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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Mar 18. 2024

시칠리아 왕국 탄생과 루제로 2세

나폴리 7

1130년, 로마이남부터 시칠리아까지를 아우르는 시칠리아 왕국이 탄생한다. 향후 나폴리 역사 700년을 결정한 사건이다. 이로부터 남부이탈리아 왕정체제는 1861년 이탈리아 통일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초대국왕은 루제로 2세, 나폴리 플레비시토 광장에 서 있는 여덟 조각상 중 첫 번째 인물이다. 노르만의 대표 군웅 로베르 쥐스카르의 조카인 그는 1130년 시칠리아 왕국의 초대왕으로 즉위한다.


그는 아버지 루제로 1세, 삼촌 쥐스카르와는 결이 다른 인물이었다. 세계의 공포라 불리던 치비타테 전투의 영웅 쥐스카르와 극소수의 병사만으로 시칠리아를 통일한 루제로 1세와 달리 루제로 2세는 전장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지도자의 운명을 점지받은 그에게는 커다란 배포와 굳센 의지가 있었다.


이전 포스트에서 다루었듯이 1085년 쥐스카르 사망 이후 남부 이탈리아는 노르만 영주들 간 치열한 세력싸움의 장으로 전락한다. 쥐스카르의 두 아들 보헤몬드와 루제로 보르사 간의 혈투는 아버지가 통일한 반도 남부를 갈라놓았고, 각 지역의 수하 영주들은 그들의 자치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남이탈리아의 정세는 혼란에 휩싸였다.


오직 루제로(1세)의 영지 시칠리아만이 예외였다. 1057년 형 쥐스카르와 함께 이탈리아에 상륙한 그는 쥐스카르 생전 가장 강력한 조원자였으며, ‘무적’이라 불리던 쥐스카르의 유일한 적수였다. ‘족제비(쥐스카르)’라는 별명답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며 적의 경계를 느슨하게 하고서 급습하는 전략을 애용했던 쥐스카르는(동시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속임수를 두고 ‘쥐스카르’를 썼다라고까지 이야기했다), 그의 동료들, 심지어 형제들을 상대로도 교활함을 발휘했는데, 그들의 도움이 급할 때에는 영토와 보상을 약속하며 동원하고서, 전투가 끝나면 약속을 파기하는 식이었다. 부하/친척들은 분노했지만 모든 이의제기에 힘으로 응수하는 쥐스카르의 뻔뻔함 앞에서 체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힘으로 제압당하기 일쑤였다. 다만 오직 루제로만이 예외였다. 그는 몇 차례에 걸쳐 쥐스카르의 위약행위에 반기를 들었고, 뒤따른 군사적 충돌에서 번번이 쥐스카르에게 망신을 안겨주었다.


쥐스카르와 루제로 1세


결국 쥐스카르는 칼라브리아의 일부를 동생 루제로에게 양보해야 했다. 반도를 풀리아와 칼라브리아 양쪽에서 잠식해 들어간 두 형제는  1061년 바리 함락과 함께 풀리아 정복을 완수하고서 시선을 시칠리아로 돌린다. 1061년 시작된 시칠리아 원정을 도맡아 이끈 것은 루제로였다.  반도 내 적들을 소탕해야 했던 쥐스카르는 시칠리아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루제로는 형의 도움 없이 소수의 병력만으로(1062년 시칠리아 원정에서 그가 지휘하던 병사는 기사 100기뿐이었다. 병사수는 총 600 정도였을 것이다) 정복전쟁을 이어간다(되려 그는 수차례 쥐스카르를 지원하기 위해 시칠리아를 비워야 했다). 영리함에 있어서는 형 못지않았던 루제로는 이슬람 세력 내 분열을 틈타 팔레르모에서부터 노토까지 점차적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아갔고, 1091년  시칠리아를 오트빌 가문의 깃발아래 통일했다. 이로써 그는 시칠리아 공작자리에 오르게 된다.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반도 사이의 섬 시칠리아는 영주에게 무한정의 자원을 제공해 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았다. 온화한 기후 아래 펼쳐진 비옥한 농지와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항구가 공존하는 땅이었다. 물론 시칠리아의 모든 주요 도시들은 제노바, 이슬람, 비잔틴 선박들이 애용하는 팔레르모, 메시나와 같은 항구도시였다(이들 도시들은 제노바-이슬람과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던 반면 제노바의 적국 피사-베네치아와는 적대 관계에 있었다).


