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 5
661년 나폴리를 방문한 비잔틴 제국 황제 콘스탄스 2세는 나폴리인 바실(라틴명: 바실리우스)을 공작으로 임명한다. 기념적인 사건이었다. 나폴리는 명목상 비잔틴 작위를 하사 받은 영주가 통치하는 공국이었다. 그러나 바실 이후 그 자리는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었고, 예외 없이 나폴리인이 간택되었다. 추후 비잔틴 황제에 의해 영주로 임명되는 형식적 과정을 거칠 뿐이었다.
당시 비잔틴 제국에겐 남부 이탈리아 행정에 관여할 여력이 없었다. 발칸 반도와 아프리카에서 영토 사수를 위해 혈전 중이던 비잔틴의 눈을 피해 나폴리는 점차 자치권을 행사했고, 비잔틴 총독부 수도 라벤나가 함락당한 751년경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거듭난다. 755년 공작의 자리에 오른 스티븐 2세는 비잔틴령 나폴리의 마지막 공작이자 독립국 나폴리의 첫 공작으로 분류된다(8세기 후반부터 나폴리 공작이 제국의 작위를 하사 받는 빈도는 감소하게 된다).
8세기 이후부터 나폴리의 권력은 공작에게로 집중된다. 기존 권문세가가 종호 관계를 통해 행사하던 세력 역시 제한되었다. 공작과 나폴리 주교를 겸임한 스티븐 2세와 아타나시우스(878-898)의 예시는 그 권위가 절대적이었음을 방증한다. 공작은 나폴리 대성당 인근 궁전에서 생활하며 수하 호민관들과 백작들을 통해 영지를 통치했다. 공작 수하의 백작들은 그들이 관리하는 봉토 소속 사병을 관리하는 군사 지휘관의 성격이 강했다.
전 이탈리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롬바르드족의 침략을 물리쳐낸 항구 도시 나폴리의 위상은 높았다. 그러나 롬바르드, 로마, 이슬람, 비잔틴 사이에서 활로를 찾아야만 했던 독립국 나폴리의 존명은 늘 위태로웠다. 응당 공작의 중요한 책무는 외교 무대에서 나폴리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공국 나폴리는 이웃 강국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반복하며 시대의 기류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비잔틴의 속국이었음에도, 763년 공작 스티븐 2세는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개척하고 나선다. 751년 라벤나 함락 이후 비잔틴의 남부 이탈리아 행정 사령부는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비잔틴과 이슬람 간 세력다툼이 한창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지원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나폴리가 이웃 로마를 적으로 두는 일을 꺼렸음은 당연했다. 결국 비잔틴과 로마 사이 성상 숭배를 두고 불거진 갈등(비잔틴 황제 레오 3세는 726년 그리스도 교회의 성상 사용을 금지하는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린다. 포교 활동에 성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로마 교회가 이를 거부하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비잔틴 정교회의 분열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의 중간에서 스티븐 2세는 교황 바울 1세를 지지하고 나선다. 이 사건은 나폴리가 공공연히 콘스탄티노플에 반기를 든 첫 사례였다(이 결정을 통해 독립국 나폴리가 탄생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이를 계기로 로마 교황은 766년 사망한 나폴리의 주교 자리에 스티븐 2세를 임명한다. 이로써 그는 공작 겸 주교로서 군림하게 된다. 나폴리의 자치권과 스스로의 권위를 공고히 한 셈이었다.
이와 같은 독자적인 외교 노선은 821년 재확인된다. 나폴리는 이슬람 제국의 침략을 받아 함락 위기에 직면한 시라쿠사에 원군을 파견하라는 비잔틴의 요청을 묵살한 것이다. 나폴리 공국에게 이슬람은 강력한 위협인 동시에 소중한 무역 파트너였다. 비잔틴-이슬람 간의 갈등은 당시 서방 최강국 비잔틴 제국의 무역활동이 중동과 북아프리카 이슬람 세력권 바깥으로 제한됐음을 의미했다. 이는 나폴리, 아말피와 같은 남부 이탈리아 항구도시들에게 중개 무역의 기회를 제공했고, 821년 비잔틴을 지원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는 이러한 경제적 이권에 대한 계산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나폴리-이슬람 간의 관계는 종종 나폴리-비잔틴의 그것보다 더 친밀했는데, 836년, 나폴리는 이웃 베네벤토 왕국의 롬바르드족을 퇴치하기 위해 이슬람에 도움을 요청했고, 842-3년에는 비잔틴의 메시나를 공략하는 이슬람군에 원군을 파견함으로써 우방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결국 877-8년에는 시라쿠사가, 900년에는 시칠리아 전체가 사실상 이슬람 세력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나폴리가 비잔틴 제국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나폴리에서는 비잔틴의 공식 언어인 그리스어가 여전히 공용어로 쓰였고, 나폴리 공국 공식 주화에도 나폴리의 그리스식 명칭인 NEAPOLIS가 새겨져 있다. 결정적으로 비잔틴 황제 바실 1세가 870년대 후반, 남이탈리아 내 비잔틴 세력권을 탈환하기 위해 로마 연합군의 출범을 선언했을 때, 나폴리는 비잔틴 편에 서서 전쟁에 힘을 보탰고, 880년대에는 임시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 안으로 복귀한다.
