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6차 십자군 1

나폴리 14

by 무능의 욕망

1228년 6월 28일, 시칠리아 왕국 함대가 브린디시항을 출항한다. 천오백 기사, 일만 보병, 40여 척 함대가 페데리코를 따른다. 싸이프러스, 아크레를 경유하여 팔레스타인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역사는 이를 제6차 십자군 원정으로 기록한다.


당시 페데리코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1227년,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십자군 원정 실패의 책임을 물어 그를 파문한다. 그리스도교 세계로부터 그를 추방한 것이다. 이단아로 전락한 황제를 상대로 롬바르디아 동맹이 이탈리아 북부에서, 교황청이 중부에서, 사제들과 프란시스칸 수도사들이 남부에서 반기를 들고 나선다. 모두 황제의 위상을 실추시켜 시칠리아 왕국을 흡수하려는 그레고리 9세의 사주였다.


이처럼 십자군 출정은 악조건 속에 감행된다. 소년 시절 독일행 이후 황권을 건 두 번째 도박이다. 적들로 둘러싸인 시칠리아 왕국을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모험인 데다 성지탈환에 실패한다면 황제직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어려운 형세를 뒤집기 위해 십자군 원정이 필수적이라 판단한 것이다. 다시 한번 페데리코의 영웅적 기질이 발휘된다. 중세를 대표하는 카이사르(황제)가 그의 루비콘을 도하하고 있었다.

1200px-sixieme_croisade-es-svg.png

다만 전망은 비관적이었다. 다국적 대군이 동원된 제2차-5차 십자군조차 모조리 실패했던 성지수복이다. 파문 황제가 이끄는 천오백 기사와 일만 보병은 이슬람 제국군을 상대하기엔 중과부적이었다. 영웅 살라딘의 후손, 이집트의 술탄 알 카밀 또한 만만치 않은 적수였다. 그는 제5차 십자군을 상대로 이슬람군을 승리로 이끈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브린디시항을 뒤로하고 있는 페데리코에겐 오직 하나의 가능성만이 열려 있었다. 바로 알 카밀과의 협상이었다. 그는 심복 헤르만 폰 살차를 통해 알 카밀이 그의 동생이자 시리아의 칼리프인 알 무아잠과 갈등을 빚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실 과거 페데리코는 과거 알 카밀에게 사신을 보내둔 바 있었다. 알 무아잠의 소유인 예루살렘을 서방에 양보하는 대가로 이집트의 안전을 보장하는 제안을 건넨 것이다. 페데리코는 예루살렘을 얻고, 알 카밀은 눈엣가시인 동생을 견제하는, 쌍방에 득이 되는 합의안이었다. 알 카밀은 이에 긍정적인 답을 암암리에 약속했다.


그러나 1127년 11월, 상황은 달라진다. 다마스쿠스의 알 무아잠이 사망한 것이다. 이듬해 1228년 알 카밀은 무아잠의 후계자이자 자신의 조카인 안 나시르를 상대로 군사를 일으켜, 몇 달 안에 이집트에서부터 시리아를 아우르는 이슬람 제국의 패자로 등극한다. 물론 예루살렘 역시 그의 영토로 편입된다. 즉 시칠리아군이 출항할 시기 알카밀에게 예루살렘을 양보할 동기는 사라진다. 페데리코로서는 불상사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술탄은 유럽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교황과 황제 사이 불화와 그로 인한 황제의 불안한 입지 역시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 서방의 협소한 군대는 알 카밀을 상대로 위력적인 협상 카드조차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페데리코는 십자군 원정을 감행한다.


시칠리아군은 우선 싸이프러스를 거쳐 아크레에 주둔한다. 예루살렘이 코앞인 아크레에서 본격적으로 알 카밀과의 협상에 임하겠다는 것이 황제의 계획이었다. 명마, 금은과 보석을 동반한 사절단이 알 카밀의 궁정에 파견된다. 이들은 알 카밀에게 황제가 오직 정당한 그의 몫을 주장할 뿐이라는 논리를 펼치며 예루살렘의 반환을 요청한다. 그렇게 황제와 술탄 사이 외교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fdcd27c6-8867-4ae4-b42d-9b9631997464_1200x666.jpg


페데리코는 협상이 장기전이 될 것임을 내다보았다. 응당 사신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이번에도 페데리코에게 운이 따른다. 그는 자신의 구세주가 되어줄 파크르 알딘을 이슬람 측 사신으로 만난다. 외교관인 동시에 에미르(군사/지방 통치자)인 파크르 알딘은 그의 술탄이 그러했듯 관료이기에 앞서 교양인이었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이슬람의 종교, 문화, 학문적 성취에 존경을 표하는 서방의 황제가 그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을지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페데리코는 금세 그의 마음을 얻게 된다.


