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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님 Nov 10. 2022

1. 저 이번에 내려요

종종 내 인생을 설명할 때 꼭 지하철 이야기를 하곤 했다. 다른 게 아니라 파주 토박이가 서울에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은 필수였고, 자취 없이 긴 통학시간을 견뎌오곤 했기에 인생에서 지하철을 빼고 논할 수 없는 탓이기도 하다. 하루 최대 4시간, 못해도 2시간을 왕복하며 파주와 서울을 오가는 인생을 살았다. 얼마 전 평생 지하철에서 보낸 시간을 계산해 보았는데, 대략 11,444시간쯤 된다. 애걔, 인생의 삼분의 일을 지하철에서 보낸 기분인데 고작 만 시간을 웃도는 수치라니. 좀 더 대단한 숫자가 아닌 것에 내심 아쉬워했다. 그러나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하다는 만 시간의 법칙은 이미 오래전에 충족한 셈이고, 아직 다른 무엇에도 만 시간을 쏟아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 시간이 대단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어떤 전문가인지 알 수가 없다. 그 무엇에도 전문가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내 경험은 대체로 빈약하고, 내 능력은 대개 애매하다. 빈자리 찾기 전문가? 빠른 환승 전문가? 막차 사수하기 전문가? 하차역에서 잠 깨기 전문가? 그래 그런 것이라면 이미 도를 텄다. 



지하철 전문가에게도 경의선은 제법 까다로운 존재다. 배차간격이 길고 열차 지연이 잦은 탓에, 무턱대고 역으로 나갔다간 이십여 분을 추위 혹은 더위를 견디며 기다려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만다. 대학 시절, 수업 시간에 맞춰 타야 하는 열차를 간발의 차로 놓친 적이 있다. 다음 열차는 20분 뒤 도착 예정이었고, 하필 우리 학교는 15분이 지나면 지각이 아닌 결석 처리되는 학교였다. 지나간 열차가 남겨두고 간 아득함에 나는 그대로 집에 돌아가기를 택했다. 무려 수업 시작 한 시간 전의 일이다. 그 극단적인 결정이 설명하듯, 경의선은 웬만큼 치밀한 계산 없이는 이용하기 어렵다. 상사 혹은 조교에게 '오늘도 경의선이 지연되어서요', '집에서 한 시간 전에 나왔는데 열차를 놓쳐서요...'라는 궁상맞은 변명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시간 맞춰 열차를 타는 수밖에 없다. 집에서 역까지 걸어가는 10분, 여기에 엘리베이터 대기이나 신호 대기 시간 3분, 다 합쳐 13분. 나는 매일 배차시간을 확인하고, 13분의 법칙을 지켜 지하철을 탔다. 그 성실함과 치밀함에 스스로도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 계획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간인 나조차도 경의선에서만큼은 프랭클린 못지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 지독한 경의선의 생태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늪에 빠져버린 듯 십여 년간 한 발자국도 떼기 어려웠다. 여러 번의 환승은 있었지만 지하철 타기를 멈춘 적 없다. 파주에서의 유년 시절을 제외하면 내 인생은 '서울대입구-월곡-신촌역-서울역-압구정로데오' 정도로 요약된다. 고등학교, 대학교, 인턴, 첫 직장까지 나는 늘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다음 목적지를 정하기 위해 고심하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원하는 목적지로 이동하는 일에는 크고 작은 부침이 있었지만, 운이 좋았던 덕에 원하는 곳으로 가는 데 늘 성공해왔다. 가끔씩 우연과 지연이 있기는 했지만 차례차례 목적지를 변경하기 위해 오래 고심했고, 늘 계획과 목적의식 하에 성실히 움직였다. 10년을 5개의 정거장으로 설명 가능한 삶. 그렇게 촘촘하게 짜인 서울 지하철 노선 마냥, 아주 명료한 선으로 그어진 삶을 살았다. 



그런 내가 지하철을 타지 않은지 꼭 두 달이 되어간다. 명료하던 노선이 흐릿해진 것이다. 지난여름, 압구정로데오역에서 더는 견딜 수 없었던 나는 무작정 도망쳤다. 다음 정거장을 계획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곳을 왕복한 2년여간 다음 정거장에 대해 한참을 고민해 보았지만, 막차를 타던 그날까지도 다음 향방을 정하지 못했다. 그리곤 구직에 대한 불안감으로 부랴부랴 공채행 열차를 탔고, 열심히 달렸지만 열차에서 내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렇게 경의선을 타지 못한 지 두 달이 되었음에도, 나는 어쩐지 아직 경의선에 몸을 싣고 있는 기분이다. 어딘가 가야 할 것만 같아 매일 아침 집을 나서 열차를 타고 한참을 헤맨다. DMC, 강남역, 판교역에서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언제 내릴까 초조해한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창밖으로 비친 화려한 빌딩에 곁눈을 준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고, 어디를 가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도 못하는 나의 모습. 영혼 없는 모습으로 떠도는 그 꼴이, 언젠가 친구에게 들은 '경의선 지박령'이라는 별명에 꼭 들어맞는다고 생각해 본다. 



몹시 멀미가 난다. 어디서 내릴지 몰라 안절부절해하며 어깨 폭만한 공간에 스스로를 욱여넣고 있는 일 말이다. 그러니 이젠 내려야겠다고 생각한다. 갖가지 지하철역 이름을 읊어대며 내 삶을 설명할 때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었던 그 정거장, 아무것도 아닌 내가 존재하는 곳, '나'와 '지금'이 사는 곳에서 말이다. 정말 지박령이라도 된 듯 불안한 미래에 쫓겨 목적 없이 달리는 일은 멈춰보자. 서울시내 노선만 9개, 역은 302개.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펼쳐두고도 마음껏 여행하지 못하고 발붙일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일도 그만하자. 배차간격도 길고 연착도 제멋대로인 경의선을 타면서, 왜 나는 한 번도 멈추거나 지연된 삶을 살지 못했는가. 불현듯 억울한 감정이 밀려온다. 조금은 새침한 표정으로 한 마디 뱉어본다. 

"저 이번에 내려요" 





2022年 11月 10日

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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