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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Aug 08. 2023

철학의 평온한 안식처

나폴리 3

예언가: 그대가 그곳(이탈리아)에 상륙하여 쿠마이 시와 숲이 살랑대는 신성한 아베르나 호수로 가면, 신들린 예언녀를 보게 될 것인데 그녀는 거기 바위 동굴 깊숙한 곳에서 잎에다 표지와 이름을 적음으로써 운명을 예언하오...그대는 그곳에 머무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말고 예언녀를 찾아가 그녀가 자진하여 입을 열어 직접 예언을 노래해 달라고 기도하고 간청하시오. 그러면 그녀는 그대에게 이탈리아의 부족들과 다가올 전쟁들과, 어떻게 그대가 그 하나하나의 노고를 피하고 견딜 수 있을지 일러줄 것이오. (아이네이스 3권)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속 쿠마 무녀

고대 그리스의 대표 시인이 호메리우스였다면 로마에는 베르길리우스가 있었다. 호메리우스의 오디세이아가 트로이에서의 승리를 뒤로하고 고향 이타카로 향하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였던 반면 베르길리우스는 멸망한 트로이의 후손 아이네아스의 여정을 서사시로 각색했다. 로마의 건국신화인 아이네이스의 주인공 아이네아스는 멸망한 트로이의 부활을 꾀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한다. 베르길리우스는 그런 아이네아스가 로마의 미래를 점지받는 장면의 배경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그리스적인 지역이자 그가 아이네이스를 집필한 고장, 나폴리 해안을 선택한다. 이 결정은 로마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나폴리의 상징성을 말해준다.  


쿠마 무녀: 오오, 그대 마침내 바다의 큰 위험들은 물리친 자여 (하나 더 나쁜 일들이 육지에서 기다리고 있구나) 다르다누스 백성들은 라비니움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오.
쿠마. 무녀의 동굴
앙키세스(쿠마 무녀의 안내로 망자의 왕국에서 만난 아이네아스의 아버지): 자 이제 너에게 다르다누스의 자손들이 어떤 영광을 누리는지, 이탈리아의 부족에게서 네가 어떤 후손들을 기대할 수 있는지 설명해 주겠다. 앞으로 우리의 이름을 계승하게 될 찬란한 혼백들 말이다... 로마는 일곱 언덕을 하나의 성벽으로 에워쌀 것이며, 자손이 흥성할 것이다... 네 이 로마 민족을 보아라. 여기 이것이 카이사르와, 언젠가는 넓은 하늘 밑으로 나가게 되어 있는 이울루스의 모든 자손들이다. 그리고 여기 이것이 그가 올 것이라고 너도 가끔 들은 적이 있는 바로 그 사람으로 신(카이사르)의 아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이다. 그가 사투르누스가 다스리던 라티움의 들판에 또다시 황금시대를 열 것이며, 제국을 가라만테스족과 인디아인들 너머로 확장할 것이다. (아이네이스 6장)

베르길리우스는 나폴리를 사랑했던 로마 상류층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말년의 그는 나폴리에서 그의 마지막 작품들을 집필하며 생을 마감했다. 오늘도 그의 묘가 나폴리의 메젤리나 인근에 남아있다(진짜 베르길리우스의 묘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제정 초기 로마인들에게 이와 같이 로마인이면서 나폴리를 더 사랑한 지식인의 상은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만투아가 나를 낳아주고 칼라브리아가 나를 채어갔다. 지금은 네아폴리스가 나를 붙들고 있다. 나는 목초지와 농토와 장수들을 노래했노라. (베르길리우스가 임종 시 불러준 그의 묘비명)


로마인들, 특히 지식인층에게 나폴리는 로마에 부재하는 비밀이 살아 숨쉬는 땅을 의미했다. 그들은 나폴리에서 동경해 마지않던 황금기 그리스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젖곤 했다. 나폴리인들은 그들의 도시를 찾는 로마인들을 아무런 편견 없이 xenia/ξενία(환대)로 맞이하고 있었다. 이 역시 나폴리가 보존하고 있던 그리스적 풍습이었다.