1085년 쥐스카르 사망 이후 벌어진 형제간(보헤몬드와 루지에로 보르사) 전쟁에서 루제로는 보르사를 지원한다. 다만 대가 없는 원조는 아니었다. 보르사는 삼촌에게서 지속적인 도움을 확보하기 위해 칼라브리아를 전부 루제로에게 넘겨줘야 했다. 혈전을 벌이는 두 조카 사이에서 루제로는 남이탈리아 최대영지를 다스리는 공작이자 노르만의 최강자로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그러나 1101년, 루제로(루지에로 1세)가 사망한다. 불과 6세에 불과했던 그의 아들 루제로(루제로 2세/루지에로 2세)가 후계자로서 시칠리아 공작자리에 올랐고, 어머니 아델라이데가 섭정을 맡게 된다. 노르만족은 다시금  힘의 구심점을 잃고 말았다. 시칠리아 공작의 세력권 역시 시칠리아 내로 축소되었다. 칼라브리아, 풀리아, 캄파니아 지역에서 노르만 영주들 간의 세력싸움이 재차 격화된다.



1112년, 루제로가 어머니 없이 통치를 시작할 무렵, 남이탈리아의 정세는 달라져 있었다. 쥐스카르의 유산을 두고 다투던 보헤몬드와 루재로 보르사가 1111년 2주 간격으로 모두 사망한다. 풀리아 공작의 자리를 이어받은 것은 당시 16세였던 보르사의 아들 윌리엄이었다. 노르만의 영주들이 소년 공작에게 쉽사리 머리를 굽힐 리 없었다. 분열의 장기화가 예고되고 있었다.


반면 성년을 맞이한 루제로 2세는 곧장 반도 내 이권을 확보하는 계획에 착수한다. 윌리엄(쥐스카르의 손자/루지에로 보르사의 아들) 즉위 초기 루제로는 본토를 향한 야욕을 드러내며, 군사적 충돌을 빚기도 했지만, 이후 아버지가 보르사를 지원했듯이, 그 역시 조카뻘인 윌리엄을 보조한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윌리엄은 만약 사망 시 그에게 후계자가 없다면 자신의 공작 작위를 루제로에게 계승하기로 약속한다.


윌리엄이 진정 루제로에게 영지 전체를 넘겨주려 했는지 여부를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짐작컨대 그는 자신이 서른 나이에 요절할 것이라 내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일찍 혼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1127년, 윌리엄의 사망과 함께 지중해의 최강자 루제로는 남부 이탈리아 전체를 손아귀에 넣을 명분을 확보한다.  


루제로 2세


그가 윌리엄의 영토를 전부 차지한다면, 오트빌 가문 영토가 전부 통일되는 셈이었다. 남부이탈리아를 아우르는 지중해 최강국의 탄생이 예고되고 있었다. 물론 루제로는 곧장 풀리아와 칼라브리아의 통치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남이탈리아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했던 교황청, 명분상 이탈리아 전체가 그의 것이라 주장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로타르 3세(1133년 황제로 즉위한다), 자치권을 행사하는 데 익숙해진 노르만 영주들이 루제로의 앞길을 막고 나섰다. 절대강자의 등장을 바라는 이는 없었다.


루제로에게 가장 골치 아픈 존재는 교황 호노리우스 2세였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영적 지도자인 그는 남이탈리아 통일을 좌절시키는 데 필사적이었다. 교황은 윌리엄 오트빌이 임종 직전 그의 영지를 전부 교황청에 양도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풀리아 공작의 영토 전부가 그의 관할임을 선언했다. 그는 ‘감히’ 교황청의 영토를 넘보는 루지에로를 파문하는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교들에게 루지에로를 상대로 전쟁에 임할 것을 호소했다. 참전한다면 생전의 죄가 사해질 것이라는 약속을 외치며 ‘성전’을 주문한 것이다(교황이 면죄를 약속하며 참전을 호소한 것은 십자군 원정을 앞서는 예시였다).


