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 나무 Nov 16. 2019

이해에 대한 고찰

이해란 무엇인가?


오늘 아침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분께서 이해의 철학적 정의는 “더 많이 알기 위한 노력이다.”라고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최근들어 ‘이해’라는 단어가 우리의 일상에서 생각보다 자주 그리고 너무나 쉽게 사용되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해라는 미명하에 "네가 형이니까, 언니니까 동생을 좀 더 이해해줘야지, 더 많이 배운 네가, 혹은 마음이 넓은 네가 그냥 이해하렴.” 등 이해가 인내나 희생 혹은 넓은 아량 등의 의미와 혼용됨과 동시에 은연중에 강요될 때가 많은 것 같다. 또 반대로 “가족이면 그 정도는 이해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가까운 사이에 그 정도도 이해 못 하니? 어른이 되어서, 남자가 되어서 그 정도의 이해심도 없나?”등 상대가 나에게 해주어야 하는 당위적인 의미로 이해가 사용되기도 한다.



이해란 과연 무엇일까? 이해에도 다양한 사전적 의미가 있지만 인간관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이해’의 의미는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이라고 되어 있다. 참으로 아름답고 훈훈한 의미같지만 상당히 포괄적이고도 애매하다. 또한 ‘너그러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마음이 넓고 아량이 있게’라는 것으로 마치 마음이 넓고 아량이 있는 사람이 상대에게 베푸는 시혜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사전적 의미의 이해에는 어떻게? 왜? 등 상대에 대한 탐구와 알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이 없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에는 그 사람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 전제한다. 어찌 보면 노력이란 이해의 선택 조건이 아니라 필수조건이라는 생각도 든다. 막연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은 공감에 가깝지 분명 이해는 아니다. 또한 노력을 통해 누군가를 머리로 겨우 이해하게 되었더라도 가슴으로 온전히 이해하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다. 이렇듯 이해에는 상대를 알려는 많은 노력의 시간과 인내가 반드시 수반된다.



인생이라는 것과 인간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 보게 되는 요즘. 이해가 없는 관계, 즉 상대를 알고자 하는 노력이 결여된 관계는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수많은 것들을 공유하며 서로를 공감했다 하더라도 바닷가에 모래로 지은 집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상대의 행동을 전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나 그래야 할 의무는 없다. 다만 이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해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한번 정의를 내려보는 것은 어떨는지, 또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다가 순간적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드는 마음을 이해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갖고 있는 틀과 기준으로 상대를 재단하고 맞추려고 한다면 평생을 걸쳐도 누군가를 이해하는 경험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만사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무엇 하나 없듯이 나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에 대한 이해에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만약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내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왜 그랬을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작가의 이전글 기질이란 무엇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