<독립국 나폴리>
10세기-11세기에 이르러 나폴리는 로마에 점령당하기 이전 무역 도시로서의 영광을 되찾는다. 이웃에 아말피(롬바르드의 베네벤토 공작령 소속이었다)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존재했으나, 지중해 무역 규모의 성장과 함께 소도시 아말피는 그 중심 역할을 나폴리에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Lancaster)
공국 초기(암흑기) 나폴리 인구는 1만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포스트에서 설명했듯 로마의 몰락 이후 찾아온 전란 속에서 급격한 인구 감소를 겪은 나폴리였으나, 아우구스투스 시절 백만 인구에서 3만-4만( 7-8세기)으로까지의 하락을 경험한 로마에 비하면 상황은 비교적 양호했다. 공국 인구는 8세기 중반 이후부터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이가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그 규모는 공국 역사 내내 1만에서 2만 사이를 유지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나폴리 공국은 다민족 사회였다. 외교전에서 보여준 일관성의 결여 역시 이러한 점을 반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나폴리에는 비잔틴과 지중해 전역에서 이주해 온 그리스인들이 다수 거주했다. 그리스인들은 롬바르드족을 피해 남부 이탈리아의 대표적 비잔틴 도시 나폴리를 찾았고, 칼라브리아와 루카니아와 같은 남부 지역의 그리스인들 역시 이슬람 세력의 침략 이후 나폴리를 찾았다. 마지막으로 우상숭배 문제를 계기로 다수의 비잔틴 수도승들이 나폴리로 삶의 터를 옮겼다.
이슬람의 시칠리아 정복 이후 이곳에 정착한 이슬람 인구 역시 상당수에 이르렀다. 나폴리가 이슬람의 마그렙과 무역 파트너가 된 9세기부터 그 경향은 도드라졌다. 880년 공작 아타나시우스 2세는 아글라비즈 왕국의 이슬람 인구를 공국 안으로 받아들일 것임을 선언하고, 이는 추가적인 이주가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그 외에도 다수 게르만족, 특히 유태인들이 나폴리에 상당수 거주하고 있었다. 984년 기록에 따르면 당시 나폴리에는 하나의 시나고그와 세 곳의 유태인 지구가 마련되어 있었다.(Paul Arthur)
반면 나폴리 공국의 사회 계층은 기본적으로 비잔틴의 그것을 답습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세 계층 Maiore, Mediani, Minores으로 나뉘었고, 이 셋을 구분하는 기준은 국가를 위한 군사적 기여의 의무였다. 상류층에 해당하는 마이오레에게는 군마들과 완전무장이, 중산층 메디아니에게는 군마와 경장비가, 하류층 미노레스에게는 활과 화살이 요구되었다.
나폴리의 상류층은 공작, 백작, 주교를 포함한 사제와 군인 구성이었고, 그들이 소속된 가문들의 부는 기본적으로 토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상업에도 자본을 투자했지만, 상업 활동은 주로 중개인을 통해 이루어졌기에 상인으로서 두각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스스로를 지주로 규정하는 상류층의 이와 같은 계층에 관한 이념은 상당히 비잔틴적인 것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아말피, 제노바, 베네치아와 같은 급성장한 항구도시들과 나폴리의 차이점이었다. 타 항구의 상인들이 무역활동을 통해 얻은 부를 통해 곧장 사회적 주류로 부상할 수 있었다면, 나폴리의 상류층은 상업적 성공이 아닌 문화 활동, 연회, 그 외 의식을 통해 그들의 도시 내 입지를 공고히 했다(Arthur). 따라서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는 궁중 의식과 같은 부의 과시가 빈번했고, 선물 교환, 특히 보석(공작에 의해 직접 관리되던 금을 제외한(Arthur), 비단, 와인, 향신료 따위의 고가품의 소비가 보편적이었다. 한편 계급의식의 확인을 위해 군사적 의식이 활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는데(전술한 ‘군장비’에 입각한 계급 구분에도 불구하고) 이는 도시 상류층의 풍습이 호전적인 게르만족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현시한다. 반면 사제 계급을 비롯한 지도층의 교육 수준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예외적으로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했듯이 중세 이탈리아사를 통틀어 나폴리는 비잔틴과의 교류를 통해 축적된 그리스 문화 보존/파급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이러한 문화적 ‘포교’ 활동은 교회를 통해 이루어졌고, 6세기 나폴리는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예외적으로 명성 높은 수도원-필사실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수도승, 사제뿐만 아니라 지도층 또한 매우 높은 문화 수준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거의 모든 공작들이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었고, 요한 3세(928-968)의 대에 이르러 나폴리 공작의 도서관은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책을 보유했다고 전해진다. 공국 역사 내내 콘스탄티노플과 나폴리 사이 문화적 교류는 지속되었다.
<노르만의 침략>
아쉽게도 나폴리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공국의 역사는 1070년 끝을 맞이하게 된다. 북방민족으로부터 무려 700년 가까이 성공적으로 도시를 지켜낸 나폴리인들은 단 한 번의 치명적 실수로 그들의 주권을 상실하고 만다. 바로 1027년, 공작 세르지오 7세가 지속된 롬바르드 왕국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노르만족 용병을 고용하기로 한 결정이었다.
당시 전개되고 있던 노르만족의 대이동은 서유럽의 지도를 재편하고 있었다. 그들은 노르망디와 영국(정복왕 윌리엄의 영국 정복)을 점령했고, 유럽 전역에서 그들의 정복사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세르지오 7세는 바로 이 바이킹의 탐욕스러운 후예들을 나폴리로 초대한 것이었다. 거기다가 프랑스 왕의 전철을 반복하려 했던 것인지, 나폴리 근교 아베르사를 노르만 영토로 하사했다.
안타깝게도 나폴리는 프랑스와 같은 대국이 아니었다. 대략 90년간 노르만의 공세를 저항해냄으로써, 그들의 세력권을 노르망디로 제한할 수 있었던 프랑스와 달리, 이이제이를 꿈꿨던 나폴리는 국토 전부를, 노르만족에게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이로써 나폴리 역사는 독립국 나폴리의 장을 마치고, 노르만-나폴리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