교황의 부추김 덕에 캄파니아와 풀리아의 영주들은 반-시칠리아 깃발아래 단결한다. 오노리우 스는 친히 베네벤토까지 내려와 인근 영주들의 반-루지에로 봉기를 독촉했다. 결국 1128년 카푸아의 군주 로베르 드렝고(아베르사 공작 가문)를 앞세운 반-시칠리아 연합군과 루지에로의 시칠리아군 사이 전쟁이 발발한다.


언급했듯이 루제로는 전장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 군주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겐 오트빌가의 남아다운 영악함이 있었다. 연합군이 영지들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느지막이 5월이 다 돼서야 시칠리아군을 이끌고 본토에 상륙한다. 그는 처음부터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믿고 있던 것은 시칠리아군이 아닌 남 이탈리아의 살인적인 더위였다. 군사들을 비교적 시원한 숲으로 옮겨둔 루제로는 오랜 병영 생활에 지친 반-시칠리아 연합 병사들이 더위 아래서 전의를 상실할 때까지 기다렸다. 결국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없이 연합군 대부분은 해산했고, 패배를 인정한 교황은 루지에로에게 서신을 보내 베네벤토로 찾아온다면 풀리아 공작 작위를 하사하겠다며 화해를 꾀한다. 결국 1128년 8월, 그는 스스로 파문했던 루지에로를 풀리아 공작으로 임명한다.


결국 교황은 망신을 당한 채 로마로 돌아갔지만, 그가 남이탈리아 전역에 지른 불을 끄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루지에로는 캄파니아 뿐 아니라 풀리아의 영주들을 모두 굴복시켜야 했다. 결국 1130년이 돼서야 남이탈리아의 노르만 영토 전부가 그의 휘하로 통합된다. 어느덧 로마 이남 대부분을 그의 세력권으로 확보한 루제로에게 삼촌 엔리코 공작(루제로의 어머니 아델라이데의 형제)은 그가 공작이 아니라 왕으로서 지역을 통치할 때가 왔음을 조언한다. 틈만 나면 ‘시칠리아/풀리아 공작’의 권위에 도전하는 영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도 국왕으로서 그들 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루지에로는 그가 각별히 아끼던 삼촌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나 '권위’를 행사하기 위한 왕좌를 무단으로 선언할 수는 없었다. 왕위에 오르는 일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 영적 지도자인 교황과 지상의 통치자인 황제/카이사르가 군림하는 체제(명목상의) 내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무엇보다 교황의 인가가 필수적이었다. 그가 인준한 대칙서 없이는 제대로 된 즉위식조차 올릴 수 없었다.  


같은 해(1130), 그의 정적 교황 호노리우스가 때마침 사망한다. 루제로에게 행운이 따르는 듯했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다음 교황 자리를 두고 작게는 로마의 추기경들, 크게는 전 그리스도교 세계가 두 인물을 사이에 두고 분열하고 있었다. 로마의 원로 추기경들과 전통 로마 가문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아나클레투스 2세와 젊은 추기경들을 비롯한 수도원 세력을 대표하는 이노센트 2세가 그들이었다. 교황 선출을 논의하는 여덟의 추기경 중 셋이 아나클레투스를, 다섯이 이노센트를 지지하고 있었다.


분열의 원인 역시 간단치 않았다. 11세기를 거치며 로마 교황은 교황청의 군주일 뿐 아니라 급속도로 성장하는 그리스도 세계의 수장으로 거듭나게 됐다(호노리우스가 좋은 예였다). 유럽 내 신도(지배계급)의 대다수는 교황이 다시 로마 중심의 교황청, 즉 로마 귀족가문들의 이권을 대표하는 존재로 복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로마를 대표하는 원로 추기경들이 아나클레투스를, 젊은 추기경들과 유럽의 수도원장들이 이노센트를 지지하고 나선 연유가 여기 있었다. 이노센트를 지지하는 '개혁세력'은 프랑스, 독일, 영국 각지에서 이노센트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고, 이노센트 역시 아나클레투스파의 뿌리가 단단한 로마에서 밀려난 후, 로마를 떠나 고향 피사를 비롯한 북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스스로의 당위성을 군주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아나클레투스로서는 로마에서 그의 입지가 지나치게 단단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셈이었다. 서유럽에서 아나클레투스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었다.


