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능의 욕망 Dec 26. 2023

판타지아 이탈리아나 출간 4

두언데와 엘레간떼, 사르토리아 피오렌티나


<두언데와 엘레간떼> 


우리는 수트와 재킷으로 대표되는 복식 양식을 클래식 남성복 또는 양복(洋服)이라 즐겨 부른다. 이 표현에는 그것이 유럽 문명 전체를 관통하는 서양의 공동유산이라는 믿음이 내재한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마니아들을 매료시킨 ‘클래식 남성복’은 이탈리아적 해석을 통해 재구성된 것이었다. 브리오니, 키톤, 아톨리니로 대표되는 고품질의 기성복(명성 있는 고가 브랜드라는 기호가 빚어낸 스펙타클), 곡선적 실루엣, 가벼운 착용감, 핸드 메이드(La Giacca Fatta a Mano)의 기치를 앞세운 사르토리아 나폴레타나, 마지막으로 스콧 슈먼이 카메라 속에 담아낸 이탈리아 신사들의 우아함은 클래식 남성복 부활의 결정적 촉매제였다. 


사르토리아 이탈리아나라는 유산의 수혜자인 이탈리아 노신사들의 수트/재킷 차림은 막강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애호가들이 그들의 멋을 전용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밀라노, 피렌체, 나폴리식 수미주라 수트, 스프레차투라, 마니카 카미치아 등, 우리는 이탈리아식 우아함에 관한 연구를 이어왔다. 


유벤투스 경기를 관람하는 지아니 아니엘리와 그의 동생 움베르토 아니엘리.


시간이 흘렀다. 2023년, 어느덧 애호가들은 그들의 옷차림을 철저하게 답습하기보다는, 나름의 ‘응용’에 힘을 쓸 때가 왔다고 믿게 됐다. 지아니 아니엘리, 세르지오 로로피아나, 루치아노 바르베라, 프랑코 미누치 등 20세기가 배출한 스타일 아이콘의 사진을 피드에서 접하기도 어려워졌다. 


신사라면 블루, 그레이, 샤크스킨, 버즈아이, 플란넬, 여름용 코튼, 리넨 수트와, 블레이저, 트위드/스코티시 재킷, 프락 또는 디너재킷과 모닝코트를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안토니오 파스카리엘로)


재킷차림조차 종종 ‘지나치다’고 느끼는 우리에게 마에스트로가 이야기하는 남성상은, 우리 일상과 너무 먼 것이 되고 말았다. 오늘의 애호가들은 재킷과 수트를 조금 더 캐주얼하게 활용하는 각종 '응용'의 실험에 열을 올리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아버지 세대에게서 복식의 올바른 이해를 수여받지 못한 동서양의 엑스 세대/ 밀레니얼 세대 중 일부는 ‘패션’의 휘발성에 환멸을 느끼고서, 역사의 변증법이 일구어낸 클래식의 깊이에 다이빙했다. 그러나 어느덧 그들은 다시금 스스로에게 익숙한/편안한 얕은 문화와 클래식을 섞어내고 있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외롭게 ‘긴장을 유지하는 일’에 지쳐버린 것일까, 클래식의 바다 역시 얕은 도랑에 불과했음을 깨달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숙련된 재봉사의 인력 부족을 겪고 있는 업계의 품질 저하 현상이 애호가들을 낙담하게 한 것일까.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난 가끔씩 꺼내 보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댄디들의 사진, 30-50년대 영화, 같은 시대의 영상자료들을 살펴보며 아쉽게도 오늘의 ‘응용’은 그들만큼의 경탄을 안겨주지 못함을 확인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은 그토록 우아했던 것일까. 


<엘레간차 나폴레타나> 


발터 벤야민은 나폴리를 Porous한 도시라고 설명했다. Porosity는 나폴레탄 개개인의 성향이기도 하다. 만약 신이 나폴리인 전부를 천국으로 데려가고자 한다면, 빨랫줄 하나를 잡아당기기만 해도, 도시 전체가 꼬리를 물고서 하늘로 끌려 올라갈 것이라는 루치아노 데 크레센초의 표현처럼, 그들은 서로서로에게 단단히 엮인 채로 살아간다(그들의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그들의 일상은 이웃의 삶을 속속들이 관통하며 (그들의 언어에는 프라이버시라는 단어가 없다. 필요할 경우 ‘사생활’을 말하기 위해 이탈리아식 발음으로 영어 표현 프-라-이-버-시를 사용한다), 몸과 신경은 바깥을 향해 활짝 열린 채로, 모든 자극에 번개처럼 반응한다(주로 불평/불만/아이러니가 섞인 목소리로). 