<로마의 내전과 나폴리>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이 막을 내릴 무렵, 나폴리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군림한다. 이탈리아, 에스파냐, 아프리카 등지에서 활발하게 이뤄졌던 노예무역부터, 농산물, 와인, 향수, 식기까지, 다양한 제품들을 지중해 전역으로 운반하던 것이 나폴리 상인들이었다. 그들의 활약을 짐작케 하는 좋은 예시가 바로 캄파니아 A라 불리는 식기다. 나폴리 해안의 섬 이스키아의 흙으로 제작되던 이 식기는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 북아프리카와 에스파냐 해안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캄파니아 A 식기 (출처: 테일러 라분 Ancient Naples: A Documentary History)
캄파니아 A 식기가 발굴된 지역. (출처: 테일러 라분 Ancient Naples: A Documentary History)

그 엄청난 숫자는 캄파니아 A가 지중해 해안 지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기본 식기였음을 추측케 한다. 이 광활한 지역의 필수품 생산과 공급을 독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나폴리 상인들이 일찍부터 대량생산(노예를 활용한)과 해상 무역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무역업은 로마의 비호 아래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조약을 통해 로마와 동등한 동맹국 지위를 보장받은 나폴리는 지속적으로 로마의 우방역할에 충실했고, 기원전 91-87년 로마 동맹 도시들이 시민권을 쟁취하기 위해 일으킨 동맹시 전쟁에서도 로마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무역항구 나폴리의 황금기는 곧 끝을 맞이하게 된다. 거듭된 전란 속에서도 신의를 지켰던 나폴리는 어처구니없게도 로마 내 두 세력 간 벌어진 내전으로부터 치명적 피해를 입고 만다. 화근이 된 것은 그들의 그리스적 환대 문화였다. 기원전 88년, 동맹시 전쟁 후 불거져 나온 마리우스-술라 간의 혈전 중 술라가 로마를 장악하자, 그의 숙적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피신해 훗날을 도모한다. 아프리카로 향하던 도중, 그는 잠시  나폴리 치하의 이스키아 섬에서 머물렀고, 그곳에서 큰 환대를 받았다. 불행히도 이 사실은 그의 숙적 술라에게 전해지게 된다.

술라(138-78 BC) 조각상


이로써 나폴리는 본의 아니게 로마 최초 종신 독정관이자, "나를 도운 친구애게도, 나에게 해를 입힌 적에게도, 내가 완벽하게 빛을 갚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라는 말을 남긴 '행운아 술라'를 적으로 만들게 됐다. 6년 후인 기원전 82년, 나폴리는 마리우스에게 보여준 호의를 피로 돌려받아야만 했다. 미트리다테스 전쟁으로부터 귀환하여 로마를(그의 부재중 로마를 손에 넣은 마리우스파에게서) 탈환하기 위해 브룬디시움에서부터 북진하던 술라군은 나폴리로 기수를 돌린다. 나폴리를 벌하기 위한 진군인 동시에 로마를 치기 전에 배후를 확실하게 해두어야 한다는 전략적 결정이었을 테다.


높이 쌓아 올린 나폴리 성벽은 견고했다. 그러나 백전노장 술라는 성내 배신자를 종용하여 나폴리 내로 손쉽게 진입했다. 시내로 침투한 술라군은 도피하지 못한 지도층을 모두 학살했고, 정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나 일반 시민 인구 역시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도시의 기존 통치 체제를 완벽하게 괴멸시켰고, 인근 카프리, 이스키아, 허큘리움, 폼페이, 놀라를 모두 로마 영토(자신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술라의 침략이 남긴 피해는 컸다. 우선 나폴리는 국제 항구로서의 입지를 거의 모두 상실했다. 피해의 크기에 대한 역사가들의 의견은 분분하지만 그 여파는 ‘부재’를 통해 증명된다(테일러 라분). 그토록 활발하게 지중해를 누비던 나폴레탄 상인들의 이름이 술라 시대 이후 기록에서 자취를 감춰버리기 때문이다.