두 선택지 사이에서 루제로는 오트빌다운 전략을 따른다. 왕위에 오르기 위해 아나클레투스에게 접촉한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그의 도움이 절실한) 아나클레투스에게서 그가 원하는 바를 얻어낸 후, 추후 이노센트의 세가 우세해진다면, 그때 다시 왕위 인준을 요구하며 이노센트 쪽으로 노선을 선회하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예상대로 아나클레투스는 루지에로의 제안을 거절한 처지가 아니었다. 즉각 루지에로를 풀리아, 칼라브리아, 나폴리, 카푸아, 시칠리아의 국왕으로 임명하는 대칙서가 내려왔다. 이로써 1130년 루지에로는 새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에서 즉위식을 올리게 된다. 모든 것이 루지에로가 예상했던 것보다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로서는 다소 허무한 전개였다.


그러나 아나클레투스를 택한 그의 결정은 향후 10년간 그를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가는 전란을 야기한다. 유럽 내 주요 수도원장들의 지원에 힘입어 이노센트는 결국 프랑스, 영국 국왕과 신성 로마제국 황제를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아나클레투스가 루지에로에게 그토록 신속히 대칙서를 하사한 데에도 판세가 그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배경이 작용하고 있었다(서유럽 왕가 중 루지에로만이 아나클레투스 지지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1132년에 이르렀을 때 이미 새 교황이 이노센트라는 사실은 전 유럽에 의해 기정사실화 되었다. 승리를 자신한 이노센트는 전통의 카이사르, 즉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지하에 가짜 교황 아나클레투스와 가짜 왕 루지에로를 타도하는 ‘성전’을 선언한다.


이로써 아나클레투스와 루지에로는 전 유럽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본토의 영주들 역시 루지에로 부자(1세와 2세)의 힘 앞에서 마지못해 시칠리아 공작 치하에 종속돼 있었지만, 새로운 왕가에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왕위에 오른 루제로가 향후 지속적으로 그들의 자치권을 제한할 것임을 내다보았다. 그들은 교황-황제의 남진 소식이 들리기 무섭게 반-시칠리아의 기치를 들었다.


1128년 발발한 교황 오노리우스(교황청)와 루지에로의 전쟁은 더위에 의해 흐지부지 막을 내린 바 있었다. 그러나 더위 외에도 당시 교황청/반 루지에로 연합군에게는 제대로 된 지휘관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반면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오트빌 가문의 라이벌 가문 격인 아베르사(남이탈리아 최초의 노르만 영토) 공작가 드렝고 가문 소속이자 루제로의 처남 라눌프가 반-시칠리아군에 가담해 있었다. 그 배경에는 라눌프의 아내, 즉 루제로의 여동생이 남편을 버리고 라눌프의 아들과 함께 시칠리아로 도망했다는 사정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라눌프는 루제로를 숙적으로 여기게 된다.


상황은 루제로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풀리아와 캄파니아 전역에서 반-루지에로 움직임이 불길처럼 번졌을 뿐만 아니라 교황의 심복들이 남이탈리아의 교회/수도원들을 점차적으로 이노센트 편으로 회유하고 있었다. 반-아나클레투스-반-시칠리아군에게 있어서 루제로의 왕위는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정복지의 시민들에게 루제로를 ‘너희들이 왕이라 부르는 그자'라 불렀고, 서신에도 '공작' 작위를 붙여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트빌 가문의 존속을 위해서 삼촌 쥐스카르, 아버지 루제로를 뛰어넘는 활약상이 루제로에게 요구되고 있었다.


루제로는 1132년 대군을 이끌고 반도에 상륙한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로타르가 남부에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는 적군이 합류하기 전에 남이탈리아 전체를 평정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가장 큰 적이었던 드렝고 가문과의 전투를 불사해야 했다. 그들은 루제로를 놓칠세라 추격하고 있었다. 전투를 위한 적지를 모색하며 베네벤토 인근 지역을 배회하던 루제로는 노체라에서 카푸아군을 대면한다.  