Napoli


이곳 거리에서 우리는 손쉽게 나폴레탄 신사가 목청, 입술, 이마, 팔과 손을 총동원하여 격정적으로 대화에 임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손짓, 고갯짓, 탄성, 추임새, 때로는 특유의 무릎을 굽혔다 펴는 수직 운동(화를 낼 때)까지, 그들의 의사소통은 다만 대화가 아니라 연극이며, 춤이다. 삶의 리듬을 타는 데 있어서 탁월한 것이 이들이다. 나는 즐겨 그들의 의식과 몸 사이 ‘싱크로율’이 높다고 표현한다. (다소 엉뚱한 비유일지 모르나, 내가 그들에게서 느끼는 매력은 학창 시절 흑인들을 보면서 느꼈던 그것과 닮아있다. 학창 시절, 나는 같은 말, 같은 춤도 흑인 아티스트가 하면 더 자연스럽고, 멋스럽다는 사실에 감탄하곤 했다.) 


우아함은 ‘조화’에서 비롯한다. “남자의 옷은 그의 체형, 피부색, 머리색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알란 플러서의 충고는 “지나가는 행인이 고개를 돌려 당신을 살펴보았다면, 당신은 올바르게 옷을 입지 못한 것이다”라는 보 브루멜의 일침과 일맥상통을 이룬다.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규율은 우리의 복장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못할 정도로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시사한다. (TPO 역시 같은 맥락에서 – 복장은 그곳의 환경에 잘 녹아들어야만 한다- 이해될 수 있을 테다) 따라서 이탈리아인의 우아함은 분명 그들의 옷차림이 그들 도시와 이루어내는 미적 일관성에서 기원하고, 둘 사이 균형은 주위 환경을 감각하고 수용하며 반영하는 그들 몸의 순발력을 통해 조율된다. 분명 그들은 영미/동양인보다 삶의 리듬을 타는 데 있어서 탁월하다.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오나시스는 전혀 우아하지 못해. 그에게선 돈 냄새가 날 뿐이야. 우선 그는 웃질 못하는 남자야!”  (파스카리엘로)


당대의 아이콘 아이콘 아리스토틀 오나시스를 망설임 없이 ‘우아하지 못한 남자’로 규정해 버리는 마에스트로 파스카리엘로의 일침에도 경직되어 있는 인간은 우아하지 못하다는 그들 특유의 미적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 


휴가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집은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가 떠난 이후 집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모든 가구와 창문과 램프가 일깨웠을 의무가 잊혀졌다는 것은 집에 안식일과 같은 평화를 가져다준다. 처음 몇 분 동안, 단 한 번만 존재하는 방과 구석이나 복도 안에 있는 듯이 느끼며, 이러한 느낌은 그곳에서의 나머지 삶이 거짓말처럼 보이게 만든다. 세상이 노동의 법칙 아래 있지 않다면, 세상은 지금과 다르지 않고 별로 변한 것이 없지만 나날이 축제 같을 것이며, 휴가에서 집에 돌아온 아이처럼 의무는 휴가 때 놀이만큼 가벼울 것이다. (아도르노)


La Nostra Napoli!를 부르며 행복감에 젖는 나폴리인들은 그들의 도시를 끔찍이 사랑한다. 그들의 눈 속에서 나폴리는 일상의 무게 아래 짓눌리지 않은 채로 찬란한 빛을 내고 있다. 아도르노의 표현처럼 “돈을 벌어야 한다!”는 계명에 억눌린 인간에게는 그의 호화로운 저택 역시 다음날의 임노동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 외 다른 것일 수 없다. 


거리의 척박함, 미비한 소득, 구조적 소외(낙후된 남부 이탈리아가 여전히 겪고 있는 차별/오명/현실)라는 잔인한 언어의 공습 아래서도 나폴리 사람들은 스스로가 그들의 수호성인 산 제나로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선택받은 민족임을 확신한다. 북부 이탈리아인들이 보내는 멸시 역시 “La Città piena del sole” “태양 가득한 도시”의 색을 바래게 하지 못한다. 자격지심을 모르는 그들은 스스로가 “파라다이스”에 살고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또는 삶 자체가 작은 무대임을 이해하는 그들은 자기 도시를 사랑하는 연기적 주체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다). 


Per me, l'eleganza è la disinvoltura... indossare un abito.  (Antonio Panico)
내게 있어서 엘레간자는 자기 확신이야. 수트를 입어내는 (그 사람의) 자기 확신 말이야. “  (안토니오 파니코)


그들 도시가 보유한 유산에 대한 자신감이야말로 그들의 우아함을 설명한다. 즉 내 옷차림이 아름답다는 확신, 그것을 내가 결정한다는 의식이다. “내 미적 주권의 소유자는 나”(김준산)라는 자신감보다 그들의 문화적 유산을 정확하게 말해주는 것은 없다. 나폴리가 보유한 아름다움이 세계 최고라는 신념이 허락하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더 수준 높은 아름다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당당함이 그들의 우아함을 설명한다. 스스로의 감각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이들은 도시를 향해 몸을 활짝 열고서 그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루려 노력한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Naturellezza라고 하는 자연스러움은 진정 총체적인 것이다. 