이후 찾아온 또 한 번의 내전에서도 나폴리는 재차 피해를 입게 된다. 이번에도 그들의 ‘환대 문화’가 화근이 된다. 기원전 50-51년,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폼페이우스가 건강이 매우 악화된 상태로 나폴리를 찾았다. 그리스적 종교적 의무인 Soteria/Σωτηρία(구원/보호), 즉 그가 나폴리에서 숨을 거두는 참사를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탄 나폴리인들은 그가 건강을 되찾도록 전력을 다했다고 전해진다. 다행히 폼페이우스는 건강을 회복했고 나폴리인들은 이를 경축하는 큰 축제를 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폼페이우스와 나폴리 사이 의미 있는 후원관계가 형성됐다는 정황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나폴리는 그의 지지세력이라는 오해를 피할 수 없었다. 폼페이우스-카이사르 간의 혈투에서 최종 승리한 카이사르는 정적의 건강을 회복시키고, 그를 위해 축제까지 열었던 나폴리를 곱게 볼 수 없었을 것이다(키케로는 폼페이우스가 나폴리의 극진한 대접으로 건강을 회복하게 된 것은 폼페이우스 개인에게도 나폴리에게도 불운한 일이었다고 회상한다). 결과적으로 나폴리는 카이사르 치세의 로마 중심 세계에서 완벽하게 정치 경제적 입지를 상실했다. 보유하고 있던 함선과 해군은 모두 로마 함대로 편입되었으며, 테레니아 해 최대 무역 도시의 자리 또한 인근 포추올리에 내어주게 된다.



<철학의 안식처 나폴리>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퇴보’에도 불구하고 공화정 후기/제정 초기 로마인들은 여전히 나폴리에 대한 환상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폴리가 상징하는 문화적 향유는 끊임없이 로마 상류층을 남쪽으로 유인해내고 있었다. 거의 모든 초기 황제들이 나폴리에 빌라를 건설했고,  스키피오, 안토니우스, 크라수스, 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 키케로 등, 인지도 있는 상류층 인사들은 빠짐없이 나폴리 해안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했듯이 나폴리의 매력은 그 자연환경과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광활한 지중해, 진귀한 와인과 해산물, 각종 질병을 치유한다고 알려진 인근 자연 온천들에 앞서 로마의 상류층을 매혹한 것은 바로 나폴리에 남아있는 그리스적 삶의 가능성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Otium 즉 라틴어로 '여가'를 가리키는, 환락적 삶의 예술을 갈고닦고자 했다.


개인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늘 외적뿐만 아니라 로마 내 정적과의 사투에 전력을 다해야 했던 로마인들에게 올바른 삶의 이상향은 강건한 군인이었다(김준산). 에트루리아, 삼나이, 게르만, 카르타고를 상대로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의 패권을 쟁취해 낸 로마인들은 강인한 인간을 숭상했다. 이러한 로마 상류층 다수가 그들 삶의 지표로 삼았던 사상은 스토아주의였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인간을 충동적인 행동으로 이끄는 감정을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현자는 인간 보편적 이성, 즉 로고스를 통해 이를 수 있는 경지, ‘아파테이아’(평정심, 판단 중지, 무심함)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었다. 즉 지혜로운 인간은 감정에 휘둘리는 수동적인 삶이 아닌 이성을 통해서 능동적인 삶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다수 로마 상류층에게 있어서 이러한 아파테이아의 사수는 공적인 삶을 통해서만 추구될 수 있는 것이었다. 스토아학도는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라는 자연적 지혜를 인지했고, ‘결단’을 통해 자발적으로 공익을 위해 스스로를 바치는 태도를 규범으로 삼았다. 인간 모두에게는 동일한 로고스가 주어져 있고, 따라서 "[현자]는 평안한 사생활을 하지 않고, 공공생활에 끼어들며, 이 공공생활에서 자기의 의무를 다한다는 것“(힐쉬베르거)이 그들이 설파한 이치였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부와 명예에 탐닉하지 않으면서도, 공적인 삶에 충실한 자만이 스토아적 ‘현자’ 일 수 있다고 믿었다. 사회의 중심에서 수많은 유혹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평정심을 지켜내며, 오직 자발적으로 판단한 이성의 결정을 통해서 움직이는 자를 의미했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인물 중 다수가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둔(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간에) 시인, 철학자였던 반면, 술라, 스키피오, 카이사르, 키케로, 세네카 등, 로마의 명사 중 다수가 공직에서 활약한 인물임을 발견할 수 있다. (시인 베르길리우스 역시 로마를 위해 로마의 건국신화를 집필하여 그의 벗이자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했다).