카푸아-시칠리아의 충돌이자 노르만의 두 대표 가문 드렝곳-오트빌 간의 전면전이었다. 로베르와 라눌프가 이끄는 카푸아군은 배수의 진을 치고서 전투를 준비한다. 아내와 아들을 잃은 라눌프가 일선에 나섰다. 그는 "그대들이 왕이라 부르는" 루제로에게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돌려줄 것을 큰 소리로 요구하며, 루제로를 향한 원한을 쏟아낸다. 이제 전투만이 남았다. 시칠리아군의 선공으로 막이 오른다. 돌진하는 루지에로의 기병이 로베르의 기병과 충돌했다. 초반의 형세는 루제로에게 유리했다. 창을 버리고서 칼을 쥐어든 기병들 사이 백병전이 벌어졌고, 루지에로의 기병은 기세 좋게 로베르의 기병을 압도하는 데 성공했다. 카푸아군 기병 후방에 배치돼 있던 보병들 역시 뒤돌아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배수진 뒤에 자리한 작은 다리는 퇴각하는 대군이 건너기에 너무 좁았다. 수천의 병사가 여기서 익사했다. 보병 뒤에 남아있던 2진 기병이 루지에로를 향해 돌격했지만,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변수는 상황을 지켜보던 라눌프의 기병이었다. 로베르의 본진 측면에서 대기하던 그는 창기병을 앞세워 시칠리아군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전쟁을 위해 태어난 남자"라 불리던 라눌프였다. 그는 루지에로 진영 속으로 과감하게 침투하여 그 진열을 갈라놓았다. 적진 안에서 창을 버리고 칼을 든 라눌프는 적의 투구에 단검을 꽂아 넣다 낙마하면서까지 그 용맹함을 과시했다. 그의 기세에 전세는 완벽하게 뒤집히고 말았다. 이제 전의를 상실한 시칠리아군이 퇴각할 차례였다.


위기에 처한 루제로 역시 창을 거머쥐고서 반전을 꾀했다. “왕이 여기에 있다!”라고 호통을 치며 적진을 향해 돌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등장은 바라던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이미 시칠리아군은 궤멸되고 있었다. 패배를 직감한 루제로는 말머리를 돌려 살레르노를 향해 퇴각한다. 원수를 눈앞에 둔 라눌프가 맹렬히 그 뒤를 쫓았다. 필사적인 추격전이었다. 가까스로 살레르노에 도착했을 때 루제로에겐 단 네 기의 기병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두말할 나위 없는 참패였다.


교황 아나클레투스의 상황 역시 비관적이었다. 이노센트가 황제군을 대동하고서 로마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이노센트를 로마의 주인으로서 옹립시키는 것이었다(루지에로까지 타도하기에는 황제가 대동한 병사의 규모는 너무 작았다). 1132년, 에밀리아 로마냐에서 겨울을 보낸 황제는 1133년 4월 로마로 남진하여 아무런 문제 없이 시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아나클레투스는 바티칸과 그 주변 지역에 갇힌 채 농성해야 했다. 황제는 곧 로마의 절반을 확보하고서, 라테란에서 이노센트가 주관하는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다(성베드로 성당은 아직 아나클레투스파 세력권 내에 있었다). 노체라에서 참패를 당한 루제로로서는 아나클레투스에게 힘을 보태줄 여력이 없었다.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한 로베르(카푸아 공작)와 라눌프는, 이후 본토에 남은 루지에로의 마지막 영지인 살레르노까지 함락시킨다. 1132-33년은 아나클레투스-루지에로에게는 치욕스러운 겨울로 남게 된다.


로타르 3세


전 유럽이 그의 패전 소식에 기뻐했다. 아나클레투스의 대칙서까지 손에 넣은 카푸아군은 그것을 가지고서 루제로를 조롱했다. 루제로는 우선 훗날을 기약하며 시칠리아로 귀환해야 했다. 사령관으로서 루지에로가 삼촌과 아버지만 못함은 자명했다. 그러나 남다른 배포를 가지고 있던 그였다. 패배 직후 살레르노에서 보여준 루지에로의 침착함과 쾌활함은 경외의 대상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입은 수모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습관이 있던 그는 ‘절대 그들을 가만두지 않으리라’고 되뇌곤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시칠리아에서 새로이 병력을 집결시켜 복수를 준비한다.


