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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님 Jan 08. 2021

나선으로 나는 새, <레이디 버드>


어른이 되어 날고 싶은 보통의 아이, 베이비 버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평생을 살아온 이곳 새크라멘토도, 엄마 아빠가 지은 크리스틴이란 이름도, 가톨릭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도, 철길 옆 구린 집도, 익숙해져 버린 이 가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내 삶도, 보잘것없는 수학 성적도, 이름 없는 뮤지컬 배역도. 전부 다. 그러니 이제 나를 ‘레이디 버드(Lady Bird)’라고 불러줘.


새크라멘토의 17살 소녀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퍼슨, 그녀는 부모가 부여한 세계가 끔찍이도 싫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보다 자신이 지은 이름 '레이디 버드'로 불리고 싶다. 장난처럼 보이는 '새 이름 짓기'라는 행위에는 부여된 정체성과 강제된 세계로부터의 탈피, 그리고 새로운 자아와 세계로의 강한 욕망이 내포되어 있다. 크리스틴은 새로 지은 이름처럼 어른이 되어 날개를 달고 자신의 세계로 날아가고 싶다. 되도록이면 멀리, 새크라멘토에서 뉴욕으로.


그러나 유별난 이름을 한 주인공의 성장을 그려내는 이 영화에 거대한 사건이나 급격한 변화는 없다. 완벽한 실패도 성공도 없으며, 명랑한 사랑이나 우울한 이별도 없다. 그저 보통의 날들, 한 번쯤 느껴봤을 감정들, 우리가 아는 그 누군가를 닮은 인물들만이 있다. 엄마와의 쇼핑, 그리고 또 잔소리, 단짝 친구와의 미묘한 감정, 금방 들통나버릴 장난, 형편없는 성적, 첫 남자친구와 첫 키스, 망쳐버린 첫 섹스, 어울리지 않는 허풍, 크고 작은 찌질한 거짓말들…. 가끔 엄마 앞에서만 폭발하는 광기를 빼고는, 레이디버드는 커다란 성장통 없이 무딘 날들을 보낸다.


그렇게 영화에서는 평범한 열일곱의 보통의 날들이 유쾌한 호흡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아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그려낸 레이디 버드의 초상에서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누구든 감정 이입 할 수 있는 개성적인 에피소드를 유기적으로 엮어낸 영화는, 레이디 버드 세계의 구체성에서 우리 삶의 보편성을 끌어낸다. 그리하여 우리는 겪어본 적 없는 개성적인 에피소드에도 쉽게 공감할 수 있으며,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레이디 버드를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성장 영화가 지닌 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를 획득한 그 누구나 그 무렵엔 주어진 세계를 벗어나 자기만의 세계로 나가보고자 애써봤으므로.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 함께 성장의 궤도를 걸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우리는 그녀의 초상에서 또 하나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엄마 매리언이다.



서로의 얼굴을 하고 마주 선 두 여자, 엄마와 딸


영화 『레이디버드』 서사의 중심에는 딸 크리스틴과 엄마 매리언과의 관계가 있다. 세계와 맺는 관계 속에서의 성장이 인물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관계의 주인공은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레타 거윅 감독은 청소년기를 다룬 영화에서 꼭 모녀 관계를 중심에 두고 싶었다 말했다. “10대 소녀에 대한 영화라면 으레 이야기의 중심에 한 소년이 놓여야 마땅할 거다. 잘생긴 학급 남자친구가 인생에 산적한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인생이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내가 아는 여성 대부분은 유년기에 엄마와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그레타 거윅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청소년 서사 영화가 이성애적 관계를 중심으로 짜인다는 점에서, 엄마와 딸의 관계에 주목한 이 영화는 그 자체로도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영화가 모녀 관계의 ‘복잡성’과 ‘양면성’에 시선을 둔다는 점이다. 크리스틴의 첫 남자친구 대니의 “엄마가 엄하시구나”라는 말에 크리스틴은 이렇게 답한다. “날 엄청 사랑하는 거지.” 그리고 또 말한다. 그럴 수 있다고. 무서운 사람이면서 따뜻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그의 말처럼 영화에서 엄마 매리언은 딸이 '언제나 가능한 최고의 모습이길 바란다'면서도 뉴욕의 대학 지원을 반대하고, 운전을 하는 것도, 계란 프라이를 만드는 것조차도 혼자 할 수 없게 막는다. 얼른 자신에게서 독립하길 바라면서도, 딸이 없는 추수감사절을 슬피 보낸다. 크리스틴 역시 이상한 건 마찬가지이다. 엄마에게서 벗어나 혼자 서보려 악을 쓰지만, 결국 그녀는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불안해하고 사랑받으려 애쓴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엄마에게 “근데 좋아하냐고” 묻는다. 아무래도 이상한 말이다. 좋아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 밀도 있는 마음 아닌가. 그러나 크리스틴은 엄마가 자신이 딸이어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좋아해 주길 바란다. 엄마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엄마가 사랑으로 꽉 끌어안아주길 원한다.


모순된 모습을 한 두사람을 보고 알 수 있듯이, 엄마 매리언과 딸 크리스틴의 관계는 한 마디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영화가 그려내는 매 순간 둘 사이에는 애증(愛憎)이 얽혀있다. 그야말로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공존하는 관계라는 말이다. 한 군데에 자리하기 어려워 보이는 두 단어는, 매리언과 크리스틴 말고도 대부분의 모녀 사이에 끈적하게 붙어있다. 영화는 그러한 측면에서 관객 누구나 경험했을 눈물나게 사랑했던 순간, 지독하게 미워했던 순간, 그 순간들의 모순과 충돌을 가감 없이 그려낸다. 이리저리 복잡다단하게 뒤엉킨 것이 사람이므로, 또 사랑이므로.



둥지를 떠난 새


레이디버드는 영화의 말미에 뉴욕의 대학에 합격해 새크라멘토를 떠난다. 새는 날아오르고 나서 이내 깨닫는다. 자신의 둥지를 사랑했다는 것을. 기대보다 시시하게 시작된 둥지 밖 뉴욕의 삶은, 새크라멘토의 삶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파티에서, 병원에서, 처음 만난 남자에게서, 낯선 교회에서 자꾸만 새크라멘토가 보인다. 그리고 새크라멘토가 그런 것처럼 자신 또한 엄마를 닮아있다는 것을, 엄마를 사랑한다는 것을 크리스틴은 뒤늦게 깨닫는다. 영화의 마지막, 엄마에게 전화를 건 크리스틴은 이렇게 묻는다. “엄마도 새크라멘토를 처음 운전할 때 감상에 젖어 들었어?” 그는 그토록 떠나고 싶던 새크라멘토를 바라보며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엄마를 다시 생각한다. 나의 얼굴을 한 엄마에게, 엄마의 얼굴을 한 내가. 그렇게 레이디 버드는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하나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어른이 되어간다. 이리저리 돌고 돌아 나선형으로.


하지만 마지막까지 영화는 주인공의 끝나지 않은 성장을 암시한다. 그는 뉴욕에서 만난 새로운 이에게 레이디 버드가 아닌 크리스틴이라 자신을 소개한다. 그러나 곧바로 새크라멘토를 샌프란시스코라 고쳐 말하는 그의 모순성. 아마 그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것들이 앞으로도 그녀의 삶을 휘감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날아오른다. 복잡다단한 궤도로, 앞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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