Un uomo elegante ha incedere elegante. (Antonio Pascariello)
우아한 남자는 우아하게 걷기 마련이지. (안토니오 파스카리엘로)




<사르토리아 피오렌티나>


두언데와 엘레간떼 챕터에서 난 도시의 정취가 시민들의 옷차림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이야기했다. 같은 관점에 입각해 아르노 강 양방을 6-700년 된 건축물로 꽉꽉 채운 소도시 피렌체의 건축 양식과 피렌체에서 탄생한 수트 스타일 간의 연관성을 살펴보는 일 역시 흥미롭다. 


리베라노를 통해 인지도를 얻은 ‘피렌체 컷’은 익스텐디드 숄더를 기본으로 한다. 어깨너비를 실제 손님의 어깨보다 조금 더 크게 재단함으로써 재킷 최상단부에 시각적 무게를 더한다. 매끈하게 떨어지는 수직선을 강조하는 사르토리아 나폴레타나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넓은 어깨를 중심으로 구현되는 수평적 균형미는 피렌체식 수트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사진: The Armoury

어깨를 부각하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 어깨-소매 경계선의 각도다. 이 선의 각도가 조금 더 도드라진 대각선으로 재단된다. 가파른 선의 존재는 어깨를 더욱 부각시킨다. 각도가 다르기에 다른 지역의 사르토들은 이러한 소매 달기 방식을 손쉽게 수행해내지 못한다. 이 차이에 대해서 귀띔해 준 것은 나폴리 안토니오 파스카리엘로 공방의 장원석 사르토였다. 그는 내게 피렌체 수트의 암홀 각도가 다른 지역의 수트들에 비해 도드라지게 바깥쪽으로 ‘누워’ 있음을 지적해 주었다.  


“피렌체 수트는 이런 식으로 어깨가 조금 더 바깥으로 뻗쳐 나가요. 암홀 각도가 달라서 이런 식으로 암홀을 재단하면 소매를 다는 일도 어려워져요. 하지만 호준이형과 같은 피렌체 사르토들은 이런 방식으로 소매 다는 기술에 익숙해져서 어려움을 못 느낀다고 하더라고요.”


넓은 어깨와 함께 피렌체 수트를 정의하는 또 하나의 디테일은 바로 프런트 다트의 부재다. 피렌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가슴과 허리 사이 볼륨 차이, 즉 ‘허리 조임’은 주로 다트를 통해서 연출된다. 반면, 피렌체식 수트는 정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겨드랑이에서 힙 포켓 중간까지 내려오는 사이드 벤트 하나만을 활용한다. 이러한 재단 방식은 타 지역의 수트들보다 허리 조임 효과가 도드라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 차이는 남성이 팔을 흔들며 걸음을 옮길 때 확연하게 체감되는 데, 이렇게 제작된 재킷 앞판은 몸의 움직임에 따라 통째로 앞으로 전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나폴리의 몇몇 사르토들은 조롱 섞인 말투로 “재킷이 앞으로 점프를 뛴다!”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단점’은 전술한 균형미와, 곡선의 적극적 활용을 통해 보완된다. 보형물 없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어깨, 너비가 도드라지게 넓고 다소 낮게 위치한 칼라와 매우 곧은 직선으로 재단되어, 되려 가운데 버트닝 포인트를 향해 안으로 휘어 감기는 라펠선(이와 반대로 영국식 재킷 라펠에는 부푼 곡선(벨리)이 가미된다. 따라서 버튼을 잠갔을 때에는 라펠선이 직선을 그리게 된다 – 또 다른 피렌체의 저명한 사르토리아, 사르토리아 베스트루치의 재킷 라펠은 리베라노의 그것에 비해 더 직선적이다), 버트닝 포인트에서부터 바깥쪽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오픈 쿼터, 모두 재킷에 입체감을 구현하는 데 일조한다. 


프런트 다트를 통해 구현하는 자연스러움은 장식적 요소의 최소화를 통해 더더욱 부각된다. 가장 기본적인 선택인 오픈심 숄더, 깔끔한 제티드 포켓, 부드러운 심지와 어깨 내부 구성물은 피렌체 수트가 특정 요소를 도드라지게 하지 않는다는 점을 가시화한다. 


이와 같은 수평적 균형미와, 장식적 요소의 최소화, 곡선의 활용은 피렌체 건축의 중심적 특징이다. 알베르티가 집대성한 건축론에 명시돼 있듯, 르네상스 건축은 수평적 균형과 곡선을 강조하는 동시에 균형미로부터 시선을 분산시킬 개별적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르네상스 양식 건축과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내었고, 이 챕터는 시작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판타지아 이탈리아나 출간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