1133년 봄 노르만-롱고바르드-사라센 구성의 시칠리아군을 앞세운 루제로가 반도에 상륙한다. 여태 필요 이상의 잔인성을 보인 적이 없는 그였지만, 더 이상 그는 자비롭지 않았다. 복수심에 불타는 시칠리아군에 의해 반란에 동조한 도시들은 투항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불태워졌다. 악명 높던 사라센군이 약탈과 방화에 앞장서고 있었다. 같은 해 6월, 무한정 이탈리아에 머물 수 없었던 황제가 로마를 떠나 독일로 향하자 이제 전쟁의 흐름은 정해진 수순과 다름없었다. 아나클레투스가 곧장 로마를 탈환했고, 이노센트가 피사로 피신했으며, 로베르(드렝곳/카푸아 공작) 역시 그의 영지 카푸아를 루제로에게 빼앗긴 채 새 동맹국을 찾기 위해 피사, 제노바 등지로 향한다. 남이탈리아를 파죽지세로 종횡하는 루제로에 의해 풀리아가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남이탈리아에 남아서 저항을 꾀했던 라눌프 역시 세가 기울었음을 인지하고서 아벨리노에서 루지에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처남과 매형은 서로를 끌어안았고, 이로써 루제로는 재차 남이탈리아 통일을 완수한다. 상황을 만족스럽게 수습한 루지에로는 늘 그렇듯 1133년 10월 시칠리아로 복귀한다.


그러나 여전히 루지에로에게는 적이 너무 많았다.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노센트파와 신성로마제국 또한 반-루지에로의 기치를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 게다가 새로운 세력들이 추가적으로 참전을 선언하고 있었다.  마침내 교황 이노센트, 신성 로마 제국,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비잔틴 제국이 그 뜻을 함께하는 반-시칠리아 연합군이 결성된다. 로베르와 라눌프가 이에 가담했음은 물론이었다. 연합군이 도달할 것이라는 소문만으로도 나폴리, 바리, 베네벤토, 트로이아 등지의 도시들이 다시 반-루제로 편에 섰다. 해군을 동원한 피사, 남이탈리아에서 기사단을 이끄는 로베르와 라눌프, 마지막으로 막대한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는 황제 로타르가 비잔틴과 베네치아의 지원을 등에 업고서 남진하고 있었다.


연합군의 전력은 막강했다. 규모로 보았을 때 루제로는 황제군과 전면전에서 승리를 바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남이탈리아를 잘 알고 있는 라눌프가 다시 칼을 갈고 있었다. 지난 전적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루제로가 라눌프와의 정면대결에서 승리할 것이라 예상하는 이는 없었다. 피사의 해군과 함께 다시 남이탈리아로 돌아온 로베르(카푸아 공작) 역시 나폴리와 아베르사를 그의 거점으로 삼고서 카푸아, 아말피와 그 주변 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1135년 6월 5일, 시칠리아군을 대동한 루제로가 이탈리아에 상륙한다.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각개격파뿐이었다. 그는 적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살레르노에서부터 북상한 그는 곧 나폴리를 포위하고서 공성전을 개시했다. 성내에서 농성하는 나폴리군을 통솔하던 것은 라눌프였다. 남이탈리아 대도시 중 유일하게 여태 자치권을 지켜온 나폴리는 이번 전쟁에서 반-루제로 세력의 본부 역할을 맡고 있었다. 나폴리 시민들 역시 수백 년간 지켜온 자유를 포기하느니 굶어 죽겠다는 각오로 전쟁에 임했다. 그러나 루제로의 의지는 강했다. 피사의 해군이 잠시 나폴리의 숨통을 터주는 데 성공하지만, 라벨로로 남진한 그들은 그곳에서 루제로에게 참패를 당하고서, 무려 15000명의 사상자를 내고서 퇴각한다. 나폴리를 에워싼 포위망은 다시 좁혀졌다. 이제 남이탈리아를 구원할 존재는 오로지 황제뿐이었다. 나폴리를 탈출한 로베르(카푸아 공작)는 독일까지 찾아가 황제 로타르에게 눈물로 원군을 애청한다.


