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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Mar 23. 2023

판타지아 이탈리아나 출간 1

소모사와 플란넬



새 책 판타지아 이탈리아나(Fantasia Italiana)가 4월 1일 출간된다. 간단한 구상 하에 시작된 프로젝트였으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다행히 그동안  이탈리아를 꾸준히 방문할 수 있었다. 그들의 공예 전통이 여태 보전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보고 배우는 과정은 과분히 즐거웠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열두 장 중 브런치 포스팅을 위해 작성한 내용을 보강-재구성한 것이 첫 여섯 장을, 책을 위해 새로 작성한 내용이 나머지 여섯 장을 이룬다. 첫 여섯 장 역시 질감이 많이 달라졌다. 이전의 글이 다소 보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데 머물렀다면 책에서는 부족하나마 내 경험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무엇보다 내 수트들과 그 진짜 주인인 사르토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우선 재단 재봉에 생을 바친 장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무엇보다 책의 주인공, 마에스트로 안토니오 파스카리엘로와의 만남은 결정적이었다(챕터 9, 11, 12의 경우 그가 없었다면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다). 책의 모든 내용이 그의 언어로 새로이 세례를 받아야 했다. 독자는 내가 그간 안토니오 파스카리엘로, 사르토리아 나폴레타나, 나폴리에 빠져버렸다는 사실을 책을 펼치는 순간 알아챌 수 있을 테다. 나는 한 친구에게 이 책이 “나폴리로 향하는 러브레터”라고 소개했는데, 이 역시 틀린 설명은 아니다.




책은 오직 ‘수미주라(비스포크) 수트’만을 다루고 있다. MTM 또는 기성복은 다루지 않고 있다. 난 수미주라 수트와 그 외 옷 간의 ‘객관적 가치의 간극’이 극복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 믿는다. "어떻게 만들 건 멋지게 잘 입기만 하면 상관없다"라 말하는 블로거/업자/작가들의 의견을 향해 난 불신을 던진다. 가치의 척도인 상품이 내포하는 숙련된 노동의 양(김준산)에 있어서 그 차이는 확연하다. 독자는 이 문제에 관한 내 소견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될 테다.


1. 소모사: 나는 지금 일하는 중이다!


첫 챕터는 소모사다. 클래식 남성복의 정수다. 매끈하고 날카로우며 차갑다. ‘양복’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존재다. 고전적인 남성적 우아함을 현시한다. 복식의 간소화라는 세계적 흐름, 즉 수트를 잘 입지 않고, 입더라도 타이를 생략하고, 셔츠보다는 니트 또는 티셔츠를, 옥스퍼드 보다는 로퍼를 매치하는 유행과 불화한다. 여전히 셔츠와 타이, 옥스퍼드와 드레스 워치를  강요하는 성가신 녀석이다.  딱딱한 규율을 강요하는 ‘정석’의 수트 착장은 걸치는 순간 “나는 지금 일하는 중이다!”라고 고함을 질러댄다.


소모사 특유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왜 수트를 입어야 하는가를 설명한다. 정석의 착장이 구현하는 ‘격식’은 대체 불가능한 빛을 낸다. 타이가 셔츠 칼라 사이에서 풍성한 매듭을 만들고, 셔츠 커프 1cm가 재킷 소매 끝을 장식하고, 세심하게 광을 낸 구두가 바지 밑단 아래서 반짝거릴 때, 즉 착장의 모든 요소가 제 자리를 지켜낼 때, 남성복식의 유일한 이상향인 절제된 우아함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소모사 챕터에서는 마에스트로 파스카리엘로가 재단, 재봉한 샤크스킨 수트의 예시를 가지고 왔다. 공방에서 찾은 빈티지 원단을 선택했다. 그의 도제, 장원석 사르토가 추천해 주었다. 고중량 소모사의 빳빳함이 익숙한 나로선 하늘하늘한 촉감의 사계절 수트지의 선택을 다소 망설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새 간절기에 가장 즐겨 입는 수트가 됐다.


소모사만의 장점을 이야기하기 위해 캐리 그랜트의 예시를 가져왔다. 샤프한 소모사의 장점을 자신의 스타덤에 가장 효과적으로 전용했던 그였다. <<나는 결백하다>>(1955), <<러브 어페어>>(1957)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우아한 자태는 여러 ‘잘못된 시도’ 끝에 완성된 것이었다. 그가 그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겪어야 했던 시행착오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보았다.



2. 플란넬: 난 수트를 사랑한다!


그다음 챕터는 플란넬이다. 사실 플란넬 ‘수트’(!) 차림의 남성을 서울에서 접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늦가을에 이르러서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원단인 플란넬을 즐겨 입게 된 그는 오랜 시간을 ‘마니아’로서 보냈을 것이 틀림없다(이와 같은 짐작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된 데에는 몰락한 우리의 복식 문화라는 현실이 있지만). 이 챕터를 “나는 수트를 사랑한다!”라고 이름 짓게 된 배경이다.


알란 플러서는 그레이 플란넬 수트가 20세기 중반 남성복의 흰 백지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회상한다. 그레이 소모사 수트와 그레이 플란넬 수트를 모두 가지고 있는 남성은 그가 말하려 하는 바를 이해할 것이다. 소모사 수트와 동일한 방식으로 방모사 수트를 활용하는 경우에도(셔츠, 타이, 카프스킨 구두),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그레이 소모사와는 완벽하게 다르다. 부드러운 동시에 담백한 촉감으로 보풀거리는 플란넬로 몸을 감싸는 경험은 날카롭게 각을 세운 소모사의 냉기와 완연히 다른 인상을 남긴다. 공식 석상에서 플란넬 수트와 스웨이드 구두 차림으로 등장한 지아니 아니엘리는 “나는 이곳이 더없이 편안하다(이곳에서는 내가 군림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플란넬 수트만의 우아함의 표본으로써 프레드 아스테어의 예시를 가지고 왔다. 캐리 그랜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영화를 연달아 살피던 중, 순간 그가 오로지 플란넬 수트만을 반복해서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연미복과 디너 재킷을 제외하면 그는 수십 년의 커리어를 통틀어 거의 모든 장면에서 플란넬 수트 차림을 고집하고 있다. 캐주얼한 착장을 선보일 때에도 트위드 재킷 아래에는 늘 그레이 플란넬 바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연유를 추측, 설명해 보았다.



소모사를 더 선호하는 편이지만, 나 역시 플란넬 수트 차림을 즐긴다. 폭스 브라더스의 클래식 플란넬 번치에서 찾아낸 18온스 플란넬로 만든 사르토리아 살라비앙카의 더블브레스트 수트를 가져왔다. 차콜 색상이다. 미드 웨이트 플란넬의 경우 잘 다려진 채로 깔끔한 모습이 멋스럽다면, 사진의 수트와 같은 헤비 플란넬의 경우 빳빳한 가죽에 ‘길을 들이듯', 거듭된 착용으로 단단한 원단이 유연해질 때, 두툼한 카디건 같은 착용감을 보여줄 때, 드디어 본연의 진가를 발휘한다. 최호준 사르토가 탁월한 만듦새로 구현해 준 플란넬 수트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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