반면 '지상낙원', 나폴리를 지배하던 사상은 에피쿠로스주의였다. 이는 이탈리아의 가장 그리스적 도시 나폴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그리스와의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방증하는 것이었다. 나폴리 인근 헤르쿠라네움의 호화로운 빌라(키케로의 라이벌이었던 로마인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에소니누스 소유의 빌라였다)에는 아테네에서 에피쿠로스 스쿨을 이끌었던 시리아 출신 철학자 가다라의 필로데모스가 주도하는 에피쿠로스 살롱이 있었고, 나폴리 서쪽에는 시로'Siro'라 불리던 로마인의 빌라를 중심으로 하는 또 하나의 에피쿠로스 철학 살롱이 존재했다(베르길리우스가 이 살롱의 회원이었다. 추후 그는 이 빌라를 시로로부터 상속받게 된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나폴리를 ‘평온한 철학의 피난처’라 불렀다.


스토아주의자들과 달리 에피쿠로스는 감각을 배척할 것을 주문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아타락시아)은 복된 삶의 시작이요 끝이다”라 주장했다. “모든 선택과 노력은 신체의 건강과 영혼의 휴식을 목표로 삼는다... 우리들이 무엇을 행하는 것은 불쾌함을 피하고 영혼의 휴식을 얻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에피쿠로스)라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었다.


따라서 스토아주의가 감정이 자유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다면,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육체의 쾌락과 고통은 인간을 올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나침반이었다. 다만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아타락시아’는 세속적 쾌락과는 달리 이해돼야만 한다. 우선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고통의 부재로 정의했다. ‘쾌락’으로 번역되는 아타락시아 역시 아-(없다) 타락시아(문제) - 즉 번뇌에 따른 고통이 없는 상태를 지칭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적 '쾌락'은 격렬한 체험이 아닌, 마음의 동요에서 해방되는 평화, 즉 ‘평정의 기쁨’을 의미했다. 잠깐의 쾌락 후 더 극심한 번뇌를 가져오는 자극적인 사적 쾌락은 그가 말하는 아타락시아일 수 없었다.


"인생의 본성적인 목적에 비추어 평가한다면, 가난은 큰 부인 반면, 무한한 부는 큰 가난이다."(에피쿠로스)


따라서 그는 제자들에게 철학을 공부할 것을 주문했다. 아타락시아는 -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아야 “만 다다를 수 있는 경지이기 때문이며, ”자연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 “기 때문이었다.