오래전부터 루제로를 무찌르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고 있던 황제였다. 1136년 8월 15일, 드디어 제국의 대군이 남진을 알린다. 로타르로서는 이번에야말로 루제로와 아나클레투스의 문제를 종결지을 심산이었다. 다시 한번 반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세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퇴치했다고 생각했던 피사 해군이 다시 캄파니아 도시들의 성벽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나폴리 성벽 바깥으로 진출한 라눌프가 인근지역을 점령했다. 토스카나를 거쳐 남이탈리아에 도달한 황제 앞에서 성들은 제대로 된 전투조차 없이 투항하고 있었다.  


루제로에겐 로사르의 대군과 전면전을 치를 마음이 없었다. 승산이 없는 싸움은(승리가 불확실한 싸움도) 피한다는 것이 루지에로의 전략이었다. 어떻게든 황제를 독일로 귀환시킨 후 풀리아에서 라눌프/로베르와 승부를 낸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는 황제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분리하여, 시칠리아만을 그의 영토로 보장받는 조건으로 왕위를 보존하게 해 달라는 협상안까지 로타르에게 보낸다. 그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 믿는 이는 없었다. 다만 이 서신은 그가 얼마나 초조하게 황제가 남이탈리아를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연합군의 본래 계획은 캄파니아와 풀리아를 평정한 후, 피사의 해군을 통해 시칠리아로 상륙하여 루지에로의 본거지인 시칠리아를 궤멸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합국 사이 내분이 그 수행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1137년 8월, 피사군이 약 한 달에 걸쳐서 포위한 채 공략하던 살레르노가 뒤늦게 도착한 황제군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황제는 살레르노의 투항을 받아주고서 도시를 황제령으로 선언해 버렸다. 이에 피사군은 열분을 터뜨렸다. 그들로서는 응당 자신의 것이어야 할 재물과 벼르던 복수의 기회를 허무하게 빼앗기고 만 것이었다. 분노 속에서 그들은 루지에로와 별도로 휴전을 협상하고서, 9월 피사로 퇴군해 버렸다. 이로써 연합군의 시칠리아 원정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게다가 벌써부터 황제와 교황은 서로 풀리아와 캄파니아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우선 새로이 풀리아 공작의 작위가 하사돼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루지에로가 다시 야욕을 드러낼 경우 전장에서 그를 상대할 인물이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사실상 그 대상은 결정돼 있었다 라눌프가 적격이라는 데 있어서 이견은 없었다. 문제는 되려 교황과 황제 중 라눌프가 누구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가였다. 결국 그들은 라눌프의 임명식에 그에게 작위를 내리는 창의 자루는 황제가, 그 끝은 교황이 잡고서 함께 의식을 올리는 우스꽝스러운 합의를 보게 된다.

교황 이노센트 2세


1137년 가을, 시칠리아로 돌아와 때를 노리던 루제로로서는 드디어 반전의 실마리가 풀려나온다. 황제의 건강이 악화된 것이다. 죽음을 예감한 그는 결국 귀향길에 오른다. 그를 따라 이노센트 역시 로마로 떠날 차비를 해야 했다. 심지어 병약한 몸으로 가까스로 고국에 도달한 로타르는 같은 해 12월 사망하고 만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1137년 10월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루지에로의 시칠리아군이 상륙한다. 금세 상황이 역전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시칠리아군은 순식간에 나폴리를 제외한 캄파니아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시민들은 다시 한번 '반역'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잔인행위에 항의하는 목소리에 그의 병사들은 “네놈들의 황제는 어디 있다더냐?”라고 되받아쳤다.


단숨에 캄파니아를 정복한 루지에로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는 이제 새 공작 라눌프의 영토 풀리아로 기수를 돌렸다. 그 규모로 미루어보았을 때 루지에로의 압도적인 우세가 점쳐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승리를 확신하던 루제로였다. 그러나 드렝고 가문의 마지막 군웅 라눌프 또한 결사적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풀리아의 시민들에게 ‘승리 외 살아남을 길은 없다’며 참전을 호소했다. 결국 두 군대는 -리냐노에서 맞닥뜨린다. 평야에서 서로를 마주한 두 숙적의 승부는 기병들에 의해 결정될 터였다.


