탈 없이 복귀하기 때문이다. 잘 짜인 극본처럼 한순간 몰입했다 금방 빠져나올 수 있는 감정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애도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잠시 차오르는 눈물을 걷어내고 이면에 있는 것들을 더 또렷이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것, 더 본질적인 것, 모순된 구조, 열악한 환경,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통증을 살피는 것으로. 죽음을 누군가의 비극으로 개인화하지 않고 더 큰 구조를, 환경을,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는 것. 그것만이 그들의 죽음을 위로하는 유일한 방식이 아닐까. 정부와 국회는‘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보내’기 보다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 원인 제공자인 기업에 제대로 된 책임을 물으며,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우리의 눈물 역시 하룻밤의 카타르시스가 아닌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 그리고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로 흘러야 할 것이다.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슬퍼하라는 말이다.
슬픔의 역할은 단순하지 않다. 하룻밤의 눈물이 아닌, 현재의 상태를 벗어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한다. 슬픔은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는 감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각성으로, 나아가 사회의 변화로까지 이어져야만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슬픔이며, 모두의 고통과 눈물을 지울 유일한 방법이다. 이 지독한 비극을 끝낼 수 있는 건 인간 존재의 진정한 슬픔뿐이다. 부디, 슬퍼하기를 멈추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