"다른 모든 일에서는 힘들여 그 일을 다 끝낸 후에야 열매가 오지만, 철학에서는 지식과 쾌락이 함께 온다. 알고 난 후에 쾌락이 오는 것이 아니라, 알자마자 동시에 쾌락이 오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


로마인의 이상향이 군인이었다면, 그리스 문명은 철학자를 숭상했다(김준산). 로마의 스콜라주의와 나폴리의 에피쿠로스주의 역시 이러한 간극을 가시화하고 있었다. 로마에서는 모든 학문적 추구가 사회적 공리를 통해서 그 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면, 나폴리에서는 몸과 정신의 충만함을 위한, 배움의 즐거움을 위한 배움, 즉 학문을 위한 학문의 추구가 허락되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의 지식인들에게 나폴리에서의 Otium은 ‘방종’이 아닌, 몸과 정신이 충만해지는 경험, 즉 지혜를 사랑하기에 지속하는 공부(철학 Philosophia)를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을 뜻했다. 라틴어 Otium은 그리스어 Schole에서 파생됐으며, 그것은 즐거움을 뜻하는 동시에 '학교'를 뜻하는 Scoula의 어원이기도 했다.


이처럼 늘 그리스의 문화적 유산에 목말라했던 로마의 상류층 사이에선 아들을 그리스로 보내 철학, 웅변을 학습받는 교육이 각광받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과정은 점점 로마에 더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졌고,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서 가장 그리스적 도시였던 나폴리는 가장 인기 있는 선택지 중 하나였다. 나폴리에서는 무려 3세기 이상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비슷한 비율로 사용되고 있었고, 자연스레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는 많은 그리스인들이 나폴리를 찾고 있었다. 그들에게 기꺼이 시민권이 제공됐음은 물론이었다.



(키케로 106-43 B.C.)


“마르쿠스 키케로는 몰락하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쓰다가 결국 함께 휩쓸려가고 말았다. 엄청난 부를 가졌지만 한시도 쉴 수 없었고, 온갖 역경을 겪으며 끝내 참아내지 못했다. 물론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평소 자랑을 늘어놓았던 집정관이라는 자신의 직책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네카)

이처럼 로마에서 쟁선공후의 경쟁 속으로 스스로를 기투하는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나폴리의 존재는 마음 한구석에 간직한 평온한 안식, 진지한 공부, 세속에서 벗어나는 일탈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러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지식인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키케로였다. 그는 로마와 나폴리 사이 존재하는 삶의 태도에 대한 차이를 이해하고 있었다. 나폴리에서 지나친 교양, 지나친 탐락에 몰두하여, 지나치게 '그리스적 인간' 흉내를 내는 로마인들을 비난했지만, 동시에 군인의 도시(로마)와 철학자의 도시(나폴리) 사이 존재하는 차이를 이해했고, 그 스스로도 로마에서는 연설문을, 나폴리의 빌라에서는 철학 집필을 즐겼다. 지나친 유흥을 규탄했던 그였지만, 그 역시 나폴리에서는 로마에서와 달리 ‘죄책감 없이’ 인생의 달콤함을 즐길 수 있다고 회상하곤 했다.



호레이쇼의 이름을 딴 Via Orazio(포실리포 언덕에 위치해 있다)에서 내려다본 나폴리 해안선


기원전 1세기, 나폴리는 무역 중심지에서 휴양 도시로 정체성을 바꾸게 됐다.  호레이쇼의 "정복된 그리스가 자신의 정복자(로마)를 정복했다"(Graecia capta ferum victorem cepit)는 문장처럼(그 역시 나폴리를 사랑했다. 오늘날 포실리포에 그의 이름을 딴 도로, Via Orazio가 있다) 나폴리를 정복한 로마인들은 되려 로마인이기를 포기하고서 나폴리에서 그리스식으로 여가를 즐기는 말년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피가 끓던 젊은 시절 나폴리에서 학살을 자행했던 술라는 말년에 같은 곳으로 돌아와, 그의 빌라에서 토가를 벗고 그리스식 외투를 입고서 조용히 그의 마지막을 맞이했고, 서기 14년 카프리에 도착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인들에게는 히마티온(그리스식 겉옷)을, 그리스인들에게는 로마식 토가를 나눠주면서, “이제부터 이곳에서는 로마인들은 그리스식 옷을 입고 그리스어로 말하고, 그리스인들은 로마식 옷에 라틴어를 쓰도록 하자!”라 외쳤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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