국왕 루제로(2세)의 아들 루제로(3세)의 돌진으로 전투의 막이 오른다. 젊은 루제로의 맹렬한 공세는 풀리아 군을 뒷걸음치게 하는 데 성공한다. 뒤를 따라 국왕 루제로의 기병 역시 과감히 적을 향해 전진한다. 그러나 역시 말 위에서 그의 능력은 부족했던 것일까. 왕의 돌격은 적진에 타격을 가하는 데 실패한다. 이어진 혼란 속으로 라눌프가 기병을 이끌고 루지에로를 향해 돌격한다. 그의 용맹성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전의를 상실한 시칠리아군이 전원 퇴각했고, 가장 먼저 줄행랑을 친 인물은 국왕 루제로였다. 그는 이번에도 그의 곁에 남은 고작 몇 기의 기병과 함께 전장을 가까스로 벗어나 살레르노로 피신한다. 라눌프로서는 이번에도 전투에는 승리했지만, 루지에로를 놓치고 말았다. 그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이 전투에서 시칠리아 편에서 싸우던 나폴리의 서른아홉 번째 공작 세르지우스가 사망한다


루제로와 라눌프에게 리냐노 전투는 노체라 전투의 반복이었다. 전투의 결과도 같았지만, 지역 내 힘의 균형에 큰 변화를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판에 박은 듯 같았다. 다시 한번 참패를 경험한 루제로였지만, 그는 여전히 남부이탈리아의 최강자였다. 라눌프는 그의 승리가 캄파니아 내 반-루제로 봉기의 불씨가 돼주길 기대했으나, 그런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패전 후 루제로는 시칠리아로 물러났으나, 그가 다시 돌아올 것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1138-39년을 거치며 드디어 남이탈리아의 운명은 결정된다. 1138년 아나클레투스 2세가 사망한다. 이로써 교황청 분열은 끝을 맞이하게 된다. 아나클레투스 지지 세력은 곧장 후계자를 선출했으나, 이미 루제로를 제외한 전 유럽이 이노센트를 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미 없는 저항이었다. 이노센트 2세는 마침내 명실공히 호노리우스의 후계자로서 교황청을 군림하게 된다. 아나클레투스가 사망한 상황에서 루제로 역시 더 이상 대세에 저항할 뜻이 없었다. 그는 이노센트게 화해의 서신을 보내 합의를 제안한다. 그러나 이노센트에겐 타도-루제로의 기치를 버릴 의사가 없었다. 그는 다시금 교황군을 대동하고서 남진을 시도한다.


그러나 다음 해인 1139년, 풀리아 공작 라눌프가  열병으로 트로이아(풀리아)에서 사망해 버린다. 같은 해 본토에 상륙하고서 이 소식을 접한 루지에로는 기쁨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고 한다. 이제 그의 뜻을 막을 적수는 없었다. 교황은 로베르와 라눌프의 아들 리샤르를 비롯한 천 명의 기사를 대동하고서 루제로를 정벌하러 친히 나서지만, 결국 1139년 7월 갈루치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루제로의 매복 전략에 빠져들어 참패하고 만다. 게다가 교황이 루제로의 포로로 붙잡히게 된다. 이제 루제로는 그의 삼촌 쥐스카르가 치비타테에서 그러했듯이 교황에게서 원하는 바를 모두 얻어낼 기회를 거머쥐었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채로는 더 이상 루제로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던 교황은 결국  그간의 파문 선언을 모두 철회하고, 그를 시칠리아의 국왕으로 인가하는 조약에 서명한다.


이로써 10년에 걸쳐 이어진 전란이 막을 내리게 된다. 루제로는 이제 스스로의 역량을 증명했고, 더 이상 그의 왕위를 문제 삼아 도전해 올 인물은 이탈리아에 존재하지 않았다. 1139년 8월 1일, 근 500년간 그들 도시를 외적으로부터 지켜내온 나폴리인들이 루제로에게 투항의 뜻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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