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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Jun 21. 2022

어른들은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SCIFF, <침묵의 소리>, <하계훈련>

경청이란 참 갖기 힘든 덕목이다. 자신있게 굿 리스너(Good listener)라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어쩐지 세상은 점점 소통하기가 어려워진다. 나 역시 예전에는 내가 굿 리스너라고 믿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저 듣고 싶은 말만 잘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눈과 입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할 수 있지만 귀는 그렇지가 않다. 듣기 싫은 것도 불가항력적으로 들리고 만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저 청자이면서도 스스로 경청자라고 착각하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번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의 주제는 '어린이를 듣다'이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를 거쳐왔다. 그러나 어린이 때 우리가 어땠는지를 쉽게 잊어버린다. 어른들은 어린이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잘 믿어주지도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데 마음을 표현할 언어도 많이 알지 못한다. 그때의 크고 작은 마음들은 이제 희미해졌거나, <오팔>의 주인공 오팔처럼 무의식 속 어디엔가 묻어버렸다.


마음이 아파서 그러는 건데, <침묵의 소리>


어린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전부이다. 부모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내가 공주 왕자가 된 것 같고, 세상에서 내가 최고인 것만 같다. 반면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드는 순간 그 세계는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홍콩 영화감독인 얀얀 막의 <침묵의 소리>에서는 그 균열을 찬찬히 보여준다. 부모가 어린이를 듣지 않을 때의 비극이다. 사실상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의 눈으로 보면 대단한 비극이 아닐지라도 어린이에게는 세상을 잃은 것만 같은 비극일 수 있다. 세상이란 추상적인 개념이니, 세상을 잃었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겠다.


광짜이의 부모는 학교에 불려가 담임과 상담을 받게 된다. 광짜이의 성적이 너무 많이 떨어져서이다. 성적이 떨어진 이유를 어른 셋이서 생각해 보는데, 아무래도 최근 광짜이의 할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일 것 같다. 어른들의 생각이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 대신 할머니가 광짜이를 돌봐주었다. 광짜이는 우주를 알고 싶고 외계인이 궁금한, 우주비행사를 꿈꾸는 아이이다. 할머니는 광짜이가 학교를 마치고 가면 항상 기다리고 있고, 광짜이와 우주비행사 놀이도 해주었다.



엄마는 어린 동생을 돌보느라, 부동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광짜이에게 신경 쓰기가 쉽지 않다. 성적에 대하여, 공부에 대하여 물어보지만 광짜이는 영 시큰둥하다. 아빠는 바쁘다. 물류회사는 주말도 없이 돌아가고, 당장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돈을 버는 게 더 중요하다. 깊은 밤 광짜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엄마아빠는 동생과 셋이서 다정하게도 잠들어 있다.


이제 할머니는 없고, 광짜이는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 유일한 대상은 아주 어렸을 때 엄마아빠와 놀이동산에 갔다가 경품으로 받은 우주비행사 인형뿐이다.


어느 날, 광짜이가 사라진다.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고, 광짜이의 엄마와 아빠는 광짜이를 찾아 온동네를 헤맨다. 그러다 광짜이가 우주비행사 인형에 녹음한 것을 듣게 된다.


엄마는 매일 혼내고, 아빠는 자기와 시간을 보내주지 않고, 동생은 사랑하지만 자기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언제나 혼자이고 외로운 우리들을, <하계훈련>


체육계에 비일비재하게 폭력 문제가 터진다. 늘 그래왔다는 말로, 체육계 전통이라는 말로 덮고 넘어가기에는 선수들의 고통이 너무도 컸다. 최근에는 신체폭력뿐만 아니라 성폭력도 수면위로 올라왔다. 우리나라는 폭력에 꽤 관대하여ㅡ특히 권력자의 폭력에만 관대하다. 약자의 폭력은 가차없이 형을 때리곤 한다. 정당방위도,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여자가 남편을 때리거나 죽이는 것 등ㅡ 가해자는 솜방망이같은 처벌만 받는다.


여기에 미래의 야구 꿈나무 지성이가 있다. 코치에게 빠따로 맞으면서도 어떠한 항변도 하지 못하는 아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유소년선수이다.



지성은 하계훈련 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듣는다. 할아버지 발인 다음날은 중요한 시합이 있다. 야구 유니폼을 벗고 상복을 입은 지성은 어쩐지 자유로워 보인다. 드러누워 과자도 먹고 음악도 듣는다.


지성은 편지를 쓴다. 마치 광짜이가 우주비행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듯이, 더 이상 야구를 하고 싶지 않고, 다른 삶을 살아 보고 싶다는 지극히 평범한 바람을 담는다.


장례식에 찾아온 아버지의 친구들은 지성을 칭찬한다. 잠깐, 지성에 대한 칭찬인가? "아버지가 네 자랑을 정말 많이 했다." "너는 아버지의 희망이다"와 같은 말이 지성을 칭찬하는 말일까.



지성은 끝까지 편지를 전달할 타이밍을 잡지 못한다.  편지는 영 엉뚱한 타이밍에 아버지의 손에 들어가는데, 장례식장에 찾아온 코치에게 엄마가 촌지 봉투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 지성이 뛰어갔을 때이다. 아버지는 가만히 앉아 지성의 편지를 읽는다.


지성은 봉투를 빼앗아 부조함에 넣어버린다. 장례가 끝난 후, 아버지는 지성을 옆에 앉히고 말한다. 아빠는 열심히 살 테니까 아들도 야구 열심히 하자.


*


광짜이는 우주비행사 인형을 갖게 된 놀이동산에서 발견된다. 광짜이의 아빠는 광짜이에게 사랑을 말하고, 얼마나 자기가 행복한 아빠인지 말한다.


지성은 시합날 공을 대충 던지다 코치에게 뺨을 맞는다. 그 모습을 엄마아빠도 지켜 보고 있다. 지켜만 보고 있다. 지성도 그들을 본다. 그리고 공을 던진다. 그 공은 타자의 배트에 맞아 장외홈런을 치고, 저 멀리 날아가는 야구공처럼 지성도 시합장을 뛰쳐나간다.


*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 중 돈도 안 들고 몸도 안 써도 되는 일이 잘 들어주는 것이다. 어른보다 몸이 작다는 이유로,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어른보다 아는 것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말이 자주 묵살된다.


어린이가 아니게 된 지도 한참이다. 나는 이제 어른이지만, 어른들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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