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해 말하기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일은 어렵다. 그 분량이 종이 한 장이 아닌 백 장, 천 장이 된다 하더라도 ‘사랑은 무엇이다 ‘라고 논리적으로 이야기해내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시대를 뛰어넘는 사상가인 공자마저도 사랑을 ‘인 仁’으로 치환하여 논어에서 긴 글에 걸쳐 설명하고 있으며, 플라톤 역시도 「향연」이라는 책을 다 쓰고 나서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다. 이렇듯 동서철학을 막론한 현인이라는 인물들도 쉬이 이야기하기 어려운 사랑. 사랑은 복잡 미묘하고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기호 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이렇게 말했다. “멀리서 나의 사랑을 회상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랑의 언어는 직설적으로 옮기려 하면 부적절하고, 즉시 암시적이며 불가능한 것이 되어 수많은 은유들로 흩날려 간다.” 이러한 애매모호함, 추상성 때문에 사랑을 정의 내리고 개념화하고 설명하려 하는 시도는 부질없는 듯 보인다.
그런데도 왜 자꾸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왜 아무리 이야기해도 정의 내려지지 않는 ‘사랑’을 계속해서 다시 이야기하려 하는 것일까? 지금껏 사람들은 사랑은 인류의 문학과 예술의 영원한 주제라고 부르며 글을 쓰고, 음을 붙이고,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만들어 끊임없이 재현해 왔다. ‘사랑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들’의 총체를 구성하는 그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무언가에 ‘사랑’이라 명명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이는 마치 도돌이표를 찍는 일처럼 보인다. 인류는 왜 자꾸만 보이지 않는 것을 형상화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사랑은 본디 추상적인 것이고 관념적인 것인데, 이를 자꾸만 구체성을 부여하여 정의하려는 시도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사랑과 같은 추상적 개념에 대해서 설명할 때 보통 은유를 사용한다. 은유로 설명되는 추상적 가치는 굉장히 모호하고 본질을 잘 찾기 힘든 것처럼 느껴진다. 은유를 통해 그 본질에 자욱한 안개가 끼는 듯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갖는 개념 체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 특히 이야기는 언어의 추상성을 뚫고 들어가 개념의 실제를 오롯이 체험할 수 있게 만든다. 예를 들어 ‘슬픈 사랑’이라 하면 막연한 개념으로 다가올 뿐이지만,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거나 영화 ‘타이타닉’을 본다면, 또는 노래 ‘나를 잊지 말아요’를 듣는다면 사랑에 따른 슬픔의 양상이나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이해가 뚜렷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대한 막연한 이해 대신 ‘사랑은 무엇’이라고 하는 ‘무엇’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어렴풋이 추론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서사는 곧 사랑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랑은 서사를 통해 의미화되고 확장된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자꾸 이야기하려 함으로써 사랑의 의미를 만들어내고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을 이야기하려는 사람들의 시도는 사랑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사랑은 고착되고 규정된 본질 개념의 틀을 벗어나 구체적인 상황과 관계 속에서만이 비로소 구현되는, 실존적 특성을 갖는다. 단지 개념으로 머물지 않고 인간의 현실에 끊임없이 작용함으로써 비로소 사랑이 실현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사랑은 실존적 결단을 필요로 하는 본질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박병준, 사랑에 대한 철학적 성찰, 2003)
우리는 사랑과 그 모호성에 대해 분명히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사랑이라는 ‘어떤 것’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모호한 ‘어떤 것’은 계속해서 경험할수록, 이야기할수록 ‘사랑’이라는 본질에 가까워진다. 그 이야기가 간단하지도 않고, 명쾌해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분명 사랑을 의미화하는 작업이다.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이야기를 더 길게 이어나갈수록 사랑의 그 본질적 가치가 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모호하지만, 이야기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가끔은 헛되 보이고 부질없게 느껴지더라도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 외쳐야 한다. 이것이 사랑 이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