사신 파크르 알딘은 분명 페데리코가 자신의 주군 알 카밀과 닮은 인물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알 카밀 또한 이슬람의 전설적 군주(살라딘)의 후계자로서, 그 유산을 지켜내기 위해 정적들과 투쟁했던, 오서독스 종교지도자들과 충돌을 일삼는 이단아였다. 과학, 수학, 인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식인들과 밤을 지새우며 토론하는 일을 즐겼던 점도 페데리코와 닮아 있었다. 파크르 알딘은 아마 두 남자 모두가 만족할만한 협상 결과의 가능성을 보았을 테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음에도, 두 영웅은 파크르 알딘을 매개로 서로를 향한 경외심을 품게 된다.


이 시기 둘 사이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알 카밀이 적수 페데리코의 목숨을 구한 사건이다. 교황 그레고리 9세의 음모로부터 시작된 일화였다. 페데리코의 출항 이래 원정을 좌절시킬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던 교황은 수차례 파문 황제의 십자군은 성전일 수 없음을 선언하고서, 동방의 사제들과 원정에 참여한 기사들에게 황제에 대한 협조를 금지하고, 이들에게 황제를 음해하라는 지령을 거듭해서 전달한다. 전장에 주둔하고 있는 페데리코로서는 언제 등 뒤에 칼이 꼽힐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황은 원정에 동참하고 있던 템플라 기사단을 통해 페데리코가 요르단강을 방문할 것이라는 정보를 손에 넣는다. 그는 이교도와 그 어떤 소통도 금하는 교회의 원칙을 스스로 묵살하며 알 카밀에게 밀사를 보낸다. 페데리코의 행선지를 이슬람 측에 알려주어 납치를 종용한 것이다. 원정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데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알 카밀은 이를 거절한다. 교황의 비겁함이 그의 경멸을 산 것이다. 그는 되려 이 서신을 페데리코에게 전달한다. 서신을 받아 든 페데리코가 알카밀이 보여준 신의에 감격했음은 물론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교리를 앞세우면서 은밀히 권력을 탐하는 사제들을 상대하는 데 이골이 난 두 사람이 서로 얼마나 닮아있는지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Giorgio_Vasari,_Scomunica_di_Federico_II_da_parte_di_Gregorio_IX,_1572-73,_03_(cropped).jpg 페데리코를 파문하는 그레고리 9세 (조르지오 바사리 16세기)


물론 호의가 곧장 외교적 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불가피하게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는 황제였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난관은 중동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본국의 상황 역시 심상치 않았다. 교황이 시칠리아 왕국을 향한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그레고리 9세는 페데리코가 출항하기 무섭게 모든 제후들에게 파문 황제에 대한 충성을 철회할 것을 명령하며, 노골적으로 시칠리아 왕국 내에서의 봉기를 종용한다. 페데리코가 임명한 시칠리아 왕국의 섭정 스폴레토 공작은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여, 군사를 일으킨다. 교황에 대한 그의 판단은 옳았지만, 섣부른 군사행동은 페데리코가 그에게 부여한 권한을 넘어서는 섣부른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교황에게 남부 침공을 정당화하는 빌미를 마련한다. 결국 모든 살인을 금하는 그리스도교의 수호자 교황청의 군대가 같은 그리스도교들을 상대로 그것도 십자군 원정에 임하고 있는 시칠리아 왕국으로 진군한다.


팔레스타인에서 이탈리아 상황을 보고받으며 발을 구르고 있던 페데리코는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도 군과 가신들의 사기를 꺾지 않기 위해 겉으로는 담대함을 과시해야만 했다. 다만 그가 이 시기 절망 속에서 울분을 터뜨렸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걸 보면, 몇몇 측근에게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던 듯하다. 페데리코는 이 원정을 통해 다시금 지도자로서 모든 역량을 시험받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황제 페데